"학벌사회에서 난 천민, 그래서 역사물 쓴다"
[인터뷰] <왕자의 눈물> <조선비화> 등 역사물 작가 배상열 시민기자
"군주국가인 조선을 이해하려면 군주에게 접근하는 것이 첩경이다. 특히 인과가 중요시되는 역사 분야에서 왕의 전신인 왕자에게 다가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이때까지 왕자들을 따로 다룬 책이 없었다. 타의에 의해 권력에서 멀어지거나 심지어 목숨까지 잃어야 했던 왕자들은 출처가 불분명한 야사의 언저리에서 서성댈 따름이다. 그러다가 시나브로 사라지면 누구도 찾지 않게 될 것이니, 어찌 안타깝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왕자를 알지 못하고 역사에 접근하는 것은 책의 중요한 부분을 빠뜨리고 읽는 것과 진배없다. 왕을 이해하려면, 더 나아가 조선 전체의 구도를 잡아내려면 왕자부터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쓴 유일하고 절박한 이유이다."-저자의 말 중에서
배상열의 <왕자의 눈물>(청아출판사 펴냄) 머리말 일부다. 역사에 관심을 두고 역사물들은 꽤나 봤는데, 왕자들만을 따로 다룬 책은 읽은 적이 없다. 그러니 조선의 왕자들에 대해 아는 것이란 거의 없다. 사도세자나 소현세자, 충녕대군이나 양녕대군, 수양대군 정도?
그런데 이들에 대한 것도 왕자가 아닌, 재위 중의 사건이나 치적 등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등을 토대로 한, 즉 왕이 (역사의)중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왕의 언저리에 있으면서 온갖 권력이 몰려들던, 때로는 부친인 왕과 정적이 되기도 했던 왕자를 통해 만나는 역사도 다분히 흥미롭지 않을까? <왕자의 눈물>에 관심이 쏠렸던 이유이다.
'광해군'편을 가장 흥미롭고 애잔하게 읽었다. 연산군과 더불어 조선시대 대표적인 폭군임에도 연산군에 비해 턱없다 싶을 만큼 거의 알려지지 않은 광해군. 내가 광해군에 대해 아는 것이란 '존속살인'과 '인조반정으로 인한 폐위' 정도다. 그런데 이 책에서 만나는 광해군은 변덕스럽고 무능한 선조에게 희생당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선조와 광해군, 누구의 죄가 더 무거운가
왕자가 아닌 선조가 어떻게 왕이 되었으며 차남인 광해군은 왜 세자가 되어야만 했는가? 선조는 나라를 어떻게 버렸으며 왕이 버린 나라를 광해군은 어떻게 지켜냈는가? 선조는 어떻게 광해군을 망쳤으며(이용했으며) 광해군은 왜 폭군이 되어야만 했는가? 선조와 광해군, 누구의 죄가 더 무거운가? (저자와의 통화, 메일을 통해 물었던 것들이다)
- 인문서 <왕자의 눈물>속에 나오는 왕자들 중 소설화 하고 싶은 왕자는?
"양녕대군과 사도세자, 그리고 광해군이다. 조선의 왕자들 중 미화나 폄하, 그 간극이 가장 큰 것이 양녕대군이다. 그 간극 사이를 파헤쳐보고 싶다. 사도세자는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을 근거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졌다. 혜경궁 홍씨는 당파싸움에 지아비를 억울하게 잃은 동정적인 시각으로만 많이 알려졌지만, 영조에게 지아비를 위한 구원의 애원 한마디조차 한 적이 없는 냉정한 사람이다. 이런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 속의 사도세자와 사도세자의 진실에는 많은 차이가 있지 않겠는가!"
- 그렇다면 광해군은?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조식, 기대승, 조성룡, 성혼, 정철, 이순신, 곽재우, 권율, 김시민, 김덕령...,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이들은 모두 선조 때의 사람들이다. 조선 최대로 인재들만 제대로 써도 세종에 버금가는 치적을 이룰 수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선조는 조선의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임진왜란'과 '당파싸움을 발현'을 자초한 장본인이다. 광해군도 이런 선조에게 이용당하고 희생당한, 선조가 만든 폭군이라고 할 수 있다."
- 혹자들은 임진왜란이란 국난이 이순신이나 권율과 같은 명장들을 만들었다고도 하던데.
"선조의 정치적인 역량이나 인간성을 보면 선조가 조선의 불행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정철 등이 세자책봉의 필요성을 말하자 '내가 죽기 바라는 것 아니냐?'며 펄펄 뛰던 선조는 임진왜란이 터지자 차남인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를 던져주고 자신은 명나라 망명길에 오른다. 자신을 대신해 국난을 수습하거나 나라의 운명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고도 전쟁 중에 양위소동을 15차례나 벌이는 등의 방법으로 광해군을 끊임없이 저지하고 압박한다.
그뿐인가. 국난을 이겨낸 광해군의 입지를 굳혀주기는커녕 늦은 나이에 왕비를 간택, 왕자를 얻는 등 광해군을 밀쳐내려고 온갖 잔꾀를 부린다. 인조반정의 명분이 된 광해군의 존속살인은 광해군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란 생각도 든다. 광해군은 선조의 변덕과 몰염치에 희생되었다는 생각이다."
- 조선의 왕실에서 존속 살인을 한 것은 광해군뿐인가?
"광해군은 재위기간이 15년. 반정을 당해 유배지에서 18년을 살았다. 재위 기간보다 유배생활이 무려 3년이나 길다. 반정을 당한 선배 연산군이 유배지에서 불과 두 달을 넘기지 못하고 죽은 것을 보면 광해군의 18년 유배생활은 놀랍고 궁금하다. 마지막 유배지였던 제주도에서는 7월 1일에 내리는 비를 광해우(光海雨)라 부른다고 한다. 광해군은 사도세자 못지않게 불행한 사람인데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인조반정의 명분을 위한 기록이나 평가가 지배적인 것 같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좀 더 많이 알려져야 한다. 유배지에서의 18년, 그 궤적을 따라가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학벌로 인간을 평가하는 이 시대, 난 천민"
- 왜 하필 역사물을 쓰는가?
"내 최종학력은 삼류 공업고등학교다. 인간 평가의 잣대가 학벌인 우리나라에서 나 같은 공고생 출신은 막말로 '천민'에 해당하는 계층이랄 수 있다. 어느 날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가 '가정환경조사서'를 가져왔는데, 부모의 재산과 학력을 기재하는 곳이 있더라. 당시 난 나의 학력과 기술로 가족을 부양하는데 그다지 곤궁하지 않았다. 그랬음에도 상당히 곤혹스러웠다. 자식을 위해 '무식한 아비'가 될 수 없었다. 가정 형편상 하지 못한 공부를 다시 해볼까 했지만 부양해야 하는 가족 때문에 대학 진학은 어림없었다. 그때 문득, '작가가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떠올랐다. 1998년이다.
그때부터 정신없이 나만의 공부에 몰두했다. 하필 왜 역사물인가? 역사를 제대로 아는 사람, 역사인식이 제대로 선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때 공부하고 글을 쓴 덕분에 지금은 꽤나 많이 알려진 '유식한 작가 선생님'이 된 것 같다. 지금은 여러 출판사로부터 출판물 제의를 많이 받으니 말이다(웃음)"
- 짧은 집필기간에 상당히 많은 역사물을 쓴 것으로 안다.
"2003년, 임진왜란과 국제관계를 조명한 7권짜리 대하소설 <풍운-1부>를 낸 것이 시작이다. 너무 의욕이 앞서다보니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2004년에는 <북벌영웅 이징옥-전 3권> <이순신 최후의 결전-전3권>(2005년) <난중일기 외전>(2007년) <조선비화>(2008년) <동이>(2008년) 등을 냈다.
잠시 외도하여 수필집(2006년)을 내기도 했지만 역사물이 내게는 친숙하다. 역사물을 계속 쓸 작정이다. 2009년 1,2월 중에 <조선시대 반란사>(가제) <조선 로데오에서 할렘까지>(가제) <아, 숭례문>이 나올 계획이다."
-그동안 쓴 역사물 중 가장 만족스러운 작품은?
"<난중일기외전>이다. 수많은 역사인물 중 이순신 장군을 제일 좋아한다. 10년 동안 그분의 흔적을 좇았다. 그 결과물이다. 이 책에 그분의 삶과 정신세계, 그분이 겪었던 것들을 최대한 담아보려 했지만 100% 완성작이란 만족감은 없다. 충무공에 대해선 워낙 많이 알려졌지만 여전히 많이 미흡한 것 같다. 아직도 알려야 할 충무공의 궤적이 많다. 때문에 언제든 <난중일기외전> 그 나머지 이야기들을 써 볼 작정이다."
- 역사물 집필도 역사쓰기이다. 사극이나 역사소설에서 재미를 위해 '가능성 있는 역사적 상상'을 넣었음에도 독자(시청자)들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최근, 다양한 시각의 역사물이 많이 나왔다. 그 와중에 같은 사건을 다르게 쓴 경우도 더러 보인다. 자료는 주로 어떻게? 어떤 자료들이 근거가 되는가?
"'이덕일’이나 '이수광' 등, 이미 검증된 작가들의 신간은 반드시 구입하여 몇 차례고 정독한다. 서점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저명도가 그리 없어도 새롭게 나타난 작가들의 서적을 습관적으로 구입하여 탐독한다. 내가 모르고 있었거나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면 또 자료들을 찾아 몇 번이든 수많은 자료들을 뒤지고 뒤진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수많은 고문서 등, 조상들이 남긴 문화재, 역사자료들은 늘 습관적으로 열람하거나 만난다."
"하필 왜 역사물인가?"라는 물음에 "역사를 제대로 아는 사람, 역사인식이 제대로 선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했)기 때문이다"라는 저자의 대답은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저자의 이 말을 그대로 말해주는 듯 <왕자의 눈물>에는, 이제까지 우리가 애써 알려고 하지 않았으나 균형 잡힌 시각을 위해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이야기들이 많다.
배상열의 <왕자의 눈물>은 어지간한 역사물을 읽을 만큼 읽은 사람들에게는 이제까지 알고 있던 역사의 새로운 면을 보게 하는 계기의 책이 될 것이며, 역사에 그다지 해박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이 책이 주목받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왕자의 눈물 겉그림 ⓒ 청아출판사
그런데 이들에 대한 것도 왕자가 아닌, 재위 중의 사건이나 치적 등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등을 토대로 한, 즉 왕이 (역사의)중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왕의 언저리에 있으면서 온갖 권력이 몰려들던, 때로는 부친인 왕과 정적이 되기도 했던 왕자를 통해 만나는 역사도 다분히 흥미롭지 않을까? <왕자의 눈물>에 관심이 쏠렸던 이유이다.
'광해군'편을 가장 흥미롭고 애잔하게 읽었다. 연산군과 더불어 조선시대 대표적인 폭군임에도 연산군에 비해 턱없다 싶을 만큼 거의 알려지지 않은 광해군. 내가 광해군에 대해 아는 것이란 '존속살인'과 '인조반정으로 인한 폐위' 정도다. 그런데 이 책에서 만나는 광해군은 변덕스럽고 무능한 선조에게 희생당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선조와 광해군, 누구의 죄가 더 무거운가
왕자가 아닌 선조가 어떻게 왕이 되었으며 차남인 광해군은 왜 세자가 되어야만 했는가? 선조는 나라를 어떻게 버렸으며 왕이 버린 나라를 광해군은 어떻게 지켜냈는가? 선조는 어떻게 광해군을 망쳤으며(이용했으며) 광해군은 왜 폭군이 되어야만 했는가? 선조와 광해군, 누구의 죄가 더 무거운가? (저자와의 통화, 메일을 통해 물었던 것들이다)
- 인문서 <왕자의 눈물>속에 나오는 왕자들 중 소설화 하고 싶은 왕자는?
"양녕대군과 사도세자, 그리고 광해군이다. 조선의 왕자들 중 미화나 폄하, 그 간극이 가장 큰 것이 양녕대군이다. 그 간극 사이를 파헤쳐보고 싶다. 사도세자는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을 근거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졌다. 혜경궁 홍씨는 당파싸움에 지아비를 억울하게 잃은 동정적인 시각으로만 많이 알려졌지만, 영조에게 지아비를 위한 구원의 애원 한마디조차 한 적이 없는 냉정한 사람이다. 이런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 속의 사도세자와 사도세자의 진실에는 많은 차이가 있지 않겠는가!"
- 그렇다면 광해군은?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조식, 기대승, 조성룡, 성혼, 정철, 이순신, 곽재우, 권율, 김시민, 김덕령...,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이들은 모두 선조 때의 사람들이다. 조선 최대로 인재들만 제대로 써도 세종에 버금가는 치적을 이룰 수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선조는 조선의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임진왜란'과 '당파싸움을 발현'을 자초한 장본인이다. 광해군도 이런 선조에게 이용당하고 희생당한, 선조가 만든 폭군이라고 할 수 있다."
- 혹자들은 임진왜란이란 국난이 이순신이나 권율과 같은 명장들을 만들었다고도 하던데.
"선조의 정치적인 역량이나 인간성을 보면 선조가 조선의 불행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정철 등이 세자책봉의 필요성을 말하자 '내가 죽기 바라는 것 아니냐?'며 펄펄 뛰던 선조는 임진왜란이 터지자 차남인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를 던져주고 자신은 명나라 망명길에 오른다. 자신을 대신해 국난을 수습하거나 나라의 운명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고도 전쟁 중에 양위소동을 15차례나 벌이는 등의 방법으로 광해군을 끊임없이 저지하고 압박한다.
그뿐인가. 국난을 이겨낸 광해군의 입지를 굳혀주기는커녕 늦은 나이에 왕비를 간택, 왕자를 얻는 등 광해군을 밀쳐내려고 온갖 잔꾀를 부린다. 인조반정의 명분이 된 광해군의 존속살인은 광해군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란 생각도 든다. 광해군은 선조의 변덕과 몰염치에 희생되었다는 생각이다."
- 조선의 왕실에서 존속 살인을 한 것은 광해군뿐인가?
"광해군은 재위기간이 15년. 반정을 당해 유배지에서 18년을 살았다. 재위 기간보다 유배생활이 무려 3년이나 길다. 반정을 당한 선배 연산군이 유배지에서 불과 두 달을 넘기지 못하고 죽은 것을 보면 광해군의 18년 유배생활은 놀랍고 궁금하다. 마지막 유배지였던 제주도에서는 7월 1일에 내리는 비를 광해우(光海雨)라 부른다고 한다. 광해군은 사도세자 못지않게 불행한 사람인데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인조반정의 명분을 위한 기록이나 평가가 지배적인 것 같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좀 더 많이 알려져야 한다. 유배지에서의 18년, 그 궤적을 따라가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학벌로 인간을 평가하는 이 시대, 난 천민"
▲ 배상열 작가 ⓒ 배상열
"내 최종학력은 삼류 공업고등학교다. 인간 평가의 잣대가 학벌인 우리나라에서 나 같은 공고생 출신은 막말로 '천민'에 해당하는 계층이랄 수 있다. 어느 날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가 '가정환경조사서'를 가져왔는데, 부모의 재산과 학력을 기재하는 곳이 있더라. 당시 난 나의 학력과 기술로 가족을 부양하는데 그다지 곤궁하지 않았다. 그랬음에도 상당히 곤혹스러웠다. 자식을 위해 '무식한 아비'가 될 수 없었다. 가정 형편상 하지 못한 공부를 다시 해볼까 했지만 부양해야 하는 가족 때문에 대학 진학은 어림없었다. 그때 문득, '작가가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떠올랐다. 1998년이다.
그때부터 정신없이 나만의 공부에 몰두했다. 하필 왜 역사물인가? 역사를 제대로 아는 사람, 역사인식이 제대로 선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때 공부하고 글을 쓴 덕분에 지금은 꽤나 많이 알려진 '유식한 작가 선생님'이 된 것 같다. 지금은 여러 출판사로부터 출판물 제의를 많이 받으니 말이다(웃음)"
강제해고 2년째 법정투쟁 중인 배상열 작가 |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이기도 한 배상열씨는, 1988년에 입사하여 20년 가까이 근무했던 한국일보에서 강제해고(2006년 12월 말) 당한 후 현재까지 계속 법정 투쟁중이다. 프로필에 적힌 '강제해고'에 대해 묻자 아래처럼 들려준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힘과 용기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1990년 중반까지 조선과 중앙, 동아와 더불어 '4대 일간지'로 군림하던 한국일보가 경쟁에서 탈락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처럼 근로자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경영진은 근로자에게 고통의 거의 전부를 분담시키고 이의를 제기하는 노조를 거침없이 탄압했다. 노조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회사를 살리고자 투쟁의 깃발을 내리고 생명과도 같은 임금 삭감에 동의하는 등 모든 면에서 적극적으로 도왔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강제해고의 칼날이었다. 그 과정에서 회사를 망친 놈들로 매도당하고 믿었던 위원장이 배반하는 등 기가 막힌 꼴을 많이 당했다. 마지막까지 싸웠던 30명의 동지들은 한겨울의 거리에 내몰렸고 퇴직한 동료 가운데 한 명이 자살했다. 9월말, 2년을 끌던 '해고무효소송'의 1심에서 승소를 거둔 것이었다. 담당 판사는 '원고인 노조 측이 승소하였으니 한국일보는 해고자들을 전원 복직시키고 그동안의 임금을 지급할 것'을 판결했다. 아직 고등법원과 대법원의 판결이 남았다."-배상열 그는 2007년 '제2회 디지털작가대상'과 '문화관광부장관상'을 수상했다. |
"2003년, 임진왜란과 국제관계를 조명한 7권짜리 대하소설 <풍운-1부>를 낸 것이 시작이다. 너무 의욕이 앞서다보니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2004년에는 <북벌영웅 이징옥-전 3권> <이순신 최후의 결전-전3권>(2005년) <난중일기 외전>(2007년) <조선비화>(2008년) <동이>(2008년) 등을 냈다.
잠시 외도하여 수필집(2006년)을 내기도 했지만 역사물이 내게는 친숙하다. 역사물을 계속 쓸 작정이다. 2009년 1,2월 중에 <조선시대 반란사>(가제) <조선 로데오에서 할렘까지>(가제) <아, 숭례문>이 나올 계획이다."
-그동안 쓴 역사물 중 가장 만족스러운 작품은?
"<난중일기외전>이다. 수많은 역사인물 중 이순신 장군을 제일 좋아한다. 10년 동안 그분의 흔적을 좇았다. 그 결과물이다. 이 책에 그분의 삶과 정신세계, 그분이 겪었던 것들을 최대한 담아보려 했지만 100% 완성작이란 만족감은 없다. 충무공에 대해선 워낙 많이 알려졌지만 여전히 많이 미흡한 것 같다. 아직도 알려야 할 충무공의 궤적이 많다. 때문에 언제든 <난중일기외전> 그 나머지 이야기들을 써 볼 작정이다."
- 역사물 집필도 역사쓰기이다. 사극이나 역사소설에서 재미를 위해 '가능성 있는 역사적 상상'을 넣었음에도 독자(시청자)들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최근, 다양한 시각의 역사물이 많이 나왔다. 그 와중에 같은 사건을 다르게 쓴 경우도 더러 보인다. 자료는 주로 어떻게? 어떤 자료들이 근거가 되는가?
"'이덕일’이나 '이수광' 등, 이미 검증된 작가들의 신간은 반드시 구입하여 몇 차례고 정독한다. 서점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저명도가 그리 없어도 새롭게 나타난 작가들의 서적을 습관적으로 구입하여 탐독한다. 내가 모르고 있었거나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면 또 자료들을 찾아 몇 번이든 수많은 자료들을 뒤지고 뒤진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수많은 고문서 등, 조상들이 남긴 문화재, 역사자료들은 늘 습관적으로 열람하거나 만난다."
"하필 왜 역사물인가?"라는 물음에 "역사를 제대로 아는 사람, 역사인식이 제대로 선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했)기 때문이다"라는 저자의 대답은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저자의 이 말을 그대로 말해주는 듯 <왕자의 눈물>에는, 이제까지 우리가 애써 알려고 하지 않았으나 균형 잡힌 시각을 위해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이야기들이 많다.
배상열의 <왕자의 눈물>은 어지간한 역사물을 읽을 만큼 읽은 사람들에게는 이제까지 알고 있던 역사의 새로운 면을 보게 하는 계기의 책이 될 것이며, 역사에 그다지 해박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이 책이 주목받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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