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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들을 위한 동화] 쌀통에 들어 간 놋그릇

식기들은 놋그릇이 없어지면 상대적으로 자신의 모습이 더욱 부각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등록|2008.12.15 15:11 수정|2008.12.15 15:11
갓 결혼한 새댁의 집에 다양한 식기들이 부엌 찬장 속에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습니다. 처음 보는 식기들은 서로 인사하며 잘 지내자고 덕담을 나눕니다. 모두가 새로 들어 온 식기들이라 저마다 반짝반짝 빛을 냅니다. 그 가운데서도 아름다운 문양을 가진 사기그릇이 단연 돋보입니다. 유리그릇을 비롯해 플라스틱 그릇, 머그잔, 쟁반, 종기들이 모두 화려한 문양과 품위를 지닌 사기 그릇 주위에 모여듭니다.

“와! 너무 예쁘고 아름다우십니다.”

플라스틱 그릇이 탄성을 자아냅니다.

“아마도 이 찬장에서 제일 고매하고 멋진 식기 같아요. 공기도 그렇고 대접도 그렇고 사기그릇들은 왜들 이렇게 다 아름다우세요. 함께 찬장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워요”

유리그릇이 플라스틱을 밀치며 사기그릇들 옆에 바짝 다가갑니다. 플라스틱이 유리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삐쭉 내 밉니다.

“아니 뭘, 다 같은 식기들인데. 잘나고 못나고가 어딨어요. 호호호”

잘 포개진 사기그릇 제일 위에 있던 그릇이 흐뭇한 표정으로 말합니다. 사기그릇들 모두 다른 식기들의 부러움이 싫지 않은 듯한 표정입니다.

“어머! 같은 사기인데 난 왜 문양이 없지? 크기도 훨씬 작고”

종지가 자신의 몸과 사기그릇을 번갈아 보며 우울해 합니다.

“종지야 ! 그렇게 낙담하지 마! 넌 그릇이 아니고 종기니까 작은 거야. 무늬가 화려하고 크기가 크고 재질이 좋다고 해도 난 너와 같은 식기에 불과해. 우린 같은 식기야. 너도 너 나름대로의 타고난 고유의 기능이 있잖아. 거기에 충실하면 되는 거지”

사기그릇이 종지의 불만을 다독거립니다.

“어쩜! 사기그릇은 몸도 예쁜데다 마음까지도 저렇게 넓을까?”

머그잔이 또 사기그릇을 치켜세웁니다.

찬장에는 사기그릇이 가장 많았습니다. 머그잔을 비롯해 쟁반, 접시, 유리그릇 등 대부분의 식기들은 사기그릇을 중심으로 자신의 입지가 정해 질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최대한 이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때 한켠에서 우두커니 이 모습을 지켜보는 그릇이 있었습니다. 놋그릇이었습니다. 놋그릇은 사기그릇과 달리 은은한 빛을 내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한 품위가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다른 식기들은 같은 종류가 많은데 놋그릇은 달랑 공기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놋그릇이 아직까지 남아있네요?”

사기그릇이 놋그릇을 보며 인사합니다.

“네. 전 새댁이 산게 아니로 이번에 선물로 들어왔어요”

공기 놋그릇이 뚜껑를 벗으며 예의바르게 인사합니다. 다른 식기들은 자신들의 모양과 전혀다르고 왠지 모를 고매한 품격 마저 느껴지는 놋그릇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사기그릇은 모든 시선이 놋그릇에게 쏟아지자 질투가 났습니다. 현대생활에 맞지 않는 구시대 유물인 놋그릇이 자신들을 제치고 찬장의 꽃으로 피어날까 걱정되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찬장의 문을 엽니다. 바로 새댁입니다. 식기들이 눈을 반짝거리며 새댁을 반갑게 맞이합니다. 오늘은 누가 새댁에게 선택되어 맛난 반찬을 담을 지 모두 새댁의 선택을 기다리며 긴장합니다. 그런데 새댁에게서 의외의 질문이 나옵니다.

“어쩌지 내가 깜빡하고 쌀통에서 쌀 퍼낼 때 필요한 용기를 사지 않았는데 누가 수고 좀 해 주겠니? 일주일 후에 내가 전용 컵을 살 테니까 1주일만 부탁하자.”

새댁이 상큼한 미소를 띄고 식기들에게 부탁합니다. 그러나 먼지투성이 쌀통에 들어간다는 말에 어떤 식기도 선뜻 나서지 않았습니다. 사기그릇도 머그잔도 고개를 푹 숙입니다.

“아니 새댁이 처음 부탁하는 건데 왜들 가만히 있으세요? 우리가 하고 싶지만 우린 쌀통에서 어떤 것도 할 수 없어서 안타까워요. 너무들 하시네요”

접시와 종기가 그릇과 찻잔을 향해 볼멘소리를 합니다. 접시와 종기는 쌀통에 들어갈 일이 없기 때문에 더욱 큰소리를 치며 그릇들을 닦달합니다. 그릇들이 곤혹스런 표정을 짓습니다. 그때 사기그릇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밝게 웃으며 새댁에게 말합니다.

“그럼, 우리가 돌아가면서 할께요. 그런데 단 새댁이 꼭 매일 그릇을 바꿔줘야 하는 조건으로요”
“그럼. 여기 있는 그릇들은 내가 다 아끼고 사랑하는 것들이야. 꼭 그렇게 할게”
“그럼 오늘은 찬장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 사기그릇이 먼저 쌀통에 들어 갈께요. 내일은 머그잔이 들어가고, 모레는 놋그릇이 들어가고.. 일단 이런 순서로 하죠? 다들 동의하시죠?”

사기그릇이 먼저 솔선수범한다는 말에 반론의 여지없이 모두 고개를 끄떡입니다. 새댁도 만족스런 표정을 짓습니다.

“새댁! 자 그럼, 나부터 쌀통에 넣어줘요”

호쾌하게 응하는 그릇들의 반응에 새댁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공기 사기그릇이 쌀통에 들어 갔습니다. 쌀가루가 사기그릇에 하얗게 들러붙습니다. 먼지 때문에 사기그릇이 연신 기침을 하며 다짐합니다.

“미치겠네. 빨리 여길 벗어나야지. 다시는 여기 못들어 오겠어”

다음날, 약속대로 새댁이 사기그릇을 빼고 머그잔을 쌀통에 집어 넣었습니다. 쌀통에 들어가는 순간 머그잔이 쌀 먼지에 코를 막고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새댁! 난 여기 못 있겠어. 제발 날 좀 여기서 빼 줘! 부탁이야”

머그잔이 연신 기침을 하며 과장된 행동을 합니다. 머그잔의 행동에 새댁이 오히려 미안해 합니다. 새댁이 할 수 없이 머그잔을 다시 찬장에 올려다 놓습니다. 머그잔이 금방 돌아오자 식기들이 의아해 합니다.

“아- 내가 평소에 천식이 있거든. 참고 있을려고 했는데 못 있겠어. 다음에는 내가 꼭 들어갈게”

머그잔이 다음 순서인 놋그릇을 보며 부탁합니다. 놋그릇이 머그잔에게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기꺼이 쌀통에 들어갔습니다. 새댁도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는 식기들의 행동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 거기는 우리 식기들이 있을 데가 못돼. 먼지가 얼마나 날리던지. 그런 곳에 계속 살려면 난 절대 못 살아”

머그잔이 식기들을 보며 불만을 쏟아 놓습니다.

“맞아. 정말 있을 곳이 못 돼” 사기그릇도 머그잔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떡입니다.

“앞으로 어떡하지? 일주일이라고 하지만 난 단 1초도 못 있겠어”

머그잔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사기그릇을 봅니다. 사기그릇이 내심 자신이 원하던 방향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제안을 합니다.

“어차피 우리 찬장에서 놋그릇은 너무 안 어울려. 또 선물로 들어왔잖아. 우리하고 출신 성분도 다르고. 또 혼자 있으니까 괜히 우리보다 눈에 띄고. 이참에 놋그릇을 아예 쌀통용으로 쓰이도록 새댁한테 건의하는 게 어때?”

다른 식기들도 놋그릇 때문에 자신의 존재 가치가 떨어질까 우려하던 차에 사기그릇의 제안에 귀가 솔깃했습니다.

“그래, 뭐 놋그릇은 혼자고 우린 다수니까 새댁도 이해할꺼야.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원칙이니까 놋그릇도 할 말이 없을거야”

유리그릇이 맞장구를 칩니다. 식기들은 저마다의 이익을 계산한 뒤 놋그릇을 찬장에서 내 몰기로 결정했습니다. 다음날 새댁이 찬장문을 열고 머그잔을 집으려 하자 식기 대표인 사기그릇이 말합니다.

“여기 식기들은 모두 쌀통에 들어가기 싫어해요. 쌀통에 들어가느니 차라니 이 곳을 떠나겠다고 하네요. 놋그릇이 당분간 쌀통에 계속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 모두 그렇게 결정했어요”

식기들이 고개를 끄떡이며 사기그릇의 이야기에 동조합니다.

“그래? 그래도 놋그릇의 의견도 중요한 거니까 놋그릇에게 물어보고 결정하자” 새댁이 놋그릇에게 다가가 식기들의 의견을 전합니다.

“어차피 여기 오래 있지 않을 거니까 그렇게 하세요. 제가 조금 고생하면 되죠 뭐”

놋그릇이 힘들지만 식기들과의 화합을 위해 새댁의 의견을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입니다. 놋그릇이 쌀통에 당분간에 있겠다는 소식에 찬장의 식기들은 저마다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놋그릇이 없어지면 상대적으로 자신의 모습이 더욱 부각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면 다시 놋그릇이 여기 올 텐데 그때는 어쩌지?”

머그잔의 표정이 우울해 집니다.

“하하하! 걱정마. 그런 일은 없을테니까”

사기그릇이 호탕하게 웃습니다.

“왜?”

식기들이 사기그릇 주위에 모여듭니다.

“놋그릇은 재질이 놋이라 때가 잘 타. 며칠만 그 먼지 나는 쌀통에 있어도 특유의 윤기는 사라지고 시커멓게 변할 거야. 그때 다시 여기 올려고 하면 우리가 코를 막고 못 들오게 하면 되지. 새댁도 뭐 자신이 선택한게 아니니까 놋그릇에 크게 애정은 없을거야. 젊은 사람이 누가 놋그릇을 좋아해. 나만 믿어”

며칠 후 사기그릇의 말대로 놋그릇은 윤기는 사라지고 거무틱틱하게 변했습니다. 새댁이 새로 사온 간이용 플라스틱 용기를 꺼내고 놋그릇을 찬장에 올리려 하자 식기들이 저마다 코를 막고 난리를 칩니다.

“아! 놋그릇하고 같이 못 있겠어요. 저런 지저분한 모습을 하고 있는 놋그릇과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수치라고요”

식기들이 완강하게 반대합니다. 새댁도 놋그릇도 똘똘 뭉쳐 강경하게 나오는 식기들의 모습에 당황합니다.

“내가 그렇게 더러워졌어? 미안해. 하지만 나도 씻으면 깨끗해 질 거야. 새댁 나 좀 씻겨줘”

새댁이 놋그릇을 씻으려 하자 사기그릇이 외칩니다.

“며칠동안 쌀통에 있었으면 그 냄새가 몸에 배였을텐데. 씻어도 냄새는 사라지지 않는다고요. 우린 절대 놋그릇과 함께 있을 수 없어요”

사기그릇의 주동으로 식기들이 눈을 부릅뜨고 완강하게 나오자 새댁도 뭔가 결정을 했는지 단호하게 말합니다.

“안되겠다. 난 찬장에서 식기들이 분란이 나는 걸 원치 않아. 놋그릇이 다시 쌀통에 들어가야겠어”

“그럼 새로 온 쌀통용 전용컵이 있으니 다른 곳에 있으면 안돼요?” 놋그릇이 새댁에게 간절한 눈빛으로 말합니다.

“지금까지 너가 잘해 왔잖아. 해보니 너가 제격인 것 같아. 쌀통하고 어울리기도 하고. 새로 온 전용컵은 깨끗하니까 다른 용도로 쓰면 되고” 새댁이 놋그릇의 제안을 거부합니다.

식기들이 새댁의 제안에 저마다 좋아합니다. 새로 온 쌀통용 전용컵도 자신의 본래 모습을 상실한 채 쌀통에 들어가지 않고 컵으로 사용된 것을 기뻐합니다. 놋그릇은 어쩔 수 없이 쌀통에 들어갔습니다. 그후로도 놋그릇은 영영 쌀통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누군가 화합을 위해 양보를 하면 양보한 쪽이 영영 한 켠으로 밀려나는 것을 가끔씩 봅니다. 결국 도와주기 위해 한 일이 자신의 일이 되고 자신을 가둡니다. 양보하는 사람이 살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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