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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 독신녀가 그림을 만났을 때

[서평] 곽아람 기자의 <그림이 그녀에게>

등록|2008.12.16 18:15 수정|2008.12.16 18:17

▲ <그림이 그녀에게 : 서른, 일하는 여자의 그림공감> 책표지. 곽아람 저 ⓒ 아트북스

많은 이들의 인생에 있어 '서른'은 어떤 의미일까? 화려했던 청춘의 마지막, 늙어가는 것의 시작, 결혼과 성숙이란 단어가 익숙해지는 시기. 서른이 되면 왠지 마음이 무겁다. 나의 서른도 그랬고 타인의 서른도 그런 모양이다.

곽아람 기자는 <조선일보>의 인물 동정을 다루는 팀에 소속된 기자다.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기자라는 직업에 뛰어든 것도 특이한 이력이다. 그가 쓴 주말 섹션의 <곽아람의 명작 파일>은 미술사의 걸작을 소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책 <그림이 그녀에게>는 그림과 자신의 인생을 잘 버무려 맛깔스러운 그림 해석을 내놓는다.

책을 읽다 보면 솔직한 그녀의 자기 고백에 파묻히게 된다. 지방 출신의 서울 유학생으로 살면서 고단한 몸을 조그만 단칸방에 누이는 이야기부터 엄격했던 부모 이야기, 실패로 얼룩진 연애 이야기 등 소소한 일상이 그림과 함께 드러난다.

이제 막 서른이 된 그녀의 삶은 마리 드니즈 빌레르의 <그림 그리는 여자>의 등장인물처럼 세상을 응시하면서도 여성성을 잃지 않는다. 19세기 유럽의 신여성들이 여성성과 사회성을 동시에 가졌던 것처럼 그녀 또한 직장 여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겨움과 동시에 프릴 달린 블라우스를 입고 싶은 욕망의 줄다리기를 벌인다.

저자가 소개하는 그림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좋아하는 고흐나 고갱, 피카소 등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야기가 담긴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모든 그림에는 각각의 사연이 있겠지만 저자가 소개하는 그림은 더더욱 사연이 깊다. 저자의 인생철학이 그림을 보는 시선에 묻어나기 때문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들>이란 작품은 흰 천을 얼굴에 뒤집어쓴 남녀가 키스하고 있는 모습이다. 조금 엽기스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기괴한 그림이지만 이에 대한 해석을 보면 그림이 더 깊이 있게 다가온다.

"부드럽게 물결 치는 천을 통해 그들이 서로의 얼굴에 대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윤곽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행복하다. 상대에 대해서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이미지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상대의 본질과 참모습은 필요 없다. 그들은 다만 연인에게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들만 볼 뿐이다."

이런 연인들은 굳이 억지로 그 천을 벗겨 내려 하지 않는다. 연애 감정이란 상대에 대해 잘 모를 때, 상대가 환상 속에 존재할 때 유지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환상의 연애에 발을 들여 놓기도 하고 그로 인해 마음 아픈 순간을 경험하기도 하면서 마음의 성장을 일구어 간다.

책의 이야기들은 저자가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가 된 이후부터 이제 막 서른이 된 시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시기의 청춘들에게 이 세상은 힘겨움과 혼란, 달콤함과 씁쓸함의 연속이리라. 그림에 대한 해설을 읽으면서 나는 나의 20대 후반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지방에서 서울로 와 혼자임을 처절히 느껴 보기도 하고, 어설픈 연애를 시도하기도 했으며 친구와의 우정을 중시했던 20대. 부모님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지만 일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몸담았다는 핑계로 바쁘게 살았던 그 시절을 말이다.

책의 내용은 20~30대의 여성들이 공감할 것들이 많다.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고독한 나무가 있는 풍경>은 70년대에 태어나서 90년대 학번으로 살아간 사람들이라면 느꼈을 우울한 사회 속 나의 자화상을 대변한다. 크게 무겁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가볍지도 않았던 20대가 그렇게 흘러가고 막 서른이 된 여성들, 특히 독신 여성이라면 이 나무를 자기와 쉽게 동질화할 수 있을 것이다.

치열하게 20대를 고민하며 보낸 저자도 이제 서른이 되면서 인생의 전환을 맞는 듯하다. 저자는 페터르 브뤼헐의 <이카로스의 추락>을 소개하며 자기 혼자 부산을 떨며 20대를 보냈지만 정작 타인은 이런 자신의 일상에 관심조차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모두가 자신의 일에 골몰한 채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동안 자기 혼자 다리를 바둥대며 침몰하느라 야단법석을 떨었다는 것.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걸 깨닫자 사는 게 쉬워졌다. 이듬해 나는 미련 없이 복직했고, 더이상 안달복달하며 살지 않았다. 칭찬에도, 비난에도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내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가 주어졌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아무도 내게 기대하지 않았고, 그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더니 심간이 편해졌다."

많은 이들에게 서른의 의미는 비슷하게 다가올 것 같다. 저자의 말처럼 타인의 시선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는 시기, 인생에 대해 보다 폭넓게 이해하는 시기, 더이상 안달복달하며 살지 않는 시기. 이런 시기가 오면 마음이 편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남는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갈 것만 같았던 이십 대가 그렇게 훌쩍 떠나기 때문이다. 현재 방황하고 있는 이십 대나 그 시기를 그리워하는 삼십 대라면 이 책의 내용에 무척 공감할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이야기와 함께 소개되어 있는 그림을 들여다보며 나의 이십 대를 한 번쯤 되새김질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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