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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에 결혼한 누나...이젠 나도 못 알아보네

70여년 굴곡진 삶...누님, 치매와 싸워 꼭 승리하시오

등록|2008.12.20 22:03 수정|2008.12.20 22:03
한해를 마감하는 12월이라서 그런지 멀리 떨어져 사는 형제·자매와 친구들이 꿈에 자주 나타납니다. 반갑게 만나 기뻐하다가도 꿈에서 깨면 허망하기 짝이 없는데요. 넘어져서 얼굴에 상처가 났다는 장모님과 노인성 치매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큰 누님 안부가 가장 궁금했습니다.

▲ 한가로운 주말을 군산공원 비둘기집 앞에서 조카들과 즐기는 큰 누님. 40대 후반 모습인데 무척 행복하게 보이네요. ⓒ 조종안


폐렴 증세가 있어 치료를 받느라 부산 동래에 있는 병원으로 옮겼는데 경과가 좋다는 조카 전화를 받았지만 보고 싶은 마음은 더했습니다. 장모님이 거실에서 넘어져 상처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당장 달려가고 싶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미뤄오다 지난 주말 아내와 함께 다녀왔습니다.

11시가 넘어 퇴근한 아내와 13일 밤 자정이 다 되어 집에서 출발해서, 일요일 새벽 4시쯤 장모님이 사는 부산 처제네 아파트에 도착했는데요. 장모님 상처와 후유증이 생각보다 크지 않아 다행이었습니다.

이튿날 낮에는 장모님 친정 조카 결혼식에 참석하고, 오후에는 노인성 치매와 외롭게 싸우는 큰 누님 면회를 다녀왔습니다. 보고 싶은 분들을 뵙고 왔는데도, 60년 가까이 보관해오던 앨범을 차 안에 놓고 내린 기분이군요.

한 많고 지난(至難)했던 삶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부모의 강압으로 출가한 큰 누님은 동생인 저에게도 결혼 나이를 속일 정도로 삶이 매우 어려웠고 한이 많았던 여인입니다. 17세에 결혼한 것으로 알고 지내오다 몇 년 전 15세에 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으니까요.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는 담임선생님까지 집으로 모시고 와서 허락만 해주면 학비는 벌어서 다니겠다며 조르고 사정을 했지만, 부모님이 학교에까지 쫓아가 서류를 빼앗고 시집을 보내버렸으니 얼마나 한이 되었겠습니까. 사범학교에 입학해서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다는 말을 자주 했거든요.

▲ 하얀 눈이 무릎까지 내린 어느 해 겨울 군산 은파유원지에서 며느리와 활짝 웃는 모습. 설(혀)암 수술을 하기 전인 50대 초반 모습입니다. ⓒ 조종안

자녀는 아들 셋, 딸 하나를 두었는데 저보다 한 살 아래인 큰아들은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식모로 있던 할머니 댁에 놀러 가서 저수지에서 익사했습니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처럼 당시 아픔을 늙도록 잊지 못했다네요. 생일이 아들과 같은 날이어서 더욱 괴로워했던 것 같습니다. 해마다 생일이면 아들 묘에 다녀오곤 했으니까요.

저에게는 조카가 되는데, 죽은 아들과 제가 친한 친구처럼 사이좋게 성장했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부터 5년 가까이 같은 반을 했던 것이 큰 누님이 아들의 죽음을 쉽게 잊지 못하는 데 영향을 준 것 같아 죄송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죽은 아들 말만 나오면 공부를 못한다고 구박했던 게 가장 마음에 걸린다고 했거든요. 

30대 후반에는 여성에게 생명이나 다름없는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하는 바람에 젊은 시절을 상실감 속에서 지냈습니다. 남편(매형)이 몹쓸 병에 걸려 20년 가까이 고생하다 돌아가셔서 몸과 마음고생을 무척 했고, 50대 중반에는 설(혀)암에 걸려 수술을 했으며, 칠순 잔치를 한 후부터는 노인성 치매와 싸우고 있습니다.

아쉽고 아쉬웠던 면회  

큰 누님은 노인성 치매로 지난 3월부터 정신과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고 있는데요. 시간이 지날수록 병세가 호전되기는커녕 악화되고 있어 자녀와 주변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 처음 병원에 입원하던 날 전문의와 인터뷰하는 큰누님. 당시만 해도 간단한 숫자 계산과 감정을 대화로 표출할 수 있었는데···. ⓒ 조종안


지난 9월에 옮긴 병원을 어렵게 찾아 병실에 들어서니까 노인 환자 두 분과 함께 있기에 인사를 하니까, 처음 보는 사람처럼 멀거니 쳐다만 보더라고요. 초점을 잃은 눈빛과 표정에서 병세가 더욱 악화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간호사가 "할머니, 오늘은 동생이 면회를 오는 날이에요"라고 하면 외출복으로 갈아입으면서도 장을 보러 간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언제 오느냐고 보채던 누님이 이렇게 변하다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큰아들(큰 조카)하고 전화하고 싶으냐고 물으니까 빨리 연결해 달라고 성화를 하던 누님이었는데 고목처럼 우두커니가 되어 버리다니, 손이라도 잡고 펑펑 울고 싶었지만, 참고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누님 곁에 앉아 "동생이 왔는데도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네"라고 하니까 말이 없기에 거듭 물었더니 "누군지 모르니까 그렇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걸 포기하고 돌아오고 싶었으나, 인내심을 갖고 말을 청했고 이름을 아느냐고 몇 번을 물어도 오래 돼서 모른다는 대답뿐이었습니다.

"그럼 누님은 세상에 혼자네, 아들도 없고, 딸도 없고, 부모도 없고, 여동생도 없고, 남동생도 없고 누님은 혼자고만···. 그럼 나는 뭐야? 나도 동생이 아니고 모르는 사람이 여기에 앉아 있구먼···."

기억력이 1~2분을 넘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달이 난 사람처럼 이것저것 물었더니 그때야 "동생이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해서 "그럼 이름은 뭐야?"라고 했더니 "종아니지"라고 하더군요. 모든 걸 포기했는데 이름이라도 들으니까 답답했던 속이 조금은 풀렸습니다. 

잠시 상념에 빠져 있는데 간병인이 들어와 저를 가리키며 "이분이 누구세요?"라고 하니까, 그때는 또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예상대로였고, 만났다는 것만으로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간병인이 "그럼 오빠예요?"라고 하니까 "아닐걸" 하더군요. "그럼 동생이에요?"라며 재차 물으니까 "그럴거여"라고 하기에 제가 "이름은?"하고 물었더니 "종아니"라고 했지만, 무의식에서 나오는 대답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며칠 전 형제들이 모여 아버지 제사를 지냈다고 해도 예전처럼 "좋겠다"는 대답뿐이었습니다. 좋겠다는 말만 할 게 아니라 함께 참석했어야 하는 자리였다고 해도 딴소리만 하는 누님을 보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도 병 앞에서는 일개 미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했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저녁밥이 들어왔고, "나는 밥을 먹고 왔으니까 천천히 드세요"라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하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지 "밥이랑 같이 먹어야 허는디···."라는 말만 되풀이하더군요.   

기억력과 판단력은 물론 시간 개념도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따뜻한 손목이나 잡아보고 와야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나섰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작은 누님들과 함께했던 지난 8월16일 아침을 맛있게 먹고 "이렇게 모이니까 참말로 좋다!"면서 노사연의 '만남'을 끝까지 부르며 행복해 하던 모습이 떠올라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0개월도 안 되는 사이에 자아를 완전히 상실해 버린 큰 누님을 보며 '치매'가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도 새삼 느꼈습니다. 그러나 누님의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년에는 제가 사는 집에서 가까운 병원으로 옮길 것이고, 그때는 자주 찾아뵙기로 아내와 약속했거든요.

병원 문을 나서는데 부산의 밤바람이 유난히 차가웠습니다. 옷깃을 여미며 계단을 내려오는데 메아리 없는 산에서 고함만 지르다 내려온 느낌이었고, '치매 환자에게는 가족의 꾸준한 관심과 사랑이 가장 필요하다'는 문구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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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치매를 치료하는 약물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지만, 환자와 가족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단체는 있는데요. 사회봉사기관인 '한국치매가족협회'(02-431-9993)로 연락하면 환자관리와 요양보험 등에 대해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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