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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번 기가 막히게 잘 지었죠"

그랑팰리스웨딩홀 신상수 대표의 휴먼스토리

등록|2008.12.21 10:32 수정|2008.12.21 10:32
“장사 상 (商) 빼어날 수(秀), 우리 아버님이 이름 한번 기가 막히게 잘 지었죠.”

뚝심 하나로 우뚝 선 평촌 그랑팰리스 웨딩홀 신상수(41) 대표의 말이다. 맨주먹으로 ‘결혼 만들기 엘가와 그랑팰리스 웨딩홀 평촌점, 구리 남양주점’의 대표로 급부상하며 이웃사랑을 펼치기까지의 역동적인 삶은 드라마보다도 더 리얼한 휴먼스토리다.

시련은 있어도 포기는 없다

그랑팰리스 웨딩홀신상수 대표 ⓒ 김재경


그는, 전남 곡성에서 농사지으며 상점을 하는 가정의 7남매 중 막내로 출생했다. 농촌의 상점은 철물부터 식료품까지 모든 생필품을 취급하는 만물상과 흡사했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쉬는 날은 가게 일을 돕고, 용돈을 받을 만큼 그는 매사에 적극적이고 부지런했다.

한양대학교 재학 중 가정의 대들보였던 부친을 잃었다. 고향에 남겨진 홀어머니와 딱히 내세울 것 없는 형제들, 어디에도 등 기댈 언덕은 없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대학 졸업 후, 27세에 군에서 제대했지만 그는 사회생활이 두렵지 않았다.

대학시절 일식집이나 선술집에서 일하며 터득한 기술을 발판삼아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장안동에서 손수레를 끌며, 어묵을 끓이고 닭 꼬치에 해삼 멍게 등 안주거리를 준비했다.  허술한 포장마차였지만 억척스레 일한 만큼 하루 30여만 원의 수입이 생기며 3개월 만에 1천만이 모아졌다.

다시 1천만 원으로 실내포장마차를 하기까지 그는 하루도 쉬지 않았다.  돈 버는 재미가 쏠쏠할 무렵, 옆집 가게에 불이 꺼지는 걸 보면서도 그냥 영업한 결과 심야 영업에 걸리고 말았다.

그 이후 손님끼리 패싸움이 일어났는데, 상대가 재수생이어서 영업정지를 당하게 되었다. 워낙 덩치가 큰 녀석들이었기에 일반인과 구별할 수는 없었다. 덜컥 무너져 내리는 가슴을 쓸어않고 찾아간 청량리 경찰서에서 아무리 울면서 사정해도 허사였다. 포기하고 문을 닫는 수밖엔 길이 없었다.

요리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압구정동 일식집에 취업, 쌀 씻는 일부터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다시피 했다. 어깨 너머로 단 시간에 요리를 터득할 만큼 그는 눈썰미가 있었다. 몇 년은 족히 걸리는 코스를 뛰어넘어, 6개월 만에 손님 앞에 설 수가 있었다.

다시 태어난 삶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대학선배는 “기술도 좋지만 우리는 머리가 있고, 너는 재능도 있다”며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선배를 따라 나섰다. 매일 빌딩을 타고 종점까지 누비고 다니던 3개월 만에, 보험에 대한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다.

단체사업부에서 유통업계에 종사하는 동문회원들의 명단을 들고 우편물을 발송하며, 연예인처럼 10분이란 짧은 브리핑을  했던 것이 고객들과 잘 매치 되며 노력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능력을 인정받으며 대졸 영업 맨 23명을 거느린, 전국에서 제일 튼실한 조직의 팀장으로 중소기업, 서비스업, 유통업, 골프장 등등에서 단체보험을 판매했다. 삼풍백화점이 붕괴되던 1995년 5월 29일에도 그는 역사적 그 현장에 있었다. 월말 영업마감 시간에 쫒기며 4시쯤 나왔고, 5시쯤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었다.

죽음의 터널을 빠져 나온 그는, 말로만 했던 보험의 필요성과 맞물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한 달 내내 시신 수습 작업을 지켜보는 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참사 고객 10여명의 보험금을 처리함과 동시에 새로운 삶으로 전환하기 위해 보험회사를 퇴직을 했다. 

부인과 함께 시작한 웨딩사업

대학시절 운동권 출신이었던 그는, 탈춤, 민요, 판소리와 마당극 등 민속 문화 활동을 하며 후배 이은실씨와 만났다. 1994년 결혼을 앞두고 은행에서 2천만 원을 대출받았다. 내심  전세금과 결혼비용을 생각했지만, 혼수 비용을 절약한 신부가 전세금 1천만을 보태며 큰 힘이 되었다.

부인은 어렵고 고단했던 삶을, 고맙게도 믿음과 신뢰로 모든 걸 보듬고 포용해 주었다. 그저 앞만 보고 질주했던 3년 동안 부인은 피아노 강습으로 생계를 꾸리며, 그의 수입 전부를 고스란히 저축한 지 3년 만에 1억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는 대학시절 활동했던 민속 문화와 웨딩을 접목시켜 보자는 생각으로, 보증금 2천만 원에 20만 원짜리 6층 건물에서 웨딩사업을 시작했다. 1~2층 웨딩업체처럼 그저 오는 손님만을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었다. 보험영업과 접목, 손님을 찾아 나서며 고객의 시선도 끌고 봉사의 의미를 담을 수 있는 무료 합동결혼식 지원에도 앞장섰다.

길거리 사진전과 전통혼례며 웨딩드레스 쇼까지 다양한 이벤트 홍보를 해 나갔다. IMF 무렵, 고가의 웨딩드레스부터 최고의 상품을 저가로 임대하기 시작하자, 입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소개로 이어졌다.

2000년 웨딩전문 ‘엘가스튜디오’를 건축하며 연간 1천 쌍을 결혼 시켰다. ‘결혼 만들기 엘가’에 이어서 2003년 의왕에 샤롯데 웨딩페어를 시작했고, 2006년 평촌에 그랑팰리스 웨딩홀을 오픈했다. 동일 지역 상권이라서 의왕 샤롯데를 정리하고 구리 역세권에 금년, 그랑팰리스 2호점인 구리·남양주점을 오픈했다.

웨딩홀뿐만 아니라 웨딩 엘가와 SE웨딩에 한복컬렉션, 웨딩드레스, 스튜디오, 웨딩사진 촬영, 메이크업, 웨딩컨설팅까지 웨딩의 모든 것을 직접 해결해 나갔다. 부인과 함께 시작한 웨딩사업은 고객만족이 곧 자신의 만족으로 이어지며, 대학시절 즐겼던 민속 문화공연과도 흡사했다.

수익 환원하고 싶어

대형 리무진길이가 족히 10m쯤 되어 보인다. ⓒ 김재경


지역사회에서 얻은 수익을 다시 사회에 환원하며, 그는 빛과 소금으로 남고 싶었다. 사업초기부터 합동결혼식 지원, 독거노인큰잔치 등 지역사회에서 이웃들과 함께하려는 노력으로 ‘(사)나눔과 기쁨’ 의왕시 공동대표, ‘사랑의 집수리 운동본부’ 후원회장 등의 일을 해오고 있다.

시골에서 꿈을 키웠던 자신을 돌아보며 꿈나무들의 교육환경에 관심을 갖고, 의왕사랑 장학회 이사, 민백초등학교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구리시 바둑협회장 등 크고 작은 활동을 하지만, 그의 인생에는 아직도 쓰여 지지 않은 페이지가 많다.

안양시 경안로타리클럽 주최 9쌍의 합동결혼식에 웨딩일체를 지원했고, 사랑의 집수리 운동에는 후원과 함께 직원들과 어려운 가정의 도배와 장판 싱크대까지 교체해주고 집안 구석구석을 정리하기도 했다.

그와 함께 봉사해온 직원들은 “자신이 제일 힘들 준 알고 살았는데, 더 어려운 이웃도 있어서 봉사하며 많은 것을 배운다”고 말한다. 사랑의 집수리 운동본부 후원회장 2년 동안 경제적 후원과 음식대접을 도맡아왔다. 혼자 묵묵히 해오던 봉사를, 이제는 자신이 속해있는 평촌라이온스와 함께 하니 더욱 든든하다.

그는 자칭 안양의 앙드레 신이라며, 웨딩드레스 쇼 1천만 원 수익금을 관악장애인종합복지관에 흔쾌히 기부하는 등 봉사와 나눔의 저변 확대에 물심양면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는다. 다음 달 구리시 사회복지과에서 선정한 3쌍의 황혼 결혼식에도 웨딩지원을 약속한 상태다.

그는 그늘진 곳에 후원하고 싶어도 자칫 생색내기가 될까봐 조심스럽지만, 개인이나 단체에서 어려운 곳을 선정해주면 최선을 다 하고 싶다. 시민단체에서 독거노인 접대를 의뢰해오면 흔쾌히 받는데, 의뢰한 측에서 미안해 할 때는 오히려 겸연쩍기만 하다.

임대 25평에서 시작한 웨딩사업이 이제는 2지역의 사업장에 연면적 5천 평으로 급성장했다. 평소 50여명의 직원들이 있지만, 주말이면 일용직까지 200여명의 사람들이 함께 꿈을 키워나가는 튼실한 회사로 성장했다.


그는 미국에서 직수입한, 흔히 볼 수 없는 대형 리무진으로 공항까지 차별화된 웨딩이벤트를 실시하고 있다. 길이가 족히 10m쯤 돼 보이는 리무진 안에는 와인은 물론, 노래방 기계까지 갖춰진 긴 좌석이 있고 수시로 조명이 바뀌는 천정은 환상적 별천지처럼 보인다.

성공의 비결을 묻자, "사람은 누구든지 타고 난 소질이 있기에, 그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성공의 열쇠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는 "자신의 장사 수환은 어린 시절, 부친의 가게 일을 도우며 터득한 것 같다"며 "장사 상(商) 빼어날 수(秀), 우리 아버님이 이름 한번 기가 막히게 잘 지었죠"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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