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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일성 비교, 이 정도만 알려줘도...

[서평] 남과 북을 만든 라이벌

등록|2008.12.22 11:54 수정|2008.12.22 11:54
직장 내 독서모임

나날이 책과 멀어지고 무식해지는 내 모습이 한심해 동료 몇을 꾀어 직장 내에 조그만 독서 모임 하나를 만들었다. 각자 평소 보고 싶었던 책을 한 권 씩 선정해 한 달 동안 각자 읽고 가볍게 수다나 떠는 모임이다. 뭔가 압박이 있어야 책을 읽게 되지 않을까 싶어 시작했는데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이 모임 덕에 <88만원 세대>, <육식의 종말>,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우리는 사랑일까>, <내 이름은 빨강>과 같은 멋진 책들을 만났다.

우리 모임이 아홉 번째로 읽은 책이 <남과 북을 만든 라이벌>(역사비평사,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엮음, 2008)이었다. 역사가 전공인 나는 대충 훑어보고 건방지게도(?) 이 책을 가벼운 대중용 역사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대로 읽어보니 이 책은 부제목처럼 <인물로 보는 남북현대사>였다. 책은 정(政), 언(言), 문(文), 법(法), 과(科), 사(史), 영(映), 무(舞)의 여덟 장에 그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 남북한의 라이벌을 비교하며 소개했다.

▲ 남과 북을 만든 라이벌 ⓒ 역사비평사

책의 첫 장에 등장한 남북 정치의 두 라이벌은 박정희와 김일성이었다. 책은 만주에서의 경험이 두 사람에게 미친 영향, 6.25 전쟁과 두 사람의 정권 장악 과정, 그 이후 남북한의 변화를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책을 읽고 나서 동료들에게 소감을 물어보니 대부분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라 많이 어려웠다고 말했다. 중고교 시절 현대사는 아예 빼버렸던 국사(하)로 한국의 역사를 배웠고, 대학 시절에는 각자의 전공(영어, 국어, 윤리 등)에 매진하느라고 역사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도 공통적으로 말한 느낌은 "이 책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강력한 반공교육을 받은 세대가 대학에 들어가면 오히려 강력한 반공사상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논리적 설명 없이 과장과 왜곡까지 곁들여 무조건 공산주의와 김일성이 나쁘다는 주장만 하기 때문이다.

박정희와 김일성의 공과 과

이 책은 먼저 만주에 일본군으로 건너간 박정희와 동북항일연군으로 간 김일성의 행적, 박정희의 좌익 경력, 통일 국가보다는 북한 지역만이라도 자신의 독자권력 수립에 노력한 김일성의 야심, 6.25로 인한 박정희의 복권과 출세를 서술했다. 이 부분만 보면 김일성 찬양이 아니냐고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도 박정희 시절 눈부시게 발전한 남한의 경제 성장을 이야기한다. 김일성이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해 유일체제를 구축한 이야기도 나온다. 김일성이 체 게바라가 아닌 카스트로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남한보다 앞서 있던 시기의 경제 발전에 소련의 원조가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도 구체적인 통계 자료와 함께 나온다. 이 부분을 보면 북한을 감정만 가지고 비판했던 책들에서 읽은 내용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은 박정희와 김일성 두 사람의 공과 과를 일방적인 매도나 찬양 없이 사료와 통계에 의거해 사실대로만 서술한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 부분에 박정희와 김일성이 똑같이 독재를 했는데 왜 남한의 경제가 더 발전하고, 북한은 몰락해갔는가에 대한 원인을 진단한다. 그것은 남한에 독재 속에서도 민주주의적 저항이 있었고, 박정희는 민주 세력과 경쟁하면서 성장해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경제 시스템으로 공산주의를 채택한 국가들도 정치 체제로는 민주주의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북한도 정권 수립 당시에는 민주적 정치 시스템을 추구했던 것 같다. 8월 종파 사건이라는, 근현대사 교과서에도 나오는, 김일성 개인숭배 비판 사건이 일어났던 것을 보면 그렇다. 하지만, 김일성은 이러한 저항 세력을 모조리 숙청해 버렸다. 반대 세력이 사라졌기에 북한은 김일성의 오판을 하더라도 제동을 걸 수 없었고, 결국은 이렇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꽤 오래 전 신문에서 읽은 기사 한 토막이 생각이 났다. 소설가 복거일씨가 쓴 적(敵)에 관한 글이었다. 적을 잘 선정하고 대결 구도를 만들어야 나도 함께 성장한다는 내용이었는데, 그 글은 노태우 대통령이 가장 적을 잘 고른 인물로서 김대중씨(당시는 1990년대 초기였고, 아직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 전이었다.)를 적으로 설정하고 상대했기에 본인도 성장했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민주화 세력이라는 적이 있었기에 남한의 민주주의도 발전하고, 잘못된 판단도 어느 정도는 피해가며 서로가 성장해 갈 수 있었지만, 북한은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과장과 왜곡 없이 사실을 보여주고 그에 대해 사실에 근거한 해석을 하면 북한 체제가 왜 문제가 있으며, 김일성은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충분히 이해하고 수긍할 수 있다. 그런데, 과거에 우리는 왜 그토록 과장과 왜곡만 했던 것일까.

우리가 배우지 못한 현대의 대가들

나에게는 제 1장이 가장 감동적이었기 때문에 1장의 이야기만 길게 소개했지만, 그 뒤에 나오는 여러 분야 인물들의 이야기도 신선했다. 언어학자 최현배와 김두봉이 모두 주시경의 제자였고, 한글 전용론자였기에 남북한 언어의 이질화가 비교적 적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여기서 처음 들었다.

염상섭이 일제 시대에는 민족 문제를 고민했고, 해방 후에는 분단을 반대했던 존경할 만한 우파 문학가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난 염상섭 마저도 친일 작가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국어 교과서에서 배운 작가 중 친일 행적을 한 작가가 워낙 많았기에 염상섭 마저도 그랬을 거라고 도매금으로 넘겼던 것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 염상섭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던 나 자신에 대해 크게 반성하게 되었다.

이 책은 그 외에 <김강사와 T교수>의 작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남한의 헌법을 만든 유진오, 비날론이라는 합성 섬유를 만든 리승기라는 북한 과학자, 최근에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무용가 최승희 등 여러 분야의 인물들에 대해서도 그의 휴전선 건너편 라이벌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평소 우리나라 현대사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 아니라면 이 책이 소개하고 있는 많은 인물의 대부분이 생소할지도 모른다. 그들이 현재 남과 북 해당 분야의 기초를 놓았거나 그 분야의 대가였는데도 말이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그만큼 현대사를 소홀히 해왔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한 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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