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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해야 세상이 바뀐다

김이태 연구원의 징계사태를 보며

등록|2008.12.24 19:40 수정|2008.12.24 19:40
학교에 갔던 아이가 울면서 돌아왔다. 까닭을 물었더니 같은 반 친구의 아버지가 때렸다는 것이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우리 아이를 때린 사람은 평소에 학교에서 자꾸만 맞고 오는 자기 아들 때문에 어지간히 속이 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하교 길을 지키고 있다가 자기 아이를 때렸다는 아이를 경찰서로 끌고 가겠다며 마구 두들겨 팬 것이다.

학교 앞이라 지나가는 어른들도 많았는데 아무도 말리지 않으니 보다 못한 우리 아이가 "아저씨가 참으세요" 한 마디 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자기까지 때리더라는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인 아이는 "엄마! 친구가 불쌍해서 그랬는데 잘못했어요?" 하고는 아픈 데를 만지면서 서럽게 울었다. 철부지 나이에 친구를 위해서 무서워하지 않고 나선 것은 가상하지만 불의한 것을 보고 나섰다가 오히려 피해를 보는 사람이 많은 험한 세상이라 한편으론 걱정스럽기도 했다.

언젠가 시내버스 안에서 소매치기하는 것을 보고 붙잡았다가 휘두르는 칼에 크게 부상을 당한 젊은이가 있었다. 병원에 있는 그를 찾아갔더니 "모른 체 했어야 하는 건데 실수였다"며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기도 다른 사람들처럼 보고도 못 본 체 했다면 아무 일 없었을 것 아니냐며 허탈해 했다. 현대는 증오보다도 더 무서운 무관심의 시대인 듯 싶다.

십수 년 전에는 딸 가진 부모들이 온통 공포의 도가니에서 떨어야 했다. 시민을 보호해주어야 할 경찰서에서 성고문을 당했어도 여학생들이 곳곳에서 성폭행을 당했어도 대부분의 시민들은 자기 일이 아니라고 강 건너 불 보듯 무관심했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화장실에서까지 성폭행이 자행되자 그때서야 딸 가진 부모들이 초긴장 상태가 되었다. 어제까지 남의 문제로 여겼던 문제가 오늘은 자기 문제로 코앞에 들이닥친 것이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사회는 고기가 살아가는 물과 같다. 물이 오염되면 고기가 살 수 없듯이 이 사회가 건강해야 우리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가정에서 제아무리 아이를 올바르게 키운다 하더라도 그 아이가 나가 숨 쉬고 생활해야 할 곳은 바로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문제는 남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의 자녀, 나의 가정문제인 것이다.

지금 우리 시대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다. 대신 행여 다칠세라 눈치나 보는 비겁한 사람들과 출세를 위해 아첨하는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다. 그래도 가끔씩 국민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주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용감한 시민상이나 훈장이 아니라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다. 다시는 예전의 생활로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고달픈 삶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불의를 보더라도 모른 체 하면 그만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돈키호테처럼 이런 사람들이 나타나 우리 시대의 양심이 썩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래 전 오원춘씨가 ‘양심선언’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그는 고난의 길을 걸었다. 당시 오원춘씨는 기관원에게 납치, 감금으로 15일간 행방불명되면서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양심선언이란 사전적 의미는 감추어진 비리나 부정을 양심에 따라 사회적으로 드러내어 알리는 일이다. 대개 권력 기관이 저지른 비리나 부정을 사회적으로 폭로하는 선언이다. 그러나 당시에 이 양심선언이란 말은 지금 내가 한 말이 진실이며 이후 어떤 사정에 의해 번복이 될 경우 그건 진실이 아님을 밝히는 비장한 것이었다.

“1978년 경북 영양군 청기면 농민들은 농협에서 알선한 ‘시마바라’라는 씨감자를 심었다가 싹이 나지 않는 바람에 감자 농사를 망치고 말았다. 가톨릭 농민회 청기분회는 함평고구마사건 해결의 소식도 알고 있던 터라 즉각 피해 농민들과 대책을 논의한 후 당국에 피해보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회원들의 끈질긴 활동과 안동교구의 지원으로 보상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었다.

그러나 보상 문제에 앞장섰던 이후 이 사건은 가톨릭과 정권 간의 정면충돌로 비화하여 이에 맞서 가톨릭에서는 8월 6일 안동 목성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하여 120명의 사제와 600여 명의 농민회원들이 기도회를 개최하고 유신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 촛불시위를 벌였다. 8월 20일에는 명동성당에서 1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정의평화위원회 주최의 기도회가 개최되었고, 인천, 수원, 광주, 전주 등으로 확산되었다. 이 사건은 10월 26일 사태의 결정적 원인의 하나로 작용하였다.“(농민운동사)

12년 동안의 법정 다툼 끝에 최근 대법원 확정판결로 명예훼손 혐의에서 벗어난 감사원 '내부고발자' 현준희(55)씨가 있다. 그는 1996년 총선 직전 기자회견을 통해 "효산종합개발 콘도사업 특혜 의혹에 대한 감사 과정에서 감사원 국장이 뚜렷한 이유 없이 감사를 중단시켰다. 배후에 청와대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양심선언'을 한 뒤 감사원에 의해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되었다. 현준희씨는 이후 대법원의 항소심 파기환송 등 수 차례의 재판을 거쳐 대법원으로부터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다.

또 한 사람이 있다. 그는 1990년 감사원 감사비리를 고발했다 파면 당했던 이문옥 전 감사관이다. 그 사건은 그의 인생을 바꿔 버렸다. 그는 며칠을 고민하다가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아들에게만 모든 것을 이야기한 뒤 집을 떠나서 죽을 각오를 하고는 감사하다가 중단해버린 사건을 세상에 알렸다. 무엇이 그를 아내에게도 차마 이야기하지 못하고 그 어리디 어린 아들에게 이야기하고 떠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것일까.

“당시는 ‘회사는 망해도 사장은 망하지 않는다’ ‘땅만 있어도 망하진 않는다’는 말이 유행하던 때였죠. 정부에선 한 달이 멀다 하고 부동산 투기 억제대책을 내놓았지만 효과가 없었구요. 재벌 계열 기업체 23개를 선정해 조사했더니 비업무용 부동산 보유비율이 43%나 됐습니다. 재벌이 부동산투기 주범이나 마찬가지였죠."

그 해 금융감독원에서 비업무용부동산 비율이 1.2%라고 보고했는데 이씨가 조사한 결과는 43%였다. 이씨는 감사결과를 한겨레신문에 제보했고 한겨레신문은 1990년 5월 이 사실을 보도했다. “재벌이 로비해서 감사원 감사를 중단시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사태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족과 동료만 생각했으면 못했겠죠. 죽을 각오하고 한 일이었습니다.”

감사원은 잘못을 시인하는 각서와 사표를 종용했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이씨가 허위사실을 언론에 유포해 정부의 공신력을 떨어뜨렸다는 이유로 공무상 비밀누설죄로 구속했다. 파면 처분을 당한 이씨는 이후 6년 동안 법정투쟁을 벌인 끝에 1996년 4월 대법원에서 무죄확정판결을 받았고, 그해 10월에는 파면처분청구소송에서도 승소해 복직할 수 있었다. 그는 감사교육원 교수로 근무하다 1999년 정년퇴직했다.(시민의 신문 제636호)

김이태 연구원이 “4대강 정비 사업은 한반도 대운하"라고 양심선언하자, 연구원측은 김연구원을 징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었다. 그러나 그 뒤 무려 7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한국건설기술연구원(건기연) 김이태 연구원의 징계과정을 지켜보면서 예전의 불행한 나라를 다시 보고 있다. 이런 사태가 계속될수록 우리 곁에서 용기 있는 사람들은 사라질 것이다. 누가 사랑하는 가족과 동료들에게 고통과 피해를 주면서까지 나설 수 있겠는가.

용기 있는 사람들은 그 뒤에도 자주 나타났다. 충남 연기군수로 재직하며 관권선거를 고발한 한준수씨, 총선 군부재자투표의 부정을 고발한 이지문 전 중위 등.  그런 용기 있는 사람들 소식을 접할 때마다 '시대의 양심이 살아있구나' 하는 반가움보다는 그들에게 닥칠 앞날이 더 걱정스러웠다. 김이태 연구원의 징계사태를 보며 자기의 일 이외에는 무관심한 이 시대에, 더불어 살아가는 정의롭고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공적인 분노를 표출하고 이를 조직화하는 일은 건강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를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줘야 하는 어른들의 소명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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