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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장 점거하더라도 쓰레기 분리수거는 확실히"

국회 환경미화원들의 세밑 바람... "외통위 '전쟁터' 치우느라 진땀, 새해엔 싸우지 말길"

등록|2008.12.25 18:14 수정|2008.12.25 18:14

▲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국회의사당 건물. ⓒ 남소연


"예전에는 청소일을 해도 국회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 가서 말도 못해요."
"첫 월급이 2만원 좀 넘었죠. 세금 떼면 월급이 1만9000원 정도 됐어요."

30년 넘게 국회 환경미화원으로 일하고 있는 이영미(가명)씨는 쓴 웃음을 지었다. 이씨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역사와 함께 한 산증인이다.

그는 지난 1975년 국회의사당이 태평로에서 지금의 여의도로 이전할 때 환경미화원으로 들어왔다. 국회에 들어온 해수를 기준으로 하면 7~8선 의원급 미화원인 셈이다.

지금은 외주 용역업체를 통해서 일하고 있지만 당시엔 신분도 공무원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만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들어서면서 지금의 고용 형태가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처음엔 미화원도 '국회 공무원' 신분, 지금은 외주 용역"

지금은 입사 때 나왔던 공무원 신분증도, 국회 직원임을 알리는 배지도 없지만, 그는 평생을 '나도 국회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자부심은 점점 창피함으로 바뀌고 있다.

"갈수록 사람들한테 국회에서 환경미화원 한다는 소리를 못하겠어요. 요즘엔 국회의 '국'자만 말해도 '거기는 만날 싸우기나 하고 남의 돈 먹는 도둑놈들만 있다'는 얘기를 듣기 일쑤예요."

최근엔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충돌 사태 때문에 더욱 그렇다. 지난 17일 밤부터 18일 오후 2시까지 한나라당의 점거로 회의장 주변은 난장판이 됐다. 민주당·민주노동당의 의원·보좌진·당직자들은 회의장 문을 뜯어내기 위해 해머, 정 등을 동원했다.

결국 회의장 문짝은 완전히 떼어졌다. 한나라당이 야당의 진입을 막기 위해 문 안쪽에 쌓아놓은 의자, 책상도 결국 박살났다.

이날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2시까지 약 5시간 30분간의 '전투'가 끝난 뒤. '전장'에 들어선 건 미화원들이었다. 전투는 의원들이 했지만, 뒷정리는 이들의 몫이었다.

새벽 5시 30분이면 국회로 출근해 오후 5시까지 일하는 미화원들의 수고가 그날은 곱절이 됐다. 회의장 안과 복도를 치우기 위해 남녀 미화원 50여명이 동원돼 2시간 넘게 청소에 매달렸다.

'전투'는 의원들이, '뒷정리'는 미화원들이... "쓰레기만 수십 봉지"

▲ 한미 FTA 비준동의안 상정을 앞둔 18일 한나라당이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회의장을 점거하자, 민주당·민주노동당 의원들과 보좌진, 당직자들이 연장을 이용해 회의장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 유성호


"이건 뭐 전쟁터가 따로 없더라고요. 너무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지요."

99년부터 국회에서 미화원 일을 하고 있다는 김은옥(가명)씨는 회의장에 들어섰을 때 펼쳐졌던 풍경을 떠올리며 손사래를 쳤다.

회의장 안팎엔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바닥은 물과 소화기 분말이 뒤섞여 흥건했다. 복도와 회의장 안엔 여기저기 수십개의 물병, 음료캔, 간식 찌꺼기가 나뒹굴었다. 의자, 책상은 다리가 부러지거나 흠집으로 온전치 못했다. 거기다 산산조각 난 명패, 깨진 유리조각으로 발 디딜 틈을 찾기 어려웠다.

김씨는 "쓰레기가 엄청 나왔다"며 "폐기물은 사람 키 만한 마대자루로 10개쯤, 쓰레기는 20리터 봉투로 25개쯤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치우는 거야 우리 일이니까 아무 불만 없었지만, 말로 해도 될 것 같은데 이렇게들 싸우셨을까 하는 생각에 청소를 하면서도 내내 안타까웠다"고 털어놨다.

이영미씨도 "30년 넘게 국회에서 일하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며 "75년 (박정희 전 대통령 비판 발언으로 빚어진) 김옥선 전 의원 제명 사태 때도 시끄럽긴 했지만 집기를 부수는 일은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들은 한나라당이 못박은 '크리스마스 시한'을 넘기면 또 외통위 사태 같은 일이 벌어질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미화원 황금희(가명)씨는 "싸우고 부수는 일이 또 생기면 어쩌나 겁난다"며 "제발 대화로 풀어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이어 그는 "그래도 다수당인 한나라당이 되든 안되든 처음부터 문을 열어놓고 의논을 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며 "어느 당이든 독단적으로 하지 말고 좋은 방도를 찾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의원들이 손 잡아주며 '고맙다' 인사할 때 보람"

▲ 국회 청소용역 업체 환경미화원이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에서 낙엽을 쓸고 있다(자료사진·사진에 찍힌 미화원은 기사의 내용과 관련 없습니다). ⓒ 유성호


미화원들이 보람을 느낄 때는 의원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들을 때다. 이영미씨는 "그래도 국회에서 일하면서 의원들에게 서운한 건 없었다"며 "명절 때면 선물을 챙겨주는 자상한 의원들도 많다"고 말했다.

항상 따뜻한 인사로 미화원들 사이에서 칭찬이 자자했지만 지난 총선에서 떨어져 와신상담 중인 전직 의원도 있다.

28년간 국회에서 일했다는 박정숙(가명)씨는 "악수를 청하기에 장갑을 벗으려고 하면 '됐다. 이 손이 얼마나 고마운 손인데'하면서 두 손으로 꽉 잡아주면서 인사해주던 모습이 생생하다"며 "선거 때도 그 지역구에 사는 지인들한테 '참 좋은 분이니 꼭 찍으라'고 당부까지 했는데 떨어져서 아쉽다"고 말했다.

이들이 새해 국회에 바라는 소망은 소박하다. 박정숙씨는 "(여야가) 서로 잘 합의해서 제발 싸우지 말라"며 "새해에는 지혜를 모아 경제를 살려달라"는 바람을 밝혔다. 박씨는 "요즘에는 40대도 미화원 일을 하겠다고 오는데 그런 것을 보면 정말 나라 사정이 어렵게 됐다는 것을 느낀다"며 안타까워했다.

"힘 없는 사람 위한 정책 펴달라... 농성중에도 쓰레기는 꼭 분리수거를"

장애인 자녀를 둔 김은옥씨는 "장애인들도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고 일 할 수 있는 사회환경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김씨는 "장애인들도 (비장애인) 못지않게 열심히 일할 수 있는데 그런 일터가 너무 적다"며 "내 아들이 얼마 전 겨우 작은 공장에 들어갔는데 요즘엔 사정이 어려워져 월급도 못받고 있다"고 한숨을 지었다.

그는 "힘 있는 사람들 보다 힘 없는 사람들에게 국가의 도움이나 배려가 더 절실한 것 아니냐"며 "그런 정책을 펴달라"고 몇 번이고 강조했다.

베테랑 미화원 이영미씨는 "회의장 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가 있더라도 안에서 제발 쓰레기 분리수거는 확실히 해달라"고 '전문가' 다운 일침을 놨다. 이씨는 "요즘도 여기저기 점거하고 있는 상임위 회의장에 청소하러 들어가보면 '많이 배운 분들이 어떻게 이럴까' 싶을 정도로 엉망"이라며 "쓰레기는 꼭 종류별로 분리해서 버려달라"고 강조했다.

지난 23일 국회 조찬기도회(회장 황우여 의원) 소속 의원들은 연말을 맞아 국회 환경미화원들(159명)에게 감사의 의미로 배 160 상자를 전달했다. 부회장인 조배숙 의원은 "국회에서 말없이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 가장 수고해주시는 분들이 바로 미화원들"이라며 "평소 갖고 있던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마련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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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취재원들의 요청으로 실명과 나이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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