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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위기인가? 개독교의 위기인가?

[주장] 예수 메시지의 핵심은 '내면 혁명을 통한 이웃사랑'

등록|2008.12.25 11:37 수정|2008.12.25 11:37

▲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한장면. 교회에서 단체 관람을 많이 했던 이 영화에서도 예수의 메시지 보다 고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 아이콘 프로덕션

우울한 생일잔치

올해도 어김없이 성탄절이 찾아왔다. 유례없는 경제위기 때문일까. 이렇게 조용한 성탄전야는 처음인 듯하다. 거리는 물론 방송에서도 성탄분위기를 좀처럼 느낄 수 없다. 다니는 직장에서도 매년 설치하던 크리스마스트리를 올해는 만들지 않았다. 뚝 떨어진 매출 앞에선 직원들과 함께 '빤짝이' 장식을 달면서 수다를 떨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게다.

그래도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 아니던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유난히 헛발질 하는 개신교를 보면 씁쓸하기도 하지만 요즘 같은 때에 더욱 예수의 메시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분명히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다.

그는 정말로 허깨비인가?

최근 인터넷과 언론 보도를 보면서 드는 느낌은 기독교 '근본주의'의 위기이다. 온라인 게시판에서 '기독교'는 '개독교'가 되고 '목사'는 '먹사'가 되어 세상의 몹쓸 집단이 되었다. 시내 한복판에서 3개 국어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기독교인마저 '쪽팔리게' 만드는 전도 때문일까. 아니면 성조기 휘날리며 미국을 찬양하던 대형교회의 철없는 성도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일일이 나열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황당한 사건과 망언이 인터넷에서 거대한 '안티 기독교'를 만들었다. 특히 진보성향의, 소위 배운 사람들에게서도 종종 엿보이는 기독교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은 서글픈 마음마저 들게 한다.

또 다른 한편에선 기독교에 대한 뿌리 파헤치기가 활발하다. <다빈치코드>로 불거진 '음모론'은 예수와 마리아가 '진짜 같이 잤는가'라는 문제를 이슈화시키더니, 최근 <시대정신>이라는 다큐에선 예수가 '신화 짜깁기를 통해 창조된 가상인물'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또 픽션이긴 하지만 <맨프롬어스>라는 영화에선 1만4천살 먹은 원시인이 '사실은 자신이 예수였다'며 '일이 너무 커져 버렸다'고 탄식한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겐 참으로 불편한 이야기다. 보수교회의 비성경적인 행위를 비판하고 고쳐보려는 젊은 기독교인이라도 예수를 허깨비로 만들거나 모두 싸잡아 '개독'이라고 비난하는 사람 앞에서는 힘이 빠지게 마련이다.

실종된 메시지

모두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많은 사람이 예수에 대해 왈가왈부하면서도, 정작 그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만약 기독교를 무너뜨리고 싶다면 다른 얘기할 필요가 없다. 예수의 말에서 허구성과 비논리, 반인류적인 메시지를 폭로하면 그만이다. 예수 혐오주의자는 많이 보았지만, 정작 예수가 무슨 말을 했는지 따지는 사람을 본 적은 없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조차도 예수가 어떤 의미의 말을 했는지 잘 모른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도 모르면서 그들은 예수를 '주여 주여' 하며 추종한다. 그들이 말하는 복음의 내용은 분량의 차이만 있지 '예수천당 불신지옥'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무엇을 말했나?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예수가 말한 '천국'은 '예수천당 불신지옥'에 등장하는 '천당'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는 결코 죽어서 가는 천국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하나님 나라'를 설파했다. '하나님'이란 표현을 경외한 유대인들이 '천국'이라는 말로 바꿔 성경에 기록했다.

예수 메시지의 본질은 무엇인가?

여기서 예수의 비유와 언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지는 않겠다. 다만 필자의 스타일로 요약하자면, '하나님 나라'란 인간이 내면의 '혁명'(rebirth)을 통해 기존의 물질적 관념이 전복되고 새로운 관점으로 세계를 인지할 수 있게 되는 어떤 의식의 상태를 뜻한다.

이 세계에서 인간이 느끼고 경험하는 것은 신의 통치와 우주에 충만한 사랑이다. 이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이 온 인류와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므로 남을 사랑하는 것이 곧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한 행위가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예수의 명제도 이런 바탕에서 나온다.

기독교는 이처럼 예수가 전 인류와 연대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도 그 네트워크 안에 포함돼 세상의 아무리 작고 천한 사람과도 연대하겠다는 선언과 행위를 기반으로 한다. 이것이 예수가 말한 이웃의 의미이며 기독교의 핵심이 사랑이 되는 까닭이다.

예수는 스스로를 '인자'(사람의 아들)로 표현했다. 다른 말로 인간의 원형이라는 의미다. 신의 자녀인 인간이 마땅히 지녀야 할 가장 순수한 원래의 상태를 예수가 성취했다는 것이다. 이 수준을 달성한 예수는 물 위를 걷거나 물질을 창조해내는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물론 죽었다가도 부활한다. 게다가 그는 누구나 자신처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정리하면 예수의 메시지는 '인간의 원형을 회복하고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사랑)를 선택하라'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진실로 모든 인류가 귀담아 들어야 할 가치가 있다. 세상의 모든 문제나 갈등을 풀 수 있는 열쇠는 어떤 이념이나 시스템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사랑'이기 때문이다.

본질과 현상을 구분해 비판했으면

이제 결론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본질을 비판하는 것과 현실을 비판하는 것을 구분하자는 것이다. '개독교'가 싫다고 성경 전체가 쓰레기라고 하거나 훌륭한 기독교인까지 싸잡아 모욕 할 필요는 없다. 기독교의 현재 양상에 대해 노골적인 비판을 가하더라도 예수의 메시지에 귀 기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는 필요하다.

혹시 만약 당신이 기독교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전혀 다른 측면에서 '개독교'를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돌로 쳐죽이는 일을 하다가 어느 날 회심하여 사도가 되었다. 혹시 아는가 당신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지.

2009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새해에도 수많은 '개독교' 비판이 있겠지만 예수의 메시지에 동의하고 전인류적 연대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기독교는 언제나 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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