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덮인 산골짝에 해가 저문다. ⓒ 윤희경
산촌(山村)엔 눈이 한 번 쌓이면 녹을 줄 모른다. 눈은 오는 대로 쌓이고 쌓여 장설(丈雪)로 웅크리고 있다가 봄이나 돼야 해토를 하며 몸을 풀어 내린다. 돌각 담 너머로 눈 쌓인 산골짝과 들판을 바라보니 올해도 어느덧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다.
▲ 눈 속에 파묻힌 배추들, 미처 추수를 못한 지난 가을 내 분신들이다. ⓒ 윤희경
오늘따라 얼음 속을 뚫고 낮은 곳으로 자신을 깎아내리는 시냇물 소리가 시리게 와 닿는다. 저녁햇살아래 다소곳 누워있는 처마 밑으론 키가 삐죽 자라난 고드름이 대롱대롱 매달려 눈물雪水 툭툭 흘리고, 하얀 속살 아래로 어린 시절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둘 되살아난다.
‘수수께끼 하나낼까?’
‘어려운 거 쉬운 거.'
‘아주 쉬운 걸로.'
‘크면 클수록 키가 작아지는 건 뭐.’
‘….’
▲ 거꾸로 키가 크는 수정고드름 ⓒ 윤희경
봉당과 앞마당을 서성이다 눈 덮인 텃밭과 장독대와 김치광을 기웃거리며 뒤 곁을 한 바퀴 돌아 나온다. 장독들은 ‘제 맛 하나’를 위해 자신을 통째로 드러내놓고도 눈을 맞으며 묵묵히 서있다.
▲ '제맛 하나'를 위하여 알 몸으로 이 겨울을... ⓒ 윤희경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켜켜이 쌓인 눈발 위에 한 영혼이 서있다.
돌아보면 한 해를 지나온 발자국만 남아 가슴이 저려온다.
창고에 그득한 감자와 고구마, 구덩이 속 무 배추, 봉당에 장작 비늘, 뒤 곁 시래기들, 이만하면 한 해를 보내도 아쉬움이 없을 듯하고….
▲ 시래기가 눈을 맞고 있다. ⓒ 윤희경
처마 밑 대봉 곶감, 곰삭은 김치, 여름에 숨겨 논 매실주가 한참 익어가고 있다. 이런 날엔
친구 하나 찾아오면 참 좋겠다. 내 그를 위해 황토방 군불 때 아랫목이 절절하는 동안 많은 눈 또 내려 푹푹 쌓이면 더 좋겠다.
▲ 산수유, 눈 속에 봄을 기다리고 있다. ⓒ 윤희경
무슨 인연으로 마당가 산수유는 아직도 열매를 털어내지 못하고 붉은 마음을 쏟아내고 있을까. 한해를 보내는 아쉬움에서일까. 벌써 봄을 기다리고 있을게다.
세상 살아가는 이치나 거스르지 말며 나도 봄을 기다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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