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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 도장에 태극기가 거꾸로 걸려있다!

[자전거 세계일주 84] 멕시코 오악사까(Oaxaca)

등록|2009.01.08 14:12 수정|2009.01.08 14:12

라 솔레다드 교회(Iglesia de la Soledad) 1682~1690년에 걸쳐 건설되었으며 '고독의 성모(Virgen de la Soledad)'를 모시는 이유로 이 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가 되었다. ⓒ 문종성



춤의 광장(Plaza de la Danza) 라 솔레다드 앞에 있는 넓은 터에서는 축제 때는 물론이고 틈만 나면 신명나는 춤판이 열린다고 한다. ⓒ 문종성


어두운 도로 가 한 건물에서 새어나오는 불빛, 그 속에서 아이들의 우렁찬 기합소리가 들린다. 무심코 건물 간판을 보니 영어로 태권도라고 쓰여 있다. 반가운 마음에 자전거를 건물 입구에 세워놓고 양해를 구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밤 8시가 넘은 시각, 도심에서 떨어진 변두리에는 한국의 정신인 태권도를 배우는 아이들로 넘쳐났다.

멕시코에서 태권도 도장을 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북부에서 남부로 오는 동안 꽤 여러 번 마주했었다. 쿵푸와 가라데, 그리고 태권도를 잘 알지만 이것이 어느 나라에서 연유된 것인지 확연히 구분을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대개는 태권도와 성룡을 동일선상에서 보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럴 때마다 나는 열과 성을 다해 설명하곤 한다.

"한국과 일본, 중국 모두 다른 나라, 다른 민족입니다. 가라데는 일본의 전통 무술이고, 쿵푸는 중국에서 유래된 겁니다. 그리고 태권도는 바로 한국이 종주국입니다. 세 무술이 다 다르고 세 나라의 문화와 역사도 다 다릅니다."

마세도니오 알깔라(Macedonio Alcala) 보행자들의 천국이라고 일컫는 오악사까의 시내 거리다. 소깔로에서 산토 도밍고 교회까지 이어진다. ⓒ 문종성


인디오 상인들 길거리에서 그들의 전통의상인 '우이필'이나 여성용 숄 '레보소', 깔개로 사용되는 '따뻬떼' 등을 판다. ⓒ 문종성


인디오 상인들 백발의 할머니들이 길에서 소량의 야채와 화분을 팔고 있다. ⓒ 문종성


이럴 때 꼭 따라 들어오는 질문이 있다.

"그럼 세 무술 중 어느 것이 가장 센가요?"
"당연히 태권도죠. 태권도는 치명적이에요. 세 무술 중 가장 빠르게 급소를 공격하는 스피드와 단 한 방으로 상대를 눕힐 수 있는 펀치력이 있습니다. 정신수양 하는데도 이만한 게 없습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예절을 배우는 건 기본이지요. 가라데와 쿵푸도 괜찮을지 모르나 태권도에 비견할 정도는 아니라고요!"

살짝 목에 핏대 세우며 태권도의 우수성을 설명하는 나는 어느 새 애국자가 되어 있다. 물론 세 무술 중 유독 태권도가 비교우위에 있다는 확실한 이론 근거는 없다. 애국심의 발로이자 상대적 왜소 국가인 우리나라의 강함을 전하고 싶은 나의 욕망이었는지 모른다.

이런 내 마음을 일부러 맞춰주는 건지 현지인들은 태권도 흉내를 내보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곤 한다. 그리고 다들 태권도 마에스트로는 아주 대단한 사부라며 인정한다. 그래서 중남미 어딜 가더라도 태권도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잘못 걸린 태극기 대한민국의 한 청년으로 책임감을 느낀 장면이다. ⓒ 문종성


하지만 이런 기대와는 달리 내 눈을 의심케 만드는 일이 일어났다. 방문한 태권도장에 번듯하게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태권도를 배우는 입장에서 멕시코 국기와 나란히 걸어 놓은 건 당연한 일이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스쳤다. 맙소사! 가까이 가서 보니 태극기가 거꾸로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태극기가 거꾸로 걸려 있군요. 3개짜리 괘 보이죠? 저건 오른쪽 하단이 아닌 왼쪽 상단으로 가야합니다. 마찬가지로 태극은 빨간색이 위로 가야 하는 거고요."

관장이 없었기에 수련생 대표에게 일러 주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잘못 걸려있는지도 모를뿐더러 사안의 심각성조차 모르는 듯 했다. 또한 그냥 덮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일지 모르나 괘의 너비와 길이 모두 정상적인 형태와는 차이가 있던 것도 눈에 들어왔다. 답답함이 밀려왔지만 내가 조언할 수 있는 선은 여기까지다.

태권도를 배우는 멕시칸들 오악사카는 멕시코에서 가장 많은 원주민들이 사는 지역이다. 그럼에도 태권도의 인지도는 높았다. ⓒ 문종성


대련 여학생 두 명이 대련 시범을 보이고 있다. ⓒ 문종성


이런 모습을 보며 아이러니한 건 태권도의 인지도와 비례해야 할 한국의 인지도는 그렇게 높지 않다는 것이다. 초기 이민 세대들이 태권도의 정신과 기술을 훌륭히 가르치긴 했지만 최소한 알아야 할 기본적인 한국 문화와 연계해서 전수하지 못함은 아쉬운 대목이다.

태극기가 거꾸로 게양되어 있는 건 그후 공관에서도 볼 수 있었다. 한국의 정신을 배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한국에 대한 기본 지식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데 책은 읽지 않고 문제풀이 위주로만 나가는 학생처럼 무언가 기본기가 부실한 느낌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책임을 꼭 현지인에게만 지울 수는 없다.

예전에 태극기를 올바르게 그리지 못하는 성인이 적지 않다는 뉴스에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우리 것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해외에 우리 문화를 전수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아무리 개인주의가 판치는 세대의 중심에 선 20대 청년이지만 조국의 태극기가 거꾸로 걸려있는 장면이나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 국기를 그리지 못한다는 사실에선 나도 모르게 울컥 하게 된다.

낮에 기분 좋게 오악사카를 구경한 후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본 태권도 도장에서 나는 이런 외진 곳에도 한국의 향기가 묻어있는 모습이 좋았고, 태권도를 인정해 주고 관심을 갖는 현지인 모습에서 뿌듯함을 느꼈다. 태극기가 거꾸로 걸려 있는 것이 아쉽긴 했지만 한국을 아예 중국의 속국으로 여기는 사람들에 비하면 그래도 양반인 편이다. 더구나 멕시코에서 인디오가 가장 많이 사는 주에서 말이다.

산토도밍고 교회 약 1세기에 걸쳐 멕시코식 바로크 건축으로 지어진 교회로 내부에는 대예배당과 산따 로사리아 예배당 2곳에 황금제단이 있다. ⓒ 문종성


상관도(相關圖) '생명의 나무'라는 주제로 교회 천장에 금박과 목조의 부조로 묘사되어 있다. ⓒ 문종성


도장을 빠져 나오면서 좀 더 우리나라가 문화가 널리 알려져서 문화강대국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라틴국가에서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외교와 경제에서 그리 영향력이 없는 한국이란 나라의 브랜드를 끌어올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태권도다.

세계화가 통하는 한국의 문화가 분명 있다. 그것을 전하는 데 먼저 스스로 철저히 검증하고 보급한다면 대한민국 브랜드의 위상은 지금보다 현격히 높아질 것이다. 그리고 공관에서마저 태극기가 거꾸로 걸려있다거나 하는 따위의 아쉬움을 곱씹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자동차 한 대 더 수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작은 것에서부터 제대로 하는 것이 진정한 강대국이다. 세계에서 탁월함을 보이는 몇 가지 경쟁분야가 있긴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가 가야할 길이 멀다고 느껴진다. 다음 세대에 오는 한국 여행자는 부디 이국에서 자랑스럽게 펄럭이는 똑바로 단 태극기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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