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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아침 '서향(瑞香)'이가 불러요

[윤희경의 山村日記] 천리향(千里香)을 만나다

등록|2009.01.04 11:54 수정|2009.01.04 11:54
새해 초부터 날씨가 만만치 않다. 매일처럼 영하 13°를 오르내린다. 산골짝에 제일 추운시간은 해오름 무렵이다. 오막살이 뒤는 산이 떡 버티고 있어 10시는 지나야 해가 나온다. 해가 솟아오를 때까지 자고 또 잔다. 잠이 안 오면 별별 짓을 다한다. 성경을 뒤적이며 예수님도 만나고 불경 속에서 인생무상도 깨닫는다. 삼국유사를 읽으며 승일연님과 대화를 나누며 야사(野史)의 숲속을 한참 헤매다가 시들하면 텔레비전 속에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나 구경을 한다.

▲ 백서향, 향이 유별나 '서향'이란 별명을 얻었다. ⓒ 윤희경




오늘 저녁도 잠이 안와 뒤척이자니 어디서 관능적 향기가 치솟아 오감(五感)을 후벼댄다. 한 밤중에 귀녀(鬼女)가 여우로 둔갑이라도 했나하고 코를 킁킁. 둔갑여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瑞香(서향) 일어 코를 자극시키고 있다. 향이 하도 진하고 짙어 백서향(白瑞香)이라 하고, 더 멀리 퍼지면 천리향(千里香)이라고도 부른다.

몇 년 전 제주도에 갔을 때 향이 좋아 어느 화원에서 옮겨온 꽃이 백서향이다. 여름에서 가을까지는 있는 둥 없는 둥하다가 추운 한 겨울에 본색을 드러내며 향을 피워내기 시작한다. 보통 2~4월에 흰 꽃으로 피어나지만, 실내에선 서둘러 몸을 풀어 팍팍한 겨울일상을 금세 확 바꿔놓는다.

▲ 향이 천리까지 퍼져야 직성이 풀린다해서 '천리향'이라고도 한다. ⓒ 윤희경




1m 남짓 자그마한 키, 따뜻한 남쪽나라 제주도와 거제도가 고향으로 곶자왈지대에 주로 자생한다. 남쪽 희귀 손님이 여기 산골짝까지 묻어와 추운겨울을 뜨겁게 달궈내며 상서로운 향을 피워내는 모습에 코가 행복하다.

백서향이 꽃물을 열기 시작하면 그 독특한 향기로 다른 꽃들은 '입도 뻥끗 못하고 쪽을 못 쓴다'해 별명이 '서향'이다. 꽃말은 '꿈속의 사랑'이다. 향기가 짙다보니 굼뜬 황소의 코도 벌름거리게 만들 정도다.

▲ 개화기는 4월이나 실내에선 지금이 한창이다. 따뜻한 남쪽이 고향이다. ⓒ 윤희경




엄동설한 산골짝 '서향'이 옆에 있다니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답답하고 팍팍한 일상에 꿈 속 같은 상서로운 향이 스며들어와 금세 눈과 코와 가슴과... 겨우내 찌들고 더러워진 몸뚱이를 맑은 향 물로 씻어 내림에랴.

꽃망울 하나가 가라앉는다.
얼음장 깨고 깊이깊이
가라앉는다.
어둠이 물상을 그 쪽으로 몰아붙인다.
섣달에 홍역(紅疫)처럼 돋아난
꽃망울,
저녁에는 함박눈이 내린다.
마을을 지나
잡목림(雜木林) 너머 왔다 간사람
아무에도 발자국을 남기지 못한다.
- 김춘수 <천리향> 전문

얼음장 깨고 가라앉는 꽃망울 하나, 그대로 홍역처럼 돋아난 꽃망울이다. 함박눈 내리는 저녁에 마을을 지나 잡목림 너머로 간사람, 발자국도 없이 향기만 남기고 간사람, 지금 한창 천리를 달려가고 있을 게다.

▲ 백서향 앞에선 모든 꽃들이 '쪽을 못쓴다' 꽃말은 '꿈속의 사랑'이다. ⓒ 윤희경




상서로운 향기로 남고 싶은 서향(瑞香), 천리를 가야 직성이 풀리는 천리향(千里香), 눈 위에 떨어지면 금세 뽀드득 소리가 날 것 같은 꽃망울에 그리움이 아롱거린다.

'솔바우님, 서향에게로 가까이 와 보세요.'
서향이가 나를 부른다.
겨울아,
어서 가라, 어서가렴.
홍역처럼 돋아난 서향 꽃망울에 어서 봄이 안겨오기를 기다린다.
덧붙이는 글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의 수필방에도 함께합니다. 쪽빛강물이 흐르는 북한강 상류에 찾아오면 고향과 농촌을 사랑하는 많은 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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