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내가 생태적이라고? 바나나 한 봉지에 무너지다

좀 더 소박한 삶을 사는 새해가 되길 바라며

등록|2009.01.07 09:42 수정|2009.01.07 10:35

유기농 공정무역 바나나슈퍼마켓에서 판매되고 있는 유기농 공정무역 바나나 ⓒ 김미수


달콤한 바나나의 유혹

독일에서 우리나라 설날처럼 큰 명절인 크리스마스와 새해 연휴를 가족들과 함께 보내기 위해 시댁에 온 후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크리스마스 즈음에 가족들과 함께 장을 보러 간 마트에서 그 날 따라 유난히 바나나가 눈에 띄었다. 바나나가 있는 코너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다가 남편에게 넌지시, "크리스마스도 다가오고 그런데... (파티 분위기도 낼 겸 평소에는 먹지 않는 이국적 과일인) 바나나 한 번 사 먹어볼까? 유기농에 '공정무역(fair trade)' 제품인데" 하고 물어 봤다.

그런 나를 보고 살며시 웃으면서 그는 "나는 별로 생각이 없지만, 먹고 싶으면 (장바구니에) 담자"고 대답했다. 남편이 동조해주기를 내심 바랐던 나는 그 말에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뭔가 떳떳하지 못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장을 보는 내내 '공정무역제품이니까 괜찮아, 뭐 자주 먹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아니 어쩌다도 아닌, 채식을 시작한 이후로 처음이자, 또 (아마도) 마지막으로 사려는 건데..'라는 말로 내 스스로에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결국 '유기농 공정무역' 바나나 한 봉지를 샀다.

생태적인 소비-유기농 공정무역 바나나?

오랫만에 먹는 바나나는 너무 맛있었다. 물론 그동안 초대받은 모임이나 생일 파티 같은 곳에서 한 두번 맛을 본 적이 있긴 했지만, 직접 산 바나나를 먹는 것은 거의 7, 8년 만에 처음이었다. 이유인 즉, 생태적인 세상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을 실천하기 위해 채식인이 되었으면서, 대부분 수입산인데다(장거리 운송을 위한 에너지 낭비 문제), 덤으로 농약까지 듬뿍 뿌려진(생산된 나라의 토양과 수질 등 환경오염 문제) 수입 과일을 사 먹는다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일에 와보니 예전에 한국에선 보지 못한 '유기농 공정무역 바나나'가 있었다. 그동안은 생태적인 이유를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유기농과 공정무역제품이라 하더라도, 지역 농산물이 아닌 이상, 유통에 드는 에너지 낭비 문제는 여전하다) 그 비싼 가격 덕분에 유기농 가게에서 파는 바나나는 쳐다보지도 않았었다. 그래서 고맙게도 사먹고 싶은 욕구를 누르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이 유기농 공정무역 바나나가 얼마 전부터는 좀 더 싼 가격에 슈퍼마켓에서 팔리고 있었다.

나는 내가 산 바나나를 조금이라도 남편이 같이 먹어주기를 기대했지만, 예상대로 물론 남편은 단 한 개, 아니 단 한 입의 바나나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는 단호하고,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람이라 아마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때문에 더욱 나 혼자만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나쁜 짓을 저지른 양 주눅이 들었다. 어쨌건 바나나를 다 먹고 난 후, 나는 이 바나나 한 봉지로 내 사치가 마무리됐다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문제의 시작, 바나나 한 봉지

내가 바나나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께서는 한 봉지를 더 사오셨다. 그 때 나는 '바나나 한 봉지를 사먹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바나나 같은 수입 과일을 이런 저런 이유로 먹고 싶지 않고, 먹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되도록이면 자제하고 싶다'는 입장을 말씀드려야 하나 고민을 했다.

그러다 백 번의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낫다고, 이왕사 주신 거니 조금 먹기는 하되, 다 먹어치우지 않고 시댁을 떠나기 전까지 바나나를 계속 남겨두면, 나를 위해 더 이상 유기농 공정무역 바나나를 사지 않으실 거라는 생각에 일부러 바나나를 그대로 두었다.

그런데 웬걸, 독일인임에도 마치 한국 엄마들처럼 자식들을 살뜰히 챙기시는 어머니께선 바나나만 보면 내가 생각나셨던지, 그 뒤로도 바나나를 2봉지나 더 사오셨다. 결국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어머니 마음에 상처를 조금 드릴 것을 감수하고 내 입장을 말씀드렸다.

채식인이었고, 남편인 스콧 니어링과 함께 버몬트 숲 속에서 오랫동안 자급자족하는 소박한 삶을 산 헬렌 니어링. 그는 <소박한 밥상>이라는 책에서 스스로가 녹색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노력하지만, 사람인지라 한결같이 실천하지 못하고, 가끔 스스로에게 관대해질 때도 있다고 고백했다.

처음 바나나를 살 때 이 말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말을 떠올리며 '나도 인간이니까 가끔 이럴 수도 있는 거지..(하물며 헬렌 니어링같은 이도 그랬다는데..)'하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런데, 그 작은 시작이 내가 계획하고 원했던 단 한 봉지에서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바나나를 통해 본 내 안의 욕망과 신념의 충돌

뼈아픈 경험을 교훈으로 삼고 남기기 위해 글을 쓰던 중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나는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나.'

아니, 내 안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몇 년을 겪어온지라 어머니가 어떤 분인지 나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최소한 어머니가 또 다른 바나나 한 봉지를 더 사오셨을 때 나는 내 입장을 분명히 말씀드려야 했다.

지금 다시 돌이켜보면, 어머니가 사오신 그 바나나 봉지를 보면서..한 편으론 '아니 이럴수가..'하고 놀랐지만(혹은 놀라는 척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잘 익어 달콤한 바나나의 맛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군침을 흘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속으로 은근히 기뻐하지 않았었나 하는 의문이 든다.

이에 나는 그런 게 아니라고 단언할 수가 없다. 아마도 나는 정말 나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인지라' 약간의 유혹에 스스로가 지키고픈 신념을 조금은 벗어날 때도 있지만, 그런 것도 한 번이면 족하다. 내 의지대로 욕구를 제어할 수 있는, 여전히 '상당히 생태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끝까지 면죄부를 주고, 내가 만들어 놓은, 혹은 내가 원하는 그럴 듯한 모습으로 내 자신을 포장해 온 것은 아닐까.

이런 일이 생기고 보니 처음부터 슈퍼마켓에서 좀 더 싸다고 덜컥 상품을 골라 집기보다 한 번 더 생각해보고, 아니면 스스로에게 다른 대안을 제안해 볼 순 없었을까 반성을 하게 되었다. 바나나를 정말 먹고 싶었다면 조금 맛이 다르지만, 그리고 또 조금 더 비쌀지도 모르지만 공정무역 가게(Weltladen)에서 파는 말린 유기농 공정무역 바나나나 칩 같은 것을 대신 사 먹는 것은 어때?' 라고.


생 바나나 vs. 건조 바나나

보통 공정무역 건조 바나나는 생산과정 대부분을 제3세계에서 마친 후 교역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제3세계 현지 노동자들의 자립을 돕고, 따라서 그들이 최대한 많은 이윤을 얻는 것이 공정무역의 큰 목표 중 하나이니, 이런 과정은 당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생 바나나만 수출하는 것보다, 가공, 포장까지 그들 스스로 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일자리와 이윤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건조 바나나가 생 바나나보다 조금 더 생태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생 바나나보다 말린 바나나칩이 가공과 포장 측면에서 에너지가 더 들겠지만, 반면 그 무게와 부피 때문에 유통과 저장에 드는 에너지는 생 바나나가 눈에 띄게 높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미디어 다음 블로거 뉴스와 my-ecolife.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