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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장할아버지의 80년산 러브스토리

안성 박동복 할아버지의 손녀사랑과 아내사랑

등록|2009.01.08 18:33 수정|2009.01.08 18:33

훈장할아버지얼굴에서 80년의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할아버지의 안경테에 군데군데 붙어 있는 노란 테이프는 평소 할아버지의 근검절약 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 송상호






"일일삼성(一日三省), 삼사일언(三思一言)"

<명심보감> 등 어떤 고서에도 없는 경구다. "하루 세 번 자신을 살피고, 말을 하기 전에 세 번을 생각하라"는 뜻이다. 이 집의 가훈이다. 할아버지가 직접 지은 이 경구는 거실 입구에 할아버지의 친필로 현판에 새겨져 있다.


시간이 되면 한 소녀가 할아버지 방에 들어온다. 할아버지는 상을 편다. 그리고 한자 책(족보처럼 생긴 책 다발)이 꽂혀 있는 책꽂이에서 명심보감을 꺼낸다.

"먼저 어제 배운 것을 읽어 보아라."

할아버지의 말이 떨어지면 그 소녀는 어려운 한자를 마치 한글을 읽듯 낭랑한 목소리로 술술 읽어 내려간다. "어허 목소리는 좀 더 크게"라는 할아버지의 주문에 소녀의 목소리는 영락없이 커진다. "그 뜻이 무엇이냐"는 할아버지의 주문에도 소녀는 한 치의 막힘도 없이 그 뜻을 풀이한다. 

이런 풍경의 주인공은 박동복(80) 할아버지와 손녀 보람(초4)이다. 그렇다. 할아버지가 훈장이고 손녀가 제자인 셈이다.

학습 중지금은 훈장 할아버지가 제자 손녀에게 명심보감을 가르치는 중이다. 모두 사뭇 진지하다. 손녀 보람이는 어려운 한자를 술술 읽었고, 그 뜻도 막힘없이 풀어냈다. 마치 옛날 훈장님과 제자의 모습이 따로 없었다. ⓒ 송상호




손녀 보람이는 어렸을 적부터 할아버지 집에서 자랐다. 보람이가 5살 되던 해에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해서 <동몽선습>을 뗐고, 드디어 <명심보감>까지 이른 것이다. 할아버지가 보람이에게 한자를 가르치는 이유는, 손녀에게 자신이 잘 알고 있는 한자를 가르쳐 낱말을 제대로 아는 아이로 자라게 하기 위해서라고. 더욱 중요한 이유는 인격 수양과 예절 고취였던 것.

손녀 보람이도 이제 훌쩍 커 부모와 함께 평택에 살고 있지만, 요즘처럼 방학이 되면 안성 할아버지 집에 와서 살다시피 하며, 매일 할아버지에게 한자를 배운다.

"한자가 재미있어요. 그리고 자신감도 생겼어요."

하기 싫은 것을 시키면 잠시도 못 따라가는 요즘 아이들을 감안한다면 보람은 정말로 한자를 배우는 것이 재미있는 게다. 방학만 되면 할아버지 집에 와서 생활하는 것이 이를 증명해준다.

57년 동행한 아내 병수발도 훈장님 몫

가훈박동복 할아버지가 직접 지은 가훈이자 직접 쓴 가훈 현판이 거실에 걸려있다. 이 경구는 어느 고서에도 없는 훈장할아버지표 경구다. ⓒ 송상호

한자 공부지금은 할아버지 혼자서 한자를 쓰고 있다. 아내의 병때문에 하루 종일 바깥에 나가지 못하고 수발을 드는 할아버지는 한자를 쓰고 읽는 것 때문에 하루를 알차게 보낸다고 한다. ⓒ 송상호





이런 훈장 할아버지는 하루 일과를 거의 집에서 보낸다. 17년 전 중풍으로 쓰러진 아내가 3년째 침대에서 누워 거의 꼼작도 못하고 생활하기 때문이다. 세끼니 먹이기와 하루 3번 기저귀 갈기가 할아버지의 주된 일과이다. 때로는 마당 비닐하우스에 오가피를 직접 키워 수확한 후 끓여서 '오가피 물'을 만들어 할머니에게 준다. 중풍에 좋기 때문이다.


덕분에 할아버지는 바깥출입이 거의 없다. 하루 30분 정도 손녀에게 한자를 전수하는 일, 한자를 읽으며 뜻을 새기는 일, 한자를 쓰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일 등이 주된 일과를 벗어난 취미생활이다.

두 분이 결혼한 지도 자그마치 57년. 박동복 할아버지가 23세, 정영화(77) 할머니가 20세 때에 결혼했으니 말이다. 그동안 농사꾼으로서, 농사꾼의 아내로서 5남매를 키우며 숱한 인고의 세월을 함께 걸어온 부부인 것이다.

57년 부부57년 째 같이 살고 있는 노부부. 오늘은 손님이 와서 그런지 두분다 기분이 좋다. 매일 침대에 누운 할머니가 오히려 더 좋아하신다. ⓒ 송상호






그런데 오늘따라 신이 난 것은 오히려 할머니다. 오래간만에 젊은 사람인 내가 방문해서 자신들이 사는 이야기를 정성껏 적어가며 듣는 것이 반가운 게다. 할머니가 어눌한 발음(중풍 때문에)으로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같이 살아주서 저 사람이 고맙죠. 다시 태어나도 저이랑 살거예유."

정확하지도 않은 할머니의 발음에 이어 할아버지도 "자신도 그렇다"며 대꾸했다.
덧붙이는 글 이 인터뷰는 지난 7일 박동복 할아버지(경기 안성 대덕면 건지리) 자택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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