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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교회 부정했고 그들 신도 부정했다"

시인 이적 목사 자전적 에세이 <민통선 예수> 펴내

등록|2009.01.09 17:40 수정|2009.01.10 14:24

시인 이적 목사시인 이적(가운데) 목사가 오랜만에 찾아온 박광배 시인(오른쪽 첫 번째), 박민규 시인(오른쪽 두 번째), 민병기(사학자, 왼쪽)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이종찬




"내가 다시 사역자로 되돌아오기까지에는 참으로 수많은 난관과 넘지 못할 고갯길을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와야 했다. 그 길은 눈물과 피범벅이 된 형극의 길이었다… 나는 한국교회를 부정했으며 그들의 신도 부정했다. 또한 한국교회를 비판했으며 한국교회 사역자들을 이중인격자로 매도했다." -6쪽, '복수의 칼 사랑의 칼' 몇 토막

섬찟하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거칠고도 험한 삶을 살 수도 있을까. 삼천포 앞바다에 떠도는 작고 예쁜 섬 사량도에서 태어나 시인, 소설가를 꿈꾸던 소년. 그 소년이 이십대 청년이 되면서 군사독재정권이 저지른 감당하지 못할 폭압(삼청교육대) 앞에서 한순간에 개처럼 살아야 했다. 한순간에 뺄갱이, 깡패, 폭도란 꼬리표를 달아야 했다.

그때부터 그가 맨발로 걷는 길은 뾰쪽한 돌부리와 가시투성이였고, 그 길을 겨우 벗어났는가 싶으면 이내 코앞에 아스라한 낭떠러지가 가로 막았다. 목회자가 되려 했던 꿈도 모두 접어야 했다. 지명수배와 체포, 협박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는 군사독재정권 앞에서 한 번도 무릎을 꿇지 않았다. 오히려 맨몸으로 맞섰다.

교회도 부정했다. 하나님과 예수님도 부정했다. 살인마 정권이 망아지처럼 마구 날뛰는 사회 속에서도 입에 자물쇠를 단단히 채우고 있는 한국교회를 거칠고 강하게 꼬집었다. 한국교회에서 폭압적인 사회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용을 목이 쉬도록 설교하고 있는 사역자들을 이중인격자로 몰아붙였다.  

시인 이적 목사, 본명 이기석이 바로 그다. '이적'이란 독특한 필명 때문이었을까. 1980년대 참여문단에서는 그를 '군사독재정권에 정면으로 이적행위를 하는 시인'으로 불렀다. 그런 그가 한때 그토록 미워하고 저주했던 군인들과 함께 기도하는 목사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교회가 있는 민통선 마을은 한국전쟁 때 쑥대밭이 된 곳이었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때 몸과 마음이 쑥대밭으로 변하고 만 그처럼.

삼청교육대 가해자, "무덤이라도 파헤쳐 '부관참시'라도 하고 싶었다"

"올림픽이 계획되어 있던 다음 해를 두고 그해는 유달리 떠들썩했지만 우리들은 초조함으로 날을 지새우고 있었다. 군사정권은 88올림픽으로 국제적 이미지를 업그레이드 시키려 온갖 모양새를 다 꾸미고 있었지만 우리는 삼청교육대란 화약고를 올림픽 중에 정권에 치명타를 가할 요량이었다." -256쪽, '놀라운 제의' 몇 토막

서슬 퍼런 전두환 군사독재시절, 삼청교육대 속내를 샅샅이 고발하는 <삼청교육대 정화작전>(1997년)을 펴낸 시인 이적(52). 지금 경기도 김포군 월곶면 용강리 애기봉 민통선 마을에서 <민통선평화교회> 담임목사와 서울 변두리 곳곳에 '찾아가는 민족교회'를 꾸리고 있는 이적 시인이 자전적 에세이집 <민통선 예수>(아이디얼북스)를 펴냈다.

이 책에는 그가 문학을 향한 꿈을 키우는 소년기부터 삼청교육대 강제 억류, 청송보호감호소 강제 구금, 삼청교육대 속내를 책으로 폭로하는 과정이 피범벅처럼 엉겨 있다. 이와 함께 5공 비리 국회청문회 '삼청학살과 임근실 죽음', 7년에 걸친 수배생활, 아내 국회의원 출마, 민통선평화교회 목사가 되기까지, 그 고된 삶이 낱낱이 담겨 있다.          

'복수의 칼 사랑의 칼' '민통선 평화교회' '출감' '고난의 조국' '지옥에서 온 사자들' '어떤 만남' '아, 임근실' '고향을 버려라' '머나먼 귀양' '다시 그 땅으로' '작은 혁명' '미완의 범죄' '군사정권을 공격하라' '이적을 죽이시오' '여대생과 지명수배자' 'DJ의 부탁' '전두환의 항복' '새벽에 만나 예수' 등 30편이 그것.

이적 시인은 "나는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찝차를 타고 거들먹거리던 몇몇의 장교와 조교라는 이름으로 고문과 노역을 강요하며 물고문을 가하던 악질군인들의 환영으로 고통 속을 헤매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살아 있으면 지옥 끝까지라도 찾아간다. 죽어 없어진 영혼이라면 무덤이라도 파헤쳐 '부관참시'라도 하리라고 이를 악물었다"며, 삼청교육대가 저지른 만행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를 되짚었다.

"평생 감옥살이만 하다 죽을 게다"

이적 시인시인 이적 목사 자전적 에세이 <민통선 예수> ⓒ 이종찬



"어릴 적, 어머니는 내가 면서기가 되는 게 꿈이었다. 어머니의 그 꿈은 아주 평범한 데서 온 꿈이었다. 제법 시골에서는 공부깨나 했던 아버지가 다니던 공무원 자리를 냅다 차버리고 수산업의 길로 들어서면서부터 어머니의 가슴속엔 공무원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차기 시작했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이러한(면서기를 하지 않고 문학에 빠져 있는) 내가 언젠가는 배고파 도둑질이나 하다가 감옥에서 생을 마칠 것이라는 예감을 했었나보았다. 언젠가 "야- 이 놈아 넌 내 말 안 듣다가 평생 감옥살이만 하다 죽을 게다"하는 저주 섞인 말이 예사스럽게만은 다가오지 않았다. 나에게는 그 말이 평생의 상흔처럼 따라다녔고 나는 그 말에서 결코 자유스럽지가 못했다."-286~289쪽, '이적을 죽이시오' 몇 토막

이적 시인 아버지는 공무원을 하다가 갑자기 그만 두고 수산업 중 잠수기업을 하면서 제법 쏠쏠한 재미를 본다. 하지만 사촌형에게 사기를 당하면서 실의에 잠겨 술을 가까이하기 시작한다. 시인 아버지는 그 때문에 중풍이 들어 한동안 누워 지내다가 급기야 49살이란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시인 어머니가 시인에게 면서기를 하라고 한 것도 시인 아버지가 공무원 자리에 그대로 있었으면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은 공무원이 싫었다. 어촌에 앉아 평생을 보낼 생각이 들자 앞날이 캄캄했고, 그렇게 살다 죽는다면 평생 한이 될 것만 같았다.

근데, 이게 웬 날벼락일까. 시인은 "평생 감옥살이만 하다 죽을 게다"라는 어머니 말씀처럼 1980년 10월 삼청교육대로 무조건 끌려간다. 아무런 죄도 없이. 시인은 그때 "월급쟁이 남편 월급쟁이 아들을 원하던 어머니의 단순한 바람을 어긴 죄로 나는 영원히 감옥살이나 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두려움에 떤다.     

시인은 그 뒤에도 죽을 고비를 또 한 번 넘긴다. 그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허삼수가 부산시장과 기관장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이적을 죽여버리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는 시인과 같은 학교를 다닌 동창생이 알려주었다. 그때 시인 동창생은 처삼촌인 허삼수 선거 사무실에서 참모로 뛰고 있었다.

"나는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그날 밤 나는 혼자서 막걸리 몇 병을 비우고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 얼마나 잤을까? / 잠을 자다 눈을 뜬 것은 어두워야 할 방안이 너무도 밝아 있었다는 것이다. /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의 휘영청 떠 있는 둥근 달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 그때였다. 내게 알지 못할 자유롭지 못한 사념들이 가슴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나온 세월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감옥에서의 세월, 죽음과의 사투, 폭로를 위한 저항, 군사정권과의 투쟁, 아내의 국회의원 출마, 정권교체 이런 세월들이 오버랩되어 20여 년의 세월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사라져갔다. 한순간이었다. 내가 생각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는데 정권교체 후 왜 실패의 연속인가?"-407~8쪽, '새벽에 만난 예수' 몇 토막 

시인은 몸과 마음이 고달파질 때면 서부전선 민통선 마을에 글을 쓰기 위해 마련해 두었던 <해양문학관>을 자주 찾았다. 그곳에서 문우들과 아울려 막걸리도 마시며 머리를 식혔다. 그런 어느 날 하루, 시인은 오랜만에 깊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시인 표현을 빌면 "잠 속에서 꿈을 꾸었는가 싶었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에서 "내가 너에게 다 주지 않았느냐! 다 주었음에도 너는 그 자리구나!"라는 말이 또렷하게 들려온다. 그 소리에 새벽녘에 잠을 깬 시인은 "그렇구나! 내가 신학을 하다 중도 탈락한 사내"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시인은 생각한다. "겉으로는 한국교단의 지도자들의 위선을 질타하고 그들의 이중성을 이유로 들어 목회의 길을 외면"했다고.

그때 문득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다. "사실은 언제 한번 신에 대한 깊은 감사기도 한번 한 적이 있었던가? 믿음에 대한 고뇌를 한 적이 있었던가? 믿음으로 인한 사회구원을 고뇌한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20여년을 그저 사회구원이라는 명분 하나만 움켜쥐고 아등바등 바깥으로만 떠돌았다.

그날 아침, 시인은 민통선 거리로 나선다. 조무래기 아이들 한 무리가 재잘대며 마을 아랫길로 바쁘게 뛰어 내려가고 있다. 시인은 아이들을 불러 모아 오후에 뭐하냐고 묻는다. 아이들은 '그냥 논다'고 말한다. 시인은 아이들과 오후에 만날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그날 오후 <민통선문학관>으로 찾아온 아이들에게 논술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 아이들 중에는 엄마가 가출한 아이도 있었고, 아빠가 알코올 중독자인 아이도 있었다. 매일 아빠로부터 매를 맞는다는 아이도 있었고, 엄마가 없는 아이, 아빠가 없는 아이도 있었다. 그때부터 시인은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 매일 만나 논술을 가르치다가 때가 되면 밥도 같이 나눠먹고, 출출하면 라면도 끓여 같이 나눠먹는다.      

하나님조차 원망했던 시인이 민통선에 둥지를 트는 순간이었다. 삼청교육대에서 시인에게 "죽음의 위해를 가했던 오기택 소령, 염근석 중사, 정도형, 채왕지, 권영동 하사 등 수많은 사람들을 내 뇌리에서 지우기"로 한 것도, 그렇게 하여 '비움'이란 철학을 움켜쥐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이에 그 '비움' 속에는 민통선에서 살아가는 '어린 예수들'이 뛰놀고 있다.

김광길(경기대) 교수는 시인 이적 목사에 대해 "지금 이 순간도 민통선아동쉼터 건립을 위하여 붕어빵 봉사회에서 묵묵히 붕어빵을 굽고 있는 그가 바로 음지의 길만 선택한 민통선 예수"라고 평했다.

김창규(목사) 시인은 ""그는 교회를 떠나있던 20여년 간을 대통령직선제 쟁취를 위해 싸웠고 이 땅의 민주화 쟁취를 위해 싸웠다"며 "정권교체를 위해 헌신한 삶을 어찌 교회를 떠난 탕아에 비유할 수 있을까"라고 덧붙였다. 

시인 이적 목사이적 시인이 자전적 에세이집 <민통선 예수>(아이디얼북스)를 펴냈다 ⓒ 이종찬




다음은 지난 1월 3일(토) 저녁, 불광동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시인 이적 목사와 만나 나눈 일문일답이다. 

-언제 민통선 마을에 들어왔는가?
"2000년 가을 무렵이다. 그때 나는 전도사도 목사도 아닌 글쟁이(시인, 소설가) 신분이었다. 그러나 얼마 뒤 나는 이 민통선 마을에서 전도사가 되었다. 부산에서 신학교를 졸업한 뒤 20여 년 동안 바깥세상을 떠돌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삼청교육대 사건으로 군인을 몹시 저주한다고 들었다. 민통선 안에는 군인이 많지 않은가?
"그때 조국의 군은 내게 울타리가 아니라 죽음을 강요하는 깡패 폭력집단이었다. 그들 앞에서는 누구나 뺄갱이가 되고, 깡패가 되고, 불량배, 폭도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군인에 대한 그 복수의 칼날을 사랑으로 바꾸고 있다.

해병대 부대 군인들도 교회에 자주 찾아온다. 군인인 그들의 눈은 한없이 평화롭고 고요했다. 7~80년대 국민을 억압하고 살육하던 그들의 눈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들은 조국의 평화를 염원하고 있으며, 한국군의 외세에 의한 부당한 전쟁개입에 반대하고 있다. 사실, 민통선 평화교회는 우리나라 최초로 휴전선에 설립된 민간인 군인교회이다."

-민통선 마을에는 몇 가구가 살고 있으며, 교회에는 몇 명이나 나오는가?
"우리 교회는 산에 올라가서 보면 북녘 땅이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남한의 선전마을(새마을)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에는 60여 호의 집들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으나 노인들 몇 사람만 살고 있는 초라한 군인마을이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해병대 군인 20여 명, 아이들 20여 명이 전부다."

-목회를 하면서도 가끔 옛 상처(삼청교육대)가 떠오르지는 않는가?
"나는 마음을 비웠다. 과거도 미래도 잊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는 누구보다도 더 건실한 벗들과 더 나은 사상과 문학 그리고 나를 지배할 수 있는 평화가 생겼다. 게다가 지난 10여 년 동안 예수정신을 실천한 대가인 '무소유정신'이 나를 에워싸고 있다. 나는 누구보다도 부자이며 큰 사상가이며 아무 것도 부러울 게 없는 사람이다."

-요즈음에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가?
"나를 핍박했던 모든 대상과 특히 나라를 통째로 말아먹은 위정자들, 쿠데타로 자국민을 고통의 세월 속에 빠트린 사람, 정치군인들, 총칼로 광주 5.18을 진압하고 살육한 군인들, 삼청교육대에서 살육과 도륙을 일삼으며 자국민을 노예로 취급했던 군인들,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다시는 이 땅에 그 같은 군인이 탄생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민통선으로 들어올 때 가장 어려웠던 일은?
"나는 처음 아내와 아이들도 모르게 나만의 목회계획을 은밀히 세웠다. 얼마 뒤 처음 그 얘기를 했더니 아이들은 펄쩍 뛰고, 아내도 극렬히 반대를 했다. 하지만 나는 아내가 출근하고 아이들이 학교에 간 사이, 이삿짐을 꾸려 봉고차에 실었다. 그리고 학교를 마치고 오는 아이들과 퇴근하는 아내를 차에 싣고 곧장 민통선으로 달렸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나는 민통선 안에서 사랑을 배우고 가르치며 '무소유'의 아름다운 정신을 스스로 배웠다. 지금 내 나이가 50대가 되기까지 지난 30여 년 내 개인의 역사는 내 조국의 역사였으며, 이 땅의 불운한 과거였고, 우리 민족의 불행이었다. 다시는 이런 악몽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오늘도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시인 이적 목사는 1957년 경남 통영 사량도에서 태어나 1987년 <민족문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바스티유의 땅> <겨울산하> <이별과 절망의 둔주곡> <마지막 편지> <바다가 된 그대에게>가 있으며, 소설집 및 보고문학집 <삼청교육대 정화작전> <청송감호소 죽음의 그림자>, 장편소설 <북방산 계곡의 비밀>, 시사평론집 <대통령의 늦바람>이 있다.

1980년 10월,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그는 1년 뒤 청송감호소로 옮겨 3년 동안 강제 구금당한다. 그 뒤 삼청폭로 미수사건인 속칭 '양곡상 침입사건' 등으로 2차례 구속당한다. 1986년에는 부산영도야학에서 국어교사로 4년 동안 야학운동을 한 뒤 1988년에는 국회 5공 비리 청문회에서 '삼청학살과 임근실' 죽음을 최초로 폭로한다.

그해 국회청문회 삼청고발 괘씸죄에 걸려 오모 소령에 의해 고소당한 뒤 7년 동안 지명수배를 당한다. 1989년에는 서울 동부지청에 체포됐으나 김대중 신민당 총재 구명활동으로 가까스로 풀려난다. 그 뒤 한국외대, 동아대 등 30여 개 대학에서 군사정권 규탄 시국강연을 열었으며, 대통령직선제와 민주화 쟁취를 위해 온몸으로 싸웠다.

<울산매일신문> 논설위원,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양산 지부장, CBS라디오 '이적 시사만평', (사)한국해양문화발전연구소 창립 이사장을 맡았다. 지금은 '민통선 평화교회' 담임목사, '민통선 아동복지관' 관장, 김포경실련 공동대표, 사회봉사단체 '사랑의 붕어빵 공동체' 공동대표, <분단과 통일시> 동인, <우리시대 시인들> 부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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