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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점 만점에 9점' 호주 총리대행 "내 남친은 가위손"

[해외리포트] 금융위기 대처 1등공신... 남자친구는 미용사

등록|2009.01.13 12:33 수정|2009.01.13 13:43
지금 호주 정치계는 한 달 남짓 이어지는 긴 휴가 중이다. 작년 12월 셋째 주일부터 연말연시 휴가에 들어간 정치인들은 가족과 함께 휴가를 즐기면서 틈틈이 지역구 활동을 벌이고 있다.

전쟁에 준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한 그들은 확실하게 쉰다. '휴식은 일의 연장'이라는 호주의 전통을 기꺼이 따르는 셈이다. 1년 내내 TV화면에 등장하는 총리와 장관, 야당 리더들의 얼굴을 거의 볼 수 없을 정도다.

캐빈 러드 총리도 지난 12월 26일부터 3주 반 동안의 휴가에 들어갔다. 그는 크리켓 경기장 일반석에 앉아서 하루 종일 벌어지는 국가 대항전 경기를 즐기고, 핫도그를 사먹기 위해서 줄을 서기도 한다.

'호주 최초의 여성 국정책임자' 줄리아 길라드 부총리

▲ 줄리아 길라드 호주 부총리 ⓒ 호주 국회 홈페이지

그러나 캐빈 러드 총리가 휴가에 들어갔다고 해서 호주 정치에 공백이 생길 수는 없다. 그의 휴가 기간 동안 총리 역할을 대신하는 사람이 줄리아 길라드 총리대행이다. 그녀는 러드 총리 취임 이후부터 부총리를 맡고 있다.

한편 내각책임제를 채택하는 호주에서 총리대행은 그냥 비상연락이나 취하는 '상황실장'이 아니다. 총리의 권한과 책임을 똑같이 부여받는다. 대행 기간 동안 명실공히 호주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되는 것이다.

여성이 호주 최고국정책임자가 된 사례는 길라드 총리대행이 최초다. 호주는 뉴질랜드에 이어서 세계 두 번째로 여성참정권을 부여한 나라다. 그러나 여성이 피선거권을 획득한 사례로만 치면 1902년 호주가 세계 최초였다. 그런 역사를 가진 나라치고는 호주는 여성의 정치적 부상이 많이 늦은 편이다.

참고로 세계 여성참정권 역사를 살펴보면 영국 1928년, 프랑스 1945년, 한국 1948년, 쿠웨이트 2006년으로 오래지 않다. 특히 민주주의가 일찍 뿌리내린 영국과 프랑스의 사례는 믿기 어려울 정도다. 반면에 지구 한 귀퉁이였던 호주와 뉴질랜드가 여성참정권의 선구적 나라인 것도 특이하다.

지지율 70%의 러드 총리가 부러워하는 부총리

2007년 말 총선에서 승리한 캐빈 러드 총리는 비슷한 시기에 대통령에 당선된 이명박 대통령과 '집권 동기생'이다. 지난해 12월, 집권 1년을 맞은 러드 총리의 지지율은 정확하게 70%였다. 비슷한 시기에 집권 1년을 맞은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24.8%.

그런데 높은 지지율 덕분에 '미스터 70%'라는 별명을 얻은 러드 총리가 무척 부러워하는 정치인이 있다. 줄리아 길라드 부총리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녀는 노동당 집권 1년 평가에서, 호주 유일의 전국 일간지 <디 오스트레일리안>으로부터 10점 만점에 9점을 얻었다. 러드 총리는 10점 만점에 7점.

호주정치계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꽤 다양하다. 양대 정당인 노동당과 연립당 안에도 극우에서 극좌까지 다양하게 망라된다. 같은 노동당 소속이지만 러드 총리는 중도좌파로, 길라드 부총리는 극좌파로 분류된다.

최근 노동당 집권 1년 특집을 보도한 <디 오스트레일리안>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잘 갈무리한 1등 공신으로 길라드 부총리와 린지 터너 금융장관을 지목했다. 러드 총리가 G-20정상회담, APEC정상회의 등에 참석하느라 해외출장 중일 때, 길라드 부총리가 적절한 판단과 결정으로 '핀치 히터' 이상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한 것.

이 신문은 이어서 "캐빈 러드 총리와 웨인 스완 재무장관이 A팀이라면, 줄리아 길라드 부총리와 린지 터너 금융장관이 B팀인데, B팀의 성적이 오히려 낫다"면서 "호주를 국제금융위기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러드 총리의 해외출장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코믹한 만평을 싣기도 했다.

▲ 부총리 취임 1년 성적표로 '10점 만점에 9점'을 받은 줄리아 길라드 부총리. ⓒ 디오스트레일리안


인기비결이 멋진 헤어스타일 때문이라고?

호주는 의원이 장관을 겸하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어 줄리아 길라드 부총리도 장관을 3개나 겸하고 있다. 교육 장관, 고용 및 노사관계 장관, 사회통합 장관 등을 맡아서 노동당 정부가 최우선 국정과제로 삼고 있는 교육, 노사관계 개혁을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노동당 정부의 2대 정책과제를 길라드 부총리가 혼자 떠맡았다. 그런 연유로 러드 총리는 종종 기자들에게 "내가 길라드 부총리만 잘 보좌하면 노동당 정부는 성공할 것 같다"는 조크를 던지곤 한다. 실제로 그녀는 '공립학교 우선정책'을 연착륙 시켰고, 고용주 위주의 노사관계법을 폐지시켜서 높은 업무수행 평가를 받았다.

줄리아 길라드 총리대행의 인기 비결은 유능한 정치력에서만 비롯된 게 아니다. 그녀는 한때 '가장 섹시한 정치인'으로 뽑혔을 정도로 매력이 넘치는 정치인이다. 더구나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그녀의 헤어스타일이 심심찮게 화제에 오른다. <데일리텔레그래프>에서는 '그녀가 왜 변화무쌍한 헤어스타일을 시도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설문조사를 실시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따로 있었다. 그녀의 남자친구, 또는 동거인으로 불리는 팀 메티슨이 30년 경력의 헤어드레서 출신인 것. 올해로 48세가 된 길라드 총리대행은 남자친구는 여럿 있었지만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은 상태다. 그녀의 호주 연방의회 프로필에도 '싱글'로 적혀있다.

그러나 호주에서 파트너가 갖는 의미는 결혼식만 올리지 않은 상태의 부부와 같다. 법적으로 부부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갖는 것. 그런 의미에서 메티슨은 호주의 '퍼스트 맨'이다. 실제로 그는 길라드 총리대행과 함께 공식석상에 참석한다.

'호주 남성건강 대사' 직에 오른 전직 미용사

▲ 줄리아 길라드 총리대행과 파트너가 공식행사에 함께 참석한 모습. ⓒ 시드니모닝헤럴드

2008년 11월 25일, 메티슨은 호주 연방정부에서 임명하는 여섯 명의 '호주 남성 대사' 중 한명으로 뽑혔다. 그를 제외한 다섯 명은 의사, 교수, 언론인, 체육인, 장교 등이다.

이를 두고 야당 소속 바나비 조이스 상원의원은 "연고자를 배려한 정실인사라는 느낌이 든다. 메티슨이 길라드 부총리의 파트너가 아니었다면 그 직책을 맡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하면서 "의사, 심리학자, 치과의사, 안과의사 등이 적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임명권자인 니콜라 녹슨 보건장관은 호주국영 abc-TV에 출연하여 "그는 충분한 사회경험을 갖고 있고, 전문직을 수행하면서 남성건강에 관한 많은 상식을 얻은 적격자"라고 조이스 상원의원의 반대의견을 일축했다.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한 메티슨도 "나는 30년 동안 일하면서 수많은 직종에 종사하는 많은 전문가들을 만났다. 특히 이발소의 특성상 남성건강에 관한 대화를 나눌 기회도 많았다"고 말했다.

한편 크레이그 에머슨 중소기업 장관은 "그 직책은 보수가 없는 봉사활동의 일환인데 지나치게 책임을 강조한다"면서 "과거에 남자 부총리의 아내들도 비슷한 직책을 맡았는데, 유독 이번에만 논란이 되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메티슨의 임명을 가장 적극적으로 동조한 사람들은 현직 이발사들이다. 40년째 이발사로 일한다는 샘 볼프는 "이발소처럼 편하게 자신의 고민과 건강상태를 털어놓기 좋은 곳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메티슨은 최고의 남성건강 대사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800년대 말까지 호주 여성들은 2등 시민 취급을 받았다. 여성은 그때까지 투표권과 재산소유권도 없었고 전문직을 갖거나 대학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여성이 총리대행에 오르고, 그녀의 파트너가 미용사 출신이라는 사실 자체가 격세지감을 느끼게 만드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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