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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태후는 왜 사촌오빠와 결혼했을까?

고려시대 왜 '족친혼' 성행했나

등록|2009.01.13 14:10 수정|2009.01.13 14:22

▲ 팔관회 행사에 가는 황보설, 황보수, 신정황태후 황보씨. 황보설과 황보수는 고종사촌 오빠인 경종과 혼인한다. KBS 드라마 <천추태후> 한 장면 ⓒ KBS


지난 11일 방영된 KBS 2TV 주말사극 <천추태후>에서 고려 제 5대 왕 경종(최철호 분)은 대소신료들 앞에서 새 왕후를 들일 것이라고 선포한다. 그런데 왕후로 간택된 사람은 다름 아닌 경종의 외사촌동생인 황보수와 황보설이었다. 자신들이 밀던 김원숭(김병기 분)의 딸이 아닌, 정적인 황주 황보 가문의 두 딸이 새 왕후가 된다는 말에 신라계 인물인 시랑 최섬(이기열 분)은 그 혼인이 '족내혼(族內婚)'이라는 이유를 들어 불가함을 주장했다. 그러자 경종의 비웃는 듯한 한마디가 이어진다.

"거, 괴이한 말이로구먼. 선왕 때부터 족내혼은 황실에서 권장하는 일이외다. 그대 최시랑이 좋아하는 신라에선 더하지 않았는가?"

신라-고려 왕실, 친척끼리 결혼 성행

가족끼리 결혼하는 족내혼(근친혼)은 고려시대 후기까지 왕실을 중심으로 내려오던 혼인풍습이었다. 요즘 시대 사람들의 보편적인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당시 고려 왕실의 결혼은 대부분 족내혼으로 이뤄졌다. 경종은 고려 제 4대 왕 광종의 아들로, 어머니는 광종의 제 1비인 대목왕후 황보씨다. 대목왕후의 아버지는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 어머니는 신정왕후 황보씨로 그녀의 동생인 왕욱(대종으로 추존)의 두 딸이 바로 황보수·황보설이다(후에 각각 헌애왕후·헌정왕후). 즉 경종은 외삼촌의 두 딸, 외사촌동생들과 결혼한 셈이다.

광종의 경우에는 누이동생과 조카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태조의 아들인 광종의 제 1비는 앞서 밝혔듯이 대목왕후, 그녀 역시 광종과 같은 태조의 자식이다. 광종의 제 2비인 경화궁부인 임씨는 광종의 형이자 고려 제 2대왕인 혜종의 딸로 광종에게는 조카가 된다. 고려 제 6대 왕 성종은 태조와 신정왕후의 아들인 왕욱의 아들로 경종에게 시집간 헌애왕후·헌정왕후와는 친남매지간이다. 성종의 제 1비인 문덕왕후 유씨는 광종의 딸로, 성종과 광종이 삼촌지간이니 성종은 사촌누나와 결혼한 셈이다.

고려 왕실에서 족내혼이 본격적으로 행해진 것은 광종 때부터인데, 그렇다면 그 전에는 어땠을까? 태조, 혜종, 정종의 결혼 역시 족내혼과 그 의미를 같이 한다. 익히 알다시피 고려 태조 왕건은 29명의 아내를 두었다.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고려 건국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지방의 호족 세력 및 신라 왕족과 결탁해야 했던 태조는 결혼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해 서로 보다 끈끈한 결속력을 다졌다.

이런 모습은 태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혜종과 정종에게서도 나타나는데, 혜종은 경기도 광주의 무장세력인 왕규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다. 그런데 왕규는 태조에게도 두 딸을 출가시켰으니, 태조와 혜종은 부자지간이면서 동서지간이 됐다. 정종은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의 두 딸과 결혼하는데 박영규 역시 태조에게 딸을 출가시켜 태조와 정종 또한 부자지간이면서 동서지간이 됐다.

태종무열왕은 김유신 매제이면서 장인

이런 족내혼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앞서 경종이 '고려보다 더하다'며 비꼬았던 신라는 지배층의 족내혼이 활발하게 이뤄졌던 나라였다.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북쪽의 영토 확장을 통해 신라 전성기를 구축한 진흥왕은 선왕 법흥왕의 동생인 갈문왕 입종의 아들이다. 입종은 형인 법흥왕의 딸, 즉 조카와 결혼하여 진흥왕을 낳았으니, 진흥왕에게 어머니는 어머니인 동시에 사촌누나가 되는 셈이다. 또한 진흥왕의 아들 동륜의 아내는 입종의 딸이었다. 동륜이 입종의 손자이니 동륜은 자신의 고모와 결혼한 것이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 역시 족내혼을 통해 정치적 동맹자의 결속을 굳게 다졌던 이들이다. 장작불에 타 죽을 뻔한 우여곡절 끝에 김춘추와 결혼하여 훗날 문명왕후가 되는 문희는 김유신의 막내동생이다. 그런데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김유신에게 출가하여 지소부인이 되니, 김유신은 조카와 결혼하고 김춘추는 김유신에게 매제이자 장인이 되는 셈이다.

골품제라는 신분제도가 존재했던 신라는 족내혼을 통해 혈통의 신성함을 유지하고, 권력누수를 막으려 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하게 신라에만 여왕이 존재했던 까닭도 '김씨 왕가'의 배타적 권력독점을 위해서였다. 이런 시대에서 부모 모두 왕의 혈통이지만 본인 자신은 진골이었던 김춘추와, 멸망한 금관가야 출신의 방계 진골로서 중앙권력에 편입되고 싶어 하던 김유신은 족내혼을 통해 손을 잡게 되고, 김춘추는 김유신이 가진 군사력의 도움으로 진골 최초로 왕위에 올라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달성하게 된다.

이처럼 신라, 고려시대의 족내혼은 정치적 권력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족내혼을 통해 집단의 정치적 기반을 유지하고 그것을 더욱 공고히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원 간섭기 거치며 족내혼 금하기도

그런데 이런 족내혼의 경향이 고려 제 8대 왕 현종 때부터 옅어지기 시작한다. 현종은 모두 13명의 비를 두었는데 그 중 3명의 아내만이 족내혼일 뿐, 다른 10명과는 모두 족외혼이었다. 현종을 기점으로 이후 고려왕들은 족내혼보다는 족외혼으로 맞이한 비의 수가 많아졌고, 족내혼으로 낳은 자식보다 족외혼으로 낳은 자식에게 왕위를 계승하는 일 또한 빈번해졌다. 이것의 의미는 더 이상 고려왕실이 족내혼을 통해 권력누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안정적인 왕권을 일궈냈다고 볼 수 있다.

현종 이후에도 고려왕실의 족내혼의 전통은 계속 이어지는데, 고려 제 16대 왕 예종 때까지도 사촌 이내의 가까운 혈통끼리의 족내혼이 성행했다. 그 이후 족내혼끼리의 촌수가 점점 멀어지더니 원 간섭기에 이르게 되면서 대부분 촌수가 8촌을 넘어가 사실상 족내혼의 의미는 크게 퇴색된다. 또한 고려 제 26대 왕 충선왕은 즉위년의 하교에서 "원나라 세조의 성지를 어기는 족내혼을 마땅히 금하여 이를 어기는 종친이 있으면 논죄할 것인즉, 마땅히 종친은 재상을 지낸 집안의 아들, 딸과 혼인할 것이다"라고 말해 고려왕실의 족내혼을 엄격하게 금했다.

역사적으로 천추태후는 외사촌오빠인 경종에게 시집가서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은 성종의 뒤를 이어 고려 제 7대 왕 목종이 된다. 조카와 삼촌이 결혼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동서지간이 되며 이복남매가 결혼하는, 현대인의 윤리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혼인풍습이 500여년 전 고려시대까지는 왕실을 중심으로 빈번하게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족내혼의 풍습 뒤에는 집단의 권력을 유지해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다지려는 집권세력의 의도가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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