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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떴> 프로레슬링에 한 수 배워라

[책갈피] 롤랑 바르트 <프로레슬링을 하는 세계> 중에서

등록|2009.01.14 14:50 수정|2009.01.14 14:50
프로레슬링이 천한 스포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프로레슬링은 스포츠가 아니라 구경거리이다. 그러므로 레슬링에서 재현하는 고통(Douleur)을 구경하는 것은 아르놀프나 앙드로마크의 괴로움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한 것이 아니다.

물론 정규 스포츠라는 불필요한 외양을 지니고 큰 비용을 들여 경기를 하는 가짜 프로레슬링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재미가 없다. 부적절하게도 아마추어 레슬링이라고 불리는 진짜 프로레슬링은 이류급 경기장에서 경기를 하는데, 그곳에서 관중은 교외 영화관의 관객들처럼, 그 경기의 장관적 성격에 자신도 모르게 어울리게 된다. 그리고 나서 이 스포츠를 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프로레슬링이 조작된 스포츠라는 것에 대해 분개한다(하지만 조작된 스포츠라면 프로레슬링에서 그 천한 특징을 제거해야 할 것이다).

관중은 그 경기가 조작되는 것인지 아닌지는 전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옳은 것이다. 관중은 모든 동기와 모든 결과를 제거해 버리는 구경거리의 첫 번째 효과에 빠져든다. 즉, 관중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 - 롤랑 바르트, '프로레슬링을 하는 세계' 중에서

▲ 책표지 ⓒ 동문선


최근 SBS <패밀리가 떴다>의 방송대본이 인터넷에 공개되면서 리얼리티 논쟁이 뜨겁다. 한편에선 "어차피 제작자와 시청자가 암묵적으로 공모(피드백)해 만든 가상 현실인데 이제 와서 리얼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건 촌스럽다"며 현실론을 내세우고 반대편에선 "아무리 그래도 시트콤이 되어선 곤란하지 않느냐"며 반론을 제기한다. 양쪽 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사실 리얼리티 논쟁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미 <무한도전>과 <1박2일>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지금의 자리에 안착했고, 이들을 패러디해 만든 유사 프로그램들은 시청자들의 준엄한 검열망을 뚫기 위해 기약 없는 사투를 벌이고 있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보면서 문득 60~70년대 국민 스포츠로 전성기를 누리다 고(故) 장영철씨의 폭탄 발언(프로레슬링이 정해진 각본에 의한 쇼라고 폭로)과 80년대 들어 본격화된 프로스포츠와의 제로섬 경쟁으로 인해 거품처럼 몰락한 프로레슬링의 잔영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공교롭게도 프로레슬링의 몰락과 <패떴>의 위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리얼리티를 의심 받음으로써 기존의 대중적인 이미지도 함께 훼손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대중적 이미지란 친근감, 신선함 뿐만 아니라 일종의 신비감도 포함된다.

알고 보면, 정해진 각본을 실감 나게 연기하는 프로레슬링은 말할 것도 없고 연예인의 일상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조차 여전히 그 생명력은 신비화 전략에 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탈신비화를 표방하지만 이번 <패떴> 사태에서도 드러났듯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신비화 전략일 뿐 진정한 의미의 탈신비화는 아니다.

쇼라서 즐거운 프로레슬링

그렇다면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더이상 경쟁력을 담보할 수 없는 걸까? 어쩌면 오늘 인용한 롤랑 바르트의 글이 그 대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잘 알다시피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한마디가 걷잡을 수 없는 파문을 일으킬 정도로(상황이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당시 프로레슬링이 민족주의, 국가주의와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쇼 비즈니스에 대한 인식이 희박했던 우리의 경우와 달리 일찍이 프로레슬링의 속성을 간파하고 차별화 전략을 구사한 미국은 오늘날 전세계를 상대로 프로레슬링이란 쇼를 상품화해서 판매하고 있다.

이처럼 프로레슬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롤랑 바르트의 '프로레슬링을 하는 세계'라는 글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는 프로레슬링이 그리스 연극과 투우처럼 (시야가 확 트인) 옥외에서 펼쳐지는 장대한 구경거리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프로레슬러의 과장된 몸짓은 그리스 연극에 나오는 광대를 연상시킨다고 말한다.

오늘날 전세계인들이 미국의 프로레슬링을 즐겨 보는 이유도 경기 결과에 관심 있어서가 아니라 링(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프로레슬러(광대)들의 연기와 이를 뒷받침하는 체계적인 구성, 선역과 악역의 대립관계 등에 흥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선역과 악역의 대결 구도로 이루어지는 프로레슬링의 궁극적 목표는 선과 악의 명징한 대립을 통해 선악을 분리하고 정의(正義)를 형상화해서 보여주는 것이다(롤랑 바르트). 따라서 경기가 조작되거나 선역과 악역이 뒤바뀐다고 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다.

<패떴> 해법은 프로레슬링에 있다

이는 <패떴> 사태로 딜레마에 빠진 국내 리얼리티 프로그램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상 현실이란 틀 속에서 대중의 요구를 정확히 포착해 프로그램에 반영한다는 점에서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프로레슬링의 기본적 속성은 거의 같다.

과거 쇼 비즈니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던 시절엔 리얼리티의 결여가 프로레슬링의 몰락을 초래하기도 했지만 이젠 리얼리티를 이유로 프로레슬링을 외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마찬가지로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리얼리티가 결여되었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시청자들이 등을 돌린다고 보기는 어렵다.

<무한도전>, <1박2일>, <패밀리가 떴다> 같은 대형 오락 프로그램을 시작부터 끝까지 즉흥적인 애드립만으로 채울 수 있다고 믿는 사람도 없거니와 이번 경우처럼 방송대본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한다고 해서 쇼 비즈니스의 문제가 일거에 도덕성의 문제로 전환되는 것도 아니다.

이번에 <패떴> 시청자들이 배신감, 불쾌감을 느낀 근본적 이유는 방송대본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보다 캐릭터에 개성을 불어넣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즉흥적 애드립, 인간적인 면모까지도 치밀하게 계산된 연출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물론 방송 초기에 캐릭터를 구축하고 전체적인 줄거리를 엮어 나가려면 정해진 각본이 중요하지만 참신하고 개성적인 애드립의 향연이 되어야 할 주말 예능 프로그램에 시트콤에 가까운 정교한 대본은 과욕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뛰어난 프로레슬러는 경기 도중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즉흥적인 애드립으로 물 흐르듯 대처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질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은 정해진 각본이 아닌 출연자 개개인의 능력(순발력, 재치, 사교성, 인간성, 매력 등등)이어야 할 것이다. 전체와 부분이 조화를 이루듯 방송대본과 애드립이 조화를 이룰 때 가장 멋진 작품이 나오는 것 아닐까?

그와 함께 가족 유사성의 위험성도 경계해야 한다. 한때 화려한 액션영화로 아시아, 나아가 전세계 시장을 휩쓸었던 홍콩영화가 원작의 단물이 다 빠질 때까지 속편과 아류작을 양산하다 몰락한 것처럼 대박난 프로그램을 계속해서 모방하다 보면 나중엔 차이보다 유사성이 더 강조되는 가족 개념처럼 원작, 속편, 아류작들이 하나로 범주화되어 마침내 전체적인 생명력도 소멸하고 만다.

최근 우후죽순처럼 쏟아져나오는 비슷한 유형의 리얼리티 프로그램들로 인해 <무한도전> <1박2일> <패밀리가 떴다> 같은 간판급 프로그램들의 수명도 단축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롤랑 바르트, <현대의 신화>, 동문선,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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