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촉한 속살이 먹음직스럽네"
겨울 한낮, 아이들과 함께 연탄불에 고구마를 구워먹으며
▲ 촉촉한 속살이 먹음직스러운 군고구마. 겨울날의 간식으로 최고다. ⓒ 이돈삼
늦은 점심을 먹고 한동안 놀던 아이들이 묻습니다. "오늘은 어디 안 가냐"고. "집에만 계속 있으니까 재미없다"면서. 하지만 밖에는 비가 내립니다. 게다가 집에서 해야 할 일도 있고, 몸도 피곤합니다.
"쉬는 날은 꼭 나가야 돼?"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아빠 오늘 집에서 할 일이 있고, 또 저녁에는 가족모임이 있어서 나가야 되잖아. 낮에는 그냥 집에 있자. 너희들도 책 좀 보고…."
"알았어요."
아이들은 그래도 못내 서운한 표정입니다. 그래서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습니다. 점심 먹은 지 조금 지났고 아이들도 좋아하겠다 싶었죠.
"너희들 고구마 구워 줄까?"
"좋아요."
둘째 아이 예슬이가 화들짝 반깁니다. 그 먹성이 대단하다 싶습니다. 큰 아이 슬비는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입니다.
▲ 예슬이가 고무장갑을 끼고 고구마를 씻으려고 하고 있다. ⓒ 이돈삼
"그래요."
고구마를 직접 굽겠다는 예슬이를 데리고 보일러실 쪽으로 나갔습니다. 이번 기회에 한번 제대로 시켜먹어야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네가 직접 골라봐. 너무 큰 것은 잘 익지 않으니까 적당한 크기로 골라야 해."
"몇 개나 할까요?"
"한 스무 개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알았어요."
흙 묻은 고구마를 담아가지고 들어온 예슬이한테 다시 말을 건넸습니다.
"씻는 것도 네가 직접 해야지."
"씻는 것도요?"
"당연하지."
고무장갑을 챙겨 아이한테 끼워주고 직접 씻도록 하고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처음 해보는 일인데도 깨끗하게 잘 씻습니다. 그럭저럭 자세도 나옵니다.
"아! 손 시려워. 따뜻한 물로 해야지."
금세 다 씻더니 "한 번 더 씻어야 된다"며 또 씻습니다. 물 아깝단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 얘기 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보니 제가 씻는 것보다 훨씬 더 깨끗하게 씻었습니다.
"됐죠?"
"은박지에 싸는 것도 네가 해야지."
"예?"
"네가 다 하기로 했잖아."
"그럼 아빠는요?"
"예슬이가 다 구워주면 먹어야지."
▲ 예슬이가 은박지로 감싼 고구마를 들고 있다. 생김새가 '왕사탕'과 닮았다면서. ⓒ 이돈삼
"근데 진짜 내가 다 하네"
예슬이는 "진짜 나한테만 다 시킬 거예요?"라며 싫은 소리를 하면서도 식탁에 쟁반과 은박지를 가져다 놓고 의자에 앉습니다. 그러면서 큰 고구마는 은박지를 크게 찢어서, 작은 것은 작게 찢어서 감싸기 시작합니다.
"이거는 왕사탕이다. 이건 막대사탕…."
고구마를 은박지로 싸면서도 비닐 속 사탕처럼 양쪽으로 모양을 만들어 이름을 하나씩 모두 붙입니다.
"연탄불에 올리는 것도 네가 해야지."
"그렇게 할게요. 근데 진짜 내가 다 하네."
▲ 겨울날 따스함의 대명사였던 연탄불. 추억여행을 선사해 주는 매개체다. ⓒ 이돈삼
이번엔 은박지로 감싼 고구마가 담긴 쟁반을 아이한테 들라고 해서 연탄불 앞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곤 연탄을 덮고 있는 뚜껑을 열어주면서 불 위에 하나씩 직접 넣으라고 했습니다. 불 위에 고구마를 직접 올리는 게 재미있는지, 아니면 모든 과정을 혼자서 했다는 게 뿌듯했는지 표정이 밝아 보입니다.
"다 됐다. 이제 들어가서 하던 일 마저 해라. 나머지는 아빠가 할게."
"다 구워지려면 얼마나 걸려요?"
"어, 불이 위에 있으니까 20∼30분 걸릴 것 같은데."
아이가 들어간 이후 담배 하나 피우고 나니 벌써 고구마 익어가는 냄새가 코를 통해 전해지기 시작합니다. 순간 옛날 생각이 스며옵니다. 입 주변이 시커멓게 변하고 입술을 데우면서까지 먹던 그 군고구마가…. 연탄 뚜껑을 열어 고구마를 뒤집어 주고 잠시 방에 들어갔다 나오니 고구마 익는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뚜껑을 열어 은박지 위로 고구마를 만져보니 말랑말랑해졌습니다. 조그마한 것부터 꺼내 쟁반에 옮기고 큰 것은 또 방향을 바꿔주니 벌써 다 익었습니다.
▲ 은박지에 싸여 연탄불 위에 올려진 고구마(왼쪽)와 다 구워져 은박지를 벗은 고구마(오른쪽). ⓒ 이돈삼
은박지를 벗겨내니 훈김이 모락모락...
"얘들아! 군고구마 먹자."
"벌써 다 익었어요?"
방에 들어가서도 촉각을 연탄불에 곤두세워 놓고 있었는지 예슬이가 먼저 달려와 묻습니다.
"와! 맛있겠다. 언니, 고구마 먹게 빨리 와."
감싼 은박지를 하나씩 벗겨내니 훈김이 모락모락 묻어납니다. 고구마가 정말 맛있게 익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가끔 사 먹던 군고구마인데, 연탄보일러를 놓은 뒤로 겨울이면 어렵지 않게 구워 먹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군고구마의 맛을 익히 알고 있던 터여서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그래도 좋아합니다.
"아빠! 나는 뜨거워서 못 먹겠어. 접시에다 까서 주면 안돼요?"
"알았어. 접시 가져와라."
▲ 다 익은 고구마. 껍질을 벗기니 속살이 드러난다. 촉촉한 게 정말 맛있게 생겼다. ⓒ 이돈삼
예슬이가 접시와 포크 두 개씩을 가져오더니 사이좋게 언니 앞에도 놔둡니다. 뜨거운 고구마 껍질을 벗기니 촉촉한 속살이 드러납니다. 먹음직스럽게 보입니다. 아이들도 빨리 달라며 보챕니다.
예슬이는 "내가 한 것이어서 더 맛있는 것 같다"면서 으스댑니다. 슬비도 "군고구마가 역시 맛있다"며 까놓은 즉시 해치웁니다. 역시 고구마는 쪄먹는 것보다 연탄불에 구워먹어야 더 맛있는 것 같습니다. 장작불이나 짚불에 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연탄불에 익은 고구마의 맛이 그만입니다.
어릴 적 동치미와 함께 먹던 그 군고구마의 맛입니다. 군고구마를 먹으며 아이들에게 옛 겨울날의 아련한 추억도 함께 들려줍니다. 동치미에 곁들여 먹는 군고구마 이야기도 들려주었습니다. 예슬이는 "동치미 대신 시원한 물과 함께 먹으면 맛있다"면서 냉장고에서 물 한 병을 꺼냅니다.
차가운 물 한 모금이 군고구마로 뜨겁게 달궈진 입 안을 보호해주는 것 같습니다. 예슬이는 다음에도 고구마를 집접 굽겠다고 합니다. 탐탁치 않게 여기던 슬비도 다음엔 같이 하겠다고 합니다. 겨울비와 연탄불, 고구마가 만들어준 휴일 한낮이 아이들에게 소중한 추억의 한 편으로 남을 것만 같습니다.
▲ 군고구마를 한 입 베어물고 있는 예슬이. 군고구마 '귀신'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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