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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동네 길 걷기' 도전에 나서다

3km에 위험구간 13곳. 위험 무릅쓰지 않으면 나설 수 없는 길

등록|2009.01.22 10:50 수정|2009.01.22 10:50

보행자 도로며칠을 걸었는데 걷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날씨 탓으로만 돌리기엔... ⓒ 이현숙


나는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내가 사는 곳은 외곽 지역. 때문에 우리 아파트에는 한 시간에 한 번 꼴로 시내버스가 다닌다. 새해 들어 컴퓨터를 배운다며 부쩍 외출이 잦아진 나. 일주일 동안 버스를 타고 다니다가 최근 집까지 한 번 걸어가보는 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동했다.

버스를 타려면 육교를 건너야 하고 버스가 오기까지 추운 데서 떨고 기다려야 한다. 그 시간이면 걸어가도 집에 충분히 도착할 것 같아 용기를 내보았다. 첫날은 마스크를 갖고 오지 않아 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익힌 길이라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목표물 몇 개만 지나면 바로 아파트 들어가는 진입로라 별로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거리는 3km 정도. 그러나 신호등 구간이 두 군데인데다 곳곳에 신호등 없는 진입로가 포진해 있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30분이면 되겠지 했는데 신호 기다렸다 길을 건너느라, 또 조심해서 이쪽저쪽을 살펴보고 걷느라 40분이나 걸렸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길을 걷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차들만 '저 아줌마 이상하네' 하면서 휭하니 내 옆을 스쳐지나갔다. 그러다 걷기 시작한 세 번째 날 사건(?)이 일어났다. 걸으면서 위험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막상 당하고 나니, 언뜻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한국의 길은 자동차 중심이다. 내 후배 아버지는 지난해 들에 나가시다가 차에 치여 돌아가셨다. 인도가 없는 들길에서 사고를 당하신 것이다. 보행자 도로가 없는 차도 한 귀퉁이를 죄인처럼 몸을 움츠리고 걸어야 할 때는 후배 아버지가 생각나 무섭기도 했다. 차들은 왜 그렇게 빨리 달리는지. 나는 정식으로 내가 다니는 길을 점검해 보기로 했다.

곳곳이 진출로와 진입로, 걸어서 집에 가기 힘들다 힘들어

상가 앞 길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이 길은 상가 앞 삼거리 길로 차를 양쪽으로 주차한 가운데 길로 사람과 차가 동시에 드나들게 돼 있다. ⓒ 이현숙



수업이 끝나고 나오면 바로 마주치는 길은 삼거리. 그렇다고 도로 삼거리는 아니다. 초등학교 진입로와 길가 상가로 가는 길, 그리고 농협 주차장으로 가는 길이다. 이곳은 차가 속도를 내는 곳이 아니지만 가끔 그렇지 않은 차들이 있기 마련. 재빠르게 이쪽저쪽을 살펴가며 피신하듯 빠져나가야 한다.

이곳을 지나 200m쯤 가면 신호등이 있는 삼거리가 나오고 거기서 200m를 더 가면 아파트 진입로가 나온다. 거기서 몇 걸음 더 가면 신호등이 있긴 있는데 이번 신호등은 꺼져 있다. 그만큼 차량통행이 적어서인데 이곳도 안심하고 지나서는 안 되는 곳 중 하나다. 이런 식으로 꼽아보니 주유소 세 곳에 진출로와 진입로가 있고 타이어 상가나 카센터에도 진입로가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위험한 구간은 영동고속도로 진출로. 여기는 삼박자가 맞는 위험구간이다. 고속도로를 방금 빠져나온 차들이 속도감각이 무디어져 제법 속도를 낸다는 게 하나고, 경사진 길이라 속도내기 안성맞춤이라는 게 둘이고, 커브길이어서 도로 시설물이나 나무에 가려 차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게 셋이다.

주유소 진입로이곳 진입로는 식당과 주유소가 같이 이용하고 있다. ⓒ 이현숙




고속도로 진출로경사진 커브길이라 차들이 꽤 속도를 내 내려오는 길이다. 그럼에도 휘어진 길 특성상 또 나무들에 가려 차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잘 살펴 보다가 재빨리 뛰어가야 한다. ⓒ 이현숙




내가 경미한 사고를 당한 곳은 상가가 밀집돼 있는 구간. 내가 지나가려는데 마침 작은 트럭이 있어 잠시 서서 기다렸다가 차가 가고 난 후 건너갔다. 그런데 그때였다. 느닷없이 내 얼굴 옆을 뭔가가 내리쳤다. 분명히 내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그 바람에 안경이 흘러내렸고, 충격에 놀라 옆을 보니 차량 통행을 제지하는 바가 내려와 있었다. 부지불식간에 나는 그만 몽둥이로 한 대 얻어맞은 것이다.

갑자기 얼굴을 내리친 몽둥이, 알고 보니 가림막

사고(?)가 났던 곳이곳이 가장 복잡하고 위험했다. 주차 관리인이 머무는 가건물이 시야를 가려 가림막도 차가 드나드는 것도 잘 보이지 않아 난 그만 가림막에 한 대 얻어 맞았다. 그것도 얼굴을... ⓒ 이현숙



그러니까 주차장이었던 거다, 그곳은. 그 앞에도 뒤에도 인도는 없었고. 안경을 고쳐 쓰고 걷는데 눈앞 사물이 온통 흔들리면서 보였다. 난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거 큰일 났다 싶어서 안경을 벗어도 보고 바짝 붙여서도 써보니 그다지 큰 이상은 없어 보였다. 눈 아래 광대뼈에만 얼얼한 기운이 남아 있었고.

그때는 경황이 없었고, 또 창피해서 여기저기 둘러볼 새도 없이 왔지만 나중에 사진을 찍으면서 살펴보니 정말 복잡했다. 주차 공간과 인도 공간, 그리고 주차를 위한 차들이 들고나야 하니 정신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주차 관리인이 기거하는 가건물이 버젓이 서 있어 시야를 가리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거기서 삼거리를 지나 300m쯤 가면 마지막 주유소가 나오는데 그 주유소 앞에는 인도가 없다. 그러면 주유소 마당으로 해서 가야 하는데 그곳은 덩치 큰 트럭들이 거의 매일 차지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차도로 내려서는데 차도의 차들은 왜 그렇게 빨리 달리는지. 그냥 가면 절대 안 되고 100m 앞에 있는 신호등을 보고 있다가 신호등에 빨간 불이 들어오고 차들이 다 멈춰섰을 때 가야 그나마 안전하다.

그 구간을 지나면 또 상업지역. 이곳은 비교적 무난하다. 시야가 확보돼 있어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아파트 진입로로 쉽게 들어설 수 있다. 이제 안심해도 되나, 하면 아니다. 아직 한 곳이 더 남아 있는데, 다름아닌 아파트 건설 현장이다. 이곳은 관리인이 있지만 특별히 큰 차가 드나들 때만 나와서 정리를 하기 때문에 잘 살펴보고 가야 한다.

주유소 앞 길이 주유소 앞에는 보행자 도로가 따로 없다. 그러면 주유소 안 길을 이용해야 하는데 지금은 비어 있지만 종종 커다란 트럭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어 하는 수 없이 찻길을 돌아서 인도로 가야 한다. ⓒ 이현숙



지난해 거의 전 구간에 걸쳐 인도를 만들고 가드레일을 새로 설치하느라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로 공사를 했다. 아마도 보행자를 위한 배려였던 거 같은데, 실제로 걸어보면 아직도 곳곳에 암초가 포진해 있다는 걸 쉽게 알게 된다.

문득 우리는 점점 악순환에 빠져 드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동차가 많아지자 찻길을 만들고 그래도 부족하니까 이번엔 찻길을 넓히고, 그러다보니 차를 위한 길만 만들어져, 사람들이 걷기에는 너무 위험하다며 너도나도 자동차를 사서 몰고 다닌다. 솔직히 인도 만드는 공사를 할 때도 더러는 '걷는 사람도 없는데 길을 왜 만들어' 할 정도로 우리는 자동차에만 길들여져 왔다. 며칠 걸으면서 나처럼 걷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 정말 길이 아까울 정도였다.

자동차가 우리에게 준 것은 편리만은 아니었다. 가정 경제에 부담을 주었고 환경에도 악영향을 주었다. 편리란 얻기는 쉬워도 버리기는 힘들다. 우리가 다시 10년이나 20년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불필요한 진입로는 과감히 줄이고 도로 시설물도 보행자의 시야를 가리지 않는 방향으로 고쳐서 다시 걷기에 안전한 길로 바꾸어 나가면, 사람들의 의식도 점차 바뀌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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