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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취임 맞아 돌아본 미국 사회주의 정당사

세계 최초의 노동당에서 뉴딜시대의 쇠퇴까지

등록|2009.01.20 14:16 수정|2009.01.20 14:16
1월 20일 오전 11시 30분(한국시각 21일 새벽 1시 30분) 버락 오바마의 미국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다. 이는 8년만의 정권교체와 함께 클린턴 전 대통령 이후 이어진 민주당의 흐름이 다시 뒤바뀜을 알리는 행사이다.

미국 민주당은 한동안 '신민주당'이라는 구호 하에 중도화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2004년 경선에서 후보로 나섰다 패배한 하워드 딘 전 버몬트 주지사가 당의 전국위원장으로 선출되면서, 민주당은 풀뿌리 조직을 재정비하고 조금 더 또렷한 노선을 정립하기 시작했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도 그러한 노력 속에서 나온 하나의 결과물이다. 결국 ‘민주당내 민주당’(전통적 민주당원)이 지지한 오바마는 치열한 경합 끝에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을 꺾었다. 

공화당원 남자와 민주당원 여자의 사랑을 다룬 영화 <컨벤셔니어즈>에서, 민주당 지지자들은 스스로를 ‘좌파’, ‘좌익’라고 칭한다. 그렇다면 ‘민주당내 민주당’ 세력은 ‘좌파의 좌파’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 경향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이라크파병과 자유무역에 대해 원칙적이고 강고하게 반대했던 데니스 쿠치니치 하원의원이 꼽힌다. 그러나 미국 민주당은 물론 그 내부의 좌파가 곧 사회(민주)주의 정치세력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애초에 미국 민주당은 미국 민주당은 유럽의 좌파 정당들에 비하기 힘든 자유주의 정당이었고, 따라서 여기서의 ‘좌파’는 상대적인 의미가 강하다. 

예외의 땅에도 피었던 사회주의

그렇다면 미국에서는 왜 자유주의가 좌파의 위치를 점하고 있고 사회주의 정치세력은 약하고 부진한가? 이에 대한 답으로 미국과 유럽의 차이를 찾는 ‘미국 예외주의’ 담론이 힘을 발휘했었다.

이를테면 연방주의에 기초한 선거인단제도, 소선거구제가 소수정당을 제약하고 있는 정치적 조건, 노동자층이 자본가와 생산자로서의 산업블록을 형성하고 민족·인종·종교의 다양함이 노동계급의 단결을 저해했던 사회경제적 조건 등이 지목된 것이다. 또한 ‘합의이론’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동전의 양면으로서 미국주의를 구성하고, 진보파들도 ‘오늘과 다른 내일’이 아닌 ‘어제와 같은 내일’을 소망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그렇지만 미국에서도 분명히 사회주의 정당의 역사가 있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28년 산업화에 위협을 느낀 숙련공들과 장인들이 필라델피아에서 결성한 노동당을 세계 최초의 노동당으로 꼽았다. 남북전쟁을 전후해서는 농민공제조합원, 그린백 지폐당원, 단일과세주의자, 노동조합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 여러 진보적 흐름이 있었고, 1870년대에는 마르크스와 함께 활동하다 미국으로 이주한 조셉 위드마이어, 프레드리히 조르게 등이 주도한 최초의 전국적 사회주의정당이 등장한다. 

토속적인 토양에서 피어난 인민주의는 유럽으로부터 스며든 마르크스주의보다 훨씬 강했다. 인민주의 정치를 이끈 것은 1880년대 빈농의 이익을 대변하는 농민동맹이 노동자운동과 결합해 1892년에 만든 인민당이었다. 인민당은 영국의 독립노동당의 강령을 참조해 진보적인 정치사상을 가다듬고, 제임스 위버를 대통령 후보로 내보내 100만표를 득표하였다.

그들의 ‘토박이주의’는 미국식 진보주의의 활로를 개척하기도 했으나, 최종적으로는 사회주의 정치를 훼손하는 쪽으로 귀결되었다. 인민당과 협력하던 민주당의 클리블랜드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당의 정체성은 위협받았고, 당내나 노동조합의 우익은 진보적 색채가 완연한 오마하 강령을 1896년에 폐기시켰다. 인민당은 유진 뎁스를 위시한 노동운동가들과도 괴리가 있었으며, 그들의 인민주의는 인종주의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유진 뎁스, 1912년 대선에서 6% 득표

미국 사회주의 정당의 전성기는 사회당에 의해 찾아왔다. 가장 강성한 노조였던 미국철도조합이 발전적 해체를 한 다음 미국사회민주당을 거쳐 만든 당이었다. 사회당은 마르스크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으며 독점 폐지, 재산 공유, 노동시간 단축, 건설을 주요 정책으로 삼았다. 노동자투쟁을 지휘했던 유진 뎁스, 빌 헤이우드 등이 당내의 좌파에, 온건한 경향의 정파를 이끌던 빅터 버거, 모리스 힐퀴트 등이 당내의 우파에 해당했다.

사회당은 공화당과 민주당이 포괄하지 못한 노동자들을 껴안으며 약진해 나갔다. 1912년 대선에서 사회당은 뎁스를 내세워 6퍼센트의 득표율을 올렸다. 이 전후 사회당은 연방 하원의원 2명, 시장 70명, 선출관리 및 지방의원 1천여명을 배출하였고, 당원은 10만명을 초과했다. 

허나 사회당의 장밋빛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선 당내 좌우파간의 갈등이 당을 뒤흔들어 놓았다. 당내 우파가 헤이우드 등을 제명하면서 2만여명이 일제히 탈당했으며, 당내 좌파가 제기한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참여가 쟁점으로 떠올라 분란은 극에 달했다. 이동안 제1차세계대전 반대운동에서만큼은 최대한 당력을 모아 반대운동을 펼쳤으나, 일부 사회당원들은 전쟁에 찬성해 윌슨 대통령에게 지지를 보냈고, 당내 좌우파를 막론하고 반전운동에 나선 지도부는 방첩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하고 옥에 갇혔다.

코민테른 참여파는 사회당에서 떨어져 나간 뒤 다시 미국공산당과 공산주의노동당으로 분립되었지만 1919년 벌어진 검찰의 일제단속에 직면해 힘을 합쳤고, 외곽조직인 미국노동당을 배후에서 조종하며 암약하던 끝에 1930년 미국공산당을 결성한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분열상은 점입가경이었다. 소련공산당 숙청사태의 여파로 트로츠키파는 자신들끼리 노동자당(Worker's Party)을 꾸렸고, 부하린에 동조한 공산당 우파도 축출되었다.

주저 앉은 사회당, 우왕좌왕 공산당

사회당은 1930년대 당세를 재건하지만, 루즈벨트 정부와 민주당이 그들의 자본주의 개혁노선을 빨아 들이면서 일대 타격을 입었다. 통상적으로 1936년 대통령선거를 민족·종교적 투표패턴이 노동자 대 자본가의 대립으로 해체된 시점으로 꼽는데, 흑인들과 토박이개신교 노동자들은 사회당이 아닌 민주당을 선택함으로써 유진 뎁스가 중심이 되어 이뤘던 사회주의 정당의 약진은 무위로 돌아간다. 경기침체로 루즈벨트는 자본가계급에게 파문당하고 혁명이 일어나리라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환상도 깨어졌다.

사회당이 민주당과의 차이를 강화하지도 진보 입법을 위해 뉴딜정부와 제휴하지도 못하며 주저 앉을 때, 공산당은 코민테른을 맹종하면서 우왕좌왕하였다. 사회민주주의를 사회파시즘으로 규정한 코민테른의 방침을 그대로 수용해 루즈벨트 정부를 비난하던 그들은, 1935년 코민테른이 결정한 ‘인민전선’을 따라 루즈벨트를 지원하는 쪽으로 결정을 뒤집었다. 1944년 해산 후 공산주의정치협회로 재조직되어 국민통합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그해 대선에서는 루즈벨트를 지지하였다.

우스꽝스럽게도, 소련의 일시적인 대미 유화책을 오해하고 루즈벨트 정부에 협력하던 브라우더 공산당 당수는 소련의 지령을 받은 프랑스공산당에게 비난당하고 당내에서 축출되었다. 그리고 정부를 떠받친 보람도 없이 1948년 공산당 지도자들은 장기징역형을 언도 받았으며, 그해 대선에서는 독자 후보를 내지 못한 채 제3후보를 지지했다. 공산당은 이후 노동계의 민심을 얻지 못하는 동시에 당내 분열과 탈당사태로 외우내환에 정신 없었다.

사회당의 경우 그 명맥이 조금 더 분명하게 유지되었지만, 베트남전쟁 찬반을 두고 우파인 미국사회민주당과 좌파인 민주사회당으로 분열되었다. 그들이 국내 사회경제정책도 아닌 전쟁을 가지고 민주당내 자유주의자들과 다름 없이 분열하게 된 까닭으로는, 미국-소련간의 냉전과 1950년대 매카시즘 선풍, 소비에트사회주의의 폐해와 그것을 역이용하는 여론을 꼽을 만하다. 반공주의는 좌파블럭 내부에도 스며 들게 되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베트남개입론이 나오고 만 것이다.  

엄혹한 냉전이 아무리 미국을 사회주의의 동토로 덮어 버렸다 한들 사회민주주의나 소련으로부터 독립적인 공산당조차 제대로 피지 못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역시 CIA로 상징되는 미국 정부와 주류 사회의 악독하고 교활한 술책의 결과인가. 혹은 극복이 난망할 만큼 미국예외주의의의 뿌리가 깊은 탓인가? 남 탓과 외인으로 돌리기에는, 어쨌든 미국 사회주의 정당 스스로의 원칙 거스르기와 어리석음 그리고 무능함이 너무나 컸다. 

오바마시대, 사회주의 정치의 사다리가 될 수 있을까

최초의 흑인 대통령 당선자를 배출한 미국은 변화에의 열망에 가득차 있다. 또한 대통령선거전 당시부터 오바마에 열광한 프랑스, 독일의 시민들을 비롯 전 세계의 인류도 최강대국의 흑인 대통령 취임식에 주목하고 있다. 오바마는 아마 이라크전쟁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대외일방주의를 상당히 거두어 들이고, 경제위기를 맞아 신자유주의적 정책기조를 새로운 케인즈주의로 덮어갈 것이다. 그러나 오바마가 시카고의 유력 유대인의 후원을 받아 중앙정치에 입성했던 전력과 그가 인선한 내각과 참모진이 예상보다 보수적이라는 사실은 진보적 낙관을 훼방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전망도 결코 밝을 리 없다. 진보적인 뉴딜정책이 외려 사회주의 정치세력의 터전을 앗아갔던 역사를 되돌아 보면 더욱 그렇다.

북·서유럽은 인종문제를 앓지 않고 사회주의 정당의 집권을 경험한 반면, 미국에서는 인종문제가 지금까지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당면한 중대과제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유럽에서 미국보다 늦게 인종문제가 골칫거리가 되고 극우파까지 부상하는 오늘날, 미국은 유색인종의 증가가 불러일으킨 격변과 진보의 첫 사례로 오바마의 취임을 겪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미국의 사회주의 정치는 오바마시대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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