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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길 위에서 도사를 만나다

[내 인생의 미스터리]

등록|2009.01.23 13:38 수정|2009.01.23 13:38
17여 년 전 일이다. 군대를 다녀온 후 마땅한 일자리도 없고 삶의 방향도 확실치 않았던 때 집에 가는 시내버스 정류장이 있는 담벼락 아래에 누추한 옷차림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영락없는 노숙자 행세였지만 긴 생머리는 단정한 빗질이 되어 있었고
덥수룩한 턱수염도 멋졌다.

더구나 그의 눈빛은 걸인이 아니라는 느낌이 바로 느껴졌다. 버려진 꽁초 담배들을 주웠는지 남은 담배잎을 털어내 종이에 말고 있는 폼이 예사롭게 보이지도 않았다. 집에 가는 버스를 몇 번 보내면서도 남자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의식했는지 힐끔 보면서 웃어보이기도 했다. 왜 버스를 타지 못하고 그 남자한테 시선을 뗄 수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라도 한번 걸어보기로 하고 정류장 근처에 버려진 담배 꽁초들을 한주먹 주워들고 남자에게 내밀었다.

꽁초를 받아든 남자는 갑자기 내 신발 양쪽을 번갈아 가며 입술을 가져다 댔다. 순간 놀랐지만 독특한 인사법이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우리는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나란히 땅바닥에 앉았다.

40대 중후반으로 보였던 그는 자신을 '박도사'라고 했다. 내 질문에 대답하는 중간중간에 어려운 말들도 있어서 전체적인 내용을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그에게서 어떤 기(氣)를 느꼈다.

▲ 박도사의 친필을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 오창균


한참을 이야기하다 어떤 교감을 느낀건지 박도사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싶은 생각에 어렵게 거처를 물었고 내 가방에서 꺼내준 공책에 그는 글을 적기 시작했다. 땅바닥에 앉은 채로 글을 쓰는 손놀림은 무척 떨리고 느렸지만 글씨체가 예사롭지 않음에 감탄할 뿐이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박도사의 글씨를 보느라 걸음을 멈추고 모여 들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박도사가 써준 글씨를 여러번 읽어보며 도사를 만났다는 신기함에 들떠 있었지만 얼마간의 날들이 지나도록 그를 찾아나설 시간을 만들지 못했고 여유가 생겼음에도 쉽게 길을 떠나지 못하고 망설이게 되었다.

박도사에게 인생 철학을 배울 수 있겠다는 기대가 있었지만 혹시라도 그의 수제자가 되어 나도 산속에서 도(道)를 닦게 되는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결국 나는 박도사를 찾아가는 것을 포기하였지만 그가 써준 부적(?)을 액자에 넣어 책상 앞에 걸어놓는 것으로 예를 갖추었다.

우물안 개구리 같았던 답답한 삶이 박도사를 만난 그 해부터 전환점을 맞이하면서 다양한 세계관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현재의 삶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지금도 뭔가 범상치 않은 느낌을 받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그떄와 같은 호기심이 발동을 하지만 낭패를 보는 일들이 많은 것은 인정(人情)이 변해가는 것 떄문일까.
덧붙이는 글 '내 인생의 미스터리' 응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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