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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정부에서 자율·독립성은 한갓 사치품  정부 정책 적극 홍보 안 하면 제거대상인가"

이동걸 금융연구원장, 이임사 통해 정부 맹비난... "연구원을 마우스탱크로 인식"

등록|2009.01.29 17:42 수정|2009.01.30 10:13

▲ 이동걸 금융연구원장이 지난해 11월 5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주최 수요정책포럼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 권우성


[기사 대체 : 29일 오후 6시 40분]

임기를 1년 반이나 남겨둔 채 돌연 사의를 표명한 이동걸 한국금융연구원장이 이임사를 통해 이명박 정부의 금산분리(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 완화 등 금융규제 완화 정책을 맹렬히 성토했다.

이 원장은 29일 금융연구원 홈페이지에 "한국금융연구원을 떠나면서"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글 상단에 '이임사를 대신하여'라는 설명을 달았지만, 사실상 그의 이임사인 셈이다.

이 원장은 이 글에서 "이제 여러분을 더 이상 지켜드리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을 안고 여러분 곁을 떠나게 되었다"며 사의를 표명한 배경을 설명했다.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한갓 쓸데없는 사치품 정도로 생각하는 왜곡된 '실용' 정신, 그러한 거대한 공권력 앞에서 이제는 제가 더 이상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짐이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에 금융연구원을 떠나기로 결정했다"는 것.

"금산분리 완화 합리화 논거 만들 수 없었다"

이 원장은 이어 "연구원을 정부의 Think Tank(두뇌)가 아니라 Mouth Tank(입) 정도로 생각하는 현 정부에게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은 한갓 사치품일 수밖에 없다"고 탄식했다.

"정책실패의 원인을 정책의 오류에서 찾기보다는 홍보와 IR에서 찾는 현 정부의 상황 판단 앞에서, 잘된 것은 모두 내 탓이요 잘못된 것은 모두 네 탓이라고 보는 현 정부의 인식 앞에서, 결정은 내가 할 테니 너희들은 그저 일사불란하게 따라오기만 하라는 현 정부의 일방통행식 밀어붙이기 사고방식 앞에서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은 비판의 잘잘못을 따질 필요도 없이 현 정부의 갈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에 불과할 것이다."

그는 특히 "정부의 정책을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않는 연구원이나 연구원장은 현 정부의 입장에서는 아마 제거되어야 할 존재인 것 같다"며 "경제성장률 예측치마저도 정치 변수화한 이 마당에 그것은 아마 당연한 일일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또 "돌이켜보면 정부의 정책이 지금처럼 이념화된 적도 흔치는 않았던 것 같다"며 "적어도 우리 사회가 민주화된 이후 정책의 논의 과정이 생략되고 사고와 아이디어의 다양성이 이처럼 철저히 무시된 적도, 아니 봉쇄된 적도 흔치는 않았던 것 같다"고 비판했다.

"경제적 논리와 경험적 증거보다는 주의와 주장만 난무하는 무리한 정책, 네 편과 내 편을 가르는 정책, 모든 국민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기보다는 특정 집단에게 혜택이 집중되는 정책, 그 앞에서 사고와 아이디어의 다양성이 인정될 수가 없을 것이다. 이에 근거한 활발한 정책 토론 또한 불편할 것이다."

이 원장은 외국 금융기관 사례를 들어가며 현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금산분리 완화 정책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한 뒤, "저희 연구원으로서는, 그리고 저 개인으로서도 정부의 적지 않은 압력과 요청에도 불구하고 금산분리 완화정책을 합리화할 수 있는 논거를 도저히 만들 재간이 없다"고 토로했다. 그의 사의 표명이 사실상 이명박 정부의 압력에 의한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실제 이 원장은 "'법에 규정'된 원장의 임기를 부정하는 '법치' 정부의 이중 잣대 앞에서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해달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희생하는 대가로 연구원의 원장직을 더 연명한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자조했다.

그는 또 "재벌의 은행소유를 허용하는 은행법과 금융지주회사법 등 개정안은 금융 분야의 대운하 정책과 다르지 않다"며 "한번 국토를 파헤치고 나면 파괴된 환경을 되돌릴 수 없듯이 일단 은행이 재벌의 사금고가 되면 이를 되돌릴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운하 정책이나 금산분리 완화정책이 쉽게 포기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그 혜택이 특정 집단에 집중되기 때문인 것 같다. 특정집단의 이익이 상식을 압도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밖에 달리 결론지을 수 없는 것 같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4대강 정비 사업이라는 명분으로 삽질을 하다가 나중에 슬쩍 연결하면 대운하가 된다고들 한다. 재벌의 은행소유한도를 4%에서 10%로 올려 일단 발을 들여놓고 나서 나중에 슬쩍 조금만 더 풀어주면 되니까 이것도 닮은꼴이다."

이 원장은 전대미문의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대처에 대해서도 "거듭된 오판과 실정으로 경제위기를 키우고 있다"고 성토했다.

"좌-우, 진보-보수, 네 편-내 편, 네 탓-내 탓 가르기에 집착하다 보니 정부의 관심은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정부는 다양한 의견의 자유로운 표출과 논의를 막고 싶은 것 같다. 위기상황에 대한 판단마저도 정책적으로 왜곡되고 수시로 번복되는 것 같다. 그래서 정책대응에도 실기를 하는 것 같다."

그는 "서로 상충되는 정책이 남발되고, 위기는 점점 더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다"며 "그러니 국민들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도 커지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끝으로 연구원들에게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정부의 요구에 맹목적으로 따라서는 안 된다"며 "금융연구원의 품격을 유지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동걸 원장의 갑작스런 사의 표명으로 금융연구원 내부 분위기는 뒤숭숭한 상태다. 연구원 소속 한 박사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줄곧 이동걸 원장에 대한 직간접적인 사퇴 압박이 있었던 데에 큰 부담을 느낀 것 같다"며 "연구원이 생긴 이래 원장의 중도하차가 처음이라 다들 당혹스러워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급작스런 사임... 이명박식 코드인사 재현되나

▲ 이동걸 금융연구원장 ⓒ 권우성

이동걸 원장은 3년 임기 가운데 절반을 남겨놓고 지난 28일 돌연 사의를 표명했다. 이 원장의 사퇴로 후임 원장이 선임되기 전까지는 금융연구원은 박재하 부원장 직무대행 체계로 운영된다. 1991년 금융연구원이 설립된 이래 금융연구원장이 임기를 마치지 않고 도중에 사퇴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원장은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초기 대통령 경제비서실 행정관으로 일한 이후 10여 년간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금융정책 입안에 관여해왔고, 2007년 7월 금융연구원장에 취임했다.

금융연구원은 은행들의 출자로 설립된 민간 연구기관이지만 정부가 금융감독 정책을 고리로 은행들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정부 입김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그러나 이 원장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산업자본의 은행 소유를 제한하는 금산분리 완화 등 주요 이슈가 나올 때마다 토론회나 강연 등을 통해 현 정부의 정책기조와 다른 목소리를 내왔다.

특히 대표적인 '금산분리 완화론자'인 윤증현 전 금융감독위원장이 기획재정부 장관에 내정된 것이 그의 사의 표명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게 금융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앞서 지난 2004년 9월 금감위 부위원장이었던 이 원장은 당시 윤증현 금융감독위원장이 취임한 뒤 1개월 만에 석연찮은 이유로 물러난 바 있다.

일각에서는 지난 '1·19 개각' 이후 이동걸 원장을 필두로 또다시 이명박식 코드인사가 재현되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임사 전문] "더 이상 여러분을 지켜주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으로..."
덧붙이는 글 이동걸 원장이 올린 글 "한국금융연구원을 떠나면서"는 한국금융연구원 홈페이지(http://www.kif.re.kr/) '공지사항'의 '일반공지'란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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