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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색이 아니라 살구색입니다"

[인터뷰] 외국인노동자의 집/중국동포의 집 대표 김해성 목사

등록|2009.02.03 12:27 수정|2009.02.03 13:17
'사장님 나빠요'. 한 TV 개그프로그램에서 시작된 이 유행어는 당시 이주노동자들이 우리사회에서 겪는 현실의 어려움을 잘 풍자해 사회적으로 큰 공감과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났다. 국내 이주노동자의 수는 70만에 육박했지만, '고용허가제'의 법적 한계로 점차 늘어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와 그들을 노린 범죄, 인권유린은 해마다 늘고 있다. 범죄의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은 제대로 된 사회보장을 받지 못한다. 현장에서 다쳐도 병원치료를 받지 못하고, 심지어 타국에서 생을 마감해도 변변한 장례도 치르지 못하는 형편이다.

이런 이들을 위해 세계 최초로 '외국인 노동자 전용의원'을 개원한 이가 있다. 외국인노동자의 집/중국동포의 집 대표 '김해성 목사'다. 2004년 7월 22일 개원한 이 병원은 진료와 검사, 수술과 입원 등 모든 것이 무료다. 단, 외국인 노동자와 재중동포만 받는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위한 병원이기에 정부 지원은 없다.

햇수로 5년 째. 언론매체의 홍보와 관심으로 많이 알려져 그동안 시민들의 기부금을 기반으로 운영되던 이 병원도 경제위기와 함께 현재 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다 병원 문 닫는 거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하느님이 돕지 않겠느냐'며 넉넉한 웃음을 지어보인 김해성 목사를 만나본다.

김해성 목사고용허가제의 문제점을 설명하고 있다 ⓒ 정장희


"한 사람이라도 살리고 싶다"

- 요즘 경기가 나빠져서 무료병원 운영하는 것도 많이 힘드시겠어요.
"병원 처음 시작할 때부터 힘들었는데 요즘엔 그거보다 더 어려워요. 경제위기다 뭐다 하다보니까 한국사람 살기도 바쁜데 무슨 외국인노동자냐면서 관심이 많이 없어진 것 같아요. 시민들 기부금도 많이 줄었구요. 하지만 병원소문을 들은 이주노동자들의 수는 점점 더 많아지니까 이게 참 문제죠."

- 병원을 열기 전에도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많이 헌신하셨는데, 그런 활동들이 병원을 개원하는 계기가 됐던 건가요?
"처음에는 이 사회에서 가장 힘없는 노동자들을 위해 살자고 다짐하고 시작했어요.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그 주체가 이주노동자들로 바뀐 거죠. 분당의 한 아파트 신축 공사장 16층에서 재중동포가 추락사한 일이 있었는데요. 회사 측에선 보상금으로 2백만 원을 제시하고 유족은 8백만 원을 요구하면서 합의에 진전이 없었어요. 사고 현장에는 유족들이 그 추운 날 사무실 처마 밑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더군요. 그래서 제가 준공검사를 담당하는 성남시장과 건설교통위원회 소속 국회의원을 찾아가서 협조요청을 했구요.

며칠 뒤에 회사 측 보상금 4천만 원과 산재보상금을 합해 유족은 약 9천만 원을 수령할 수 있었어요. 그런 소문들이 퍼지면서 저를 찾는 이주노동자들과 재중동포들이 급속하게 늘어난 거죠. 그래서 설립한 것이 외국인노동자의 집과 중국동포의 집이에요. 성남에서 주민교회 목사님의 방 한 칸 서재를 빌려 상담소와 쉼터로 시작했죠. 2000년 들어서 서울 센터 창립을 계기로 경기도 안산, 광주, 양주, 발안, 곤지암 등에도 설립됐어요. 그렇게 상담소와 쉼터를 운영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이주노동자들의 어려운 사정을 더 자세히 알게 되더군요."

- 의료사고 상담이 많이 있었겠네요.
"작업장에서 일하다 발에 못이 찔린 재중동포가 있었어요. 결국 파상풍으로 죽었어요. 주사 한방 맞으면 안 죽거든요. 감기치료를 못해서 패혈증으로 사망한 이주노동자들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 장례를 치러주다 '죽기 전에 치료하면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거죠. 처음에 직원회의에서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의사가 병원을 만들어도 문 닫는데 어떻게 운영할 거냐'는 말을 들었지만 '한 사람이라도 살리고 싶다'는 제 기도를 하느님이 들으셨는지, 2004년 우여곡절 끝에 병원을 열게 됐어요."

미등록 이주노동자 양산하는 법안이 수정돼야

- 상담이나 병원운영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를 위한 법 수정운동에도 적극적이신데요.
"결국에 이런 환자들이 생기는 이유는 고용허가제가 잘못돼 있기 때문에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늘어나고, 그러다보니 사고가 나도 제대로 보상을 못 받게 되는 거예요. 예컨대 현재 고용허가제에는 이주노동자들은 작업장을 세 번 이상 바꾸면 무조건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간주하고 있어요.

그런데 작업장이 부도가 나서 한 번, 임금체불에 항의하다 사업주에게 해고돼서 두 번,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사장에게 폭행당해서 세 번.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작업장을 세 번 이동한 이주노동자들은 어쩔 거냐는 거죠. 거기다 작업장 변경신청을 할 때 사업주가 최종 승인을 하는데, 이 사람들이 안 해준단 말이에요. 겨우 승인을 받아도 2개월 내에 새 직장을 못 얻으면 미등록 신분이 되니까 또 아무 작업장이나 구하게 되는 거고. 이런 제도적 문제점들이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양산하고 있는 거라고 봐요."

- 일을 하시면서 좀 억울했던 일은 없으셨나요?
"작업장에서 사고로 사망한 재중동포가 있었어요. 그리고 유가족들이 한국에 왔는데 제가 그 때 사고를 재판에 넘기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지인들에게 모금운동을 하고 있었거든요. 유가족들이 그 돈을 달라고 하더군요. 당시에 아직 그 돈을 쓸 부분을 정하고 있어서 안 된다고 했더니, 저를 고소해 버렸어요. 결국에는 무혐의판결이 났고 모금한 돈은 다시 지인들에게 돌려드렸지만 참 그 일은 안타까웠죠.

2003년에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주는 상을 받은 날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고시원에서 화재가 발생해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거든요. 한창 소방당국이 인구밀집지역건물 내 화재예방시스템 점검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또 누군가 우리 쉼터를 고발했어요. 소방당국에 불려가서 한탄을 했죠. '아침에는 나라에서 잘했다고 상 주더니 저녁에는 잡아 가둘려고 한다'고 말이죠. 결국 소방당국에서 무료로 저희 쉼터에 화재예방 시스템을 정비해 주는 걸로 마무리 됐어요."

적극적이고 의식 있는 젊은이들 됐으면

- 청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예전에 크레파스에 '살색 없애기' 캠페인을 했었는데요. 살색이라는 게 지극히 자국인 중심적인 표현이잖아요. 백인은 흰색이고, 흑인은 검은색이 살색인데 말이죠. 그것이 크레파스를 많이 사용하는 어린 초등학생들의 인식에 내국인과 외국인에 대한 분명한 경계의식을 어린 시절부터 심어준다고 생각했어요. 결국에 이게 국가인권위원회의 동의를 받았고 결국 산업자원부에 시정권고를 해 KS인증까지 바꾸었어요. 그래서 '살색'이 '연주황색'으로 바뀌었는데요. 그 결과를 TV에서 본 제 딸들이 "아빠 뭐하는데 TV에 나와요?"하고 물어요. 그래서 제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법을 알려줬죠.

그랬더니 이 녀석들이 '연주황색'은 초등학생들이 알기에 너무 어려운 단어라면서 어린 아이들의 인권을 무시한 색깔 이름이라고 '살구색'으로 바꿔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한 거예요. 인권위원회 앞에서 피케팅도 했구요. 결국에 이게 받아들여져서 지금 크레파스에는 살색대신 살구색이 있게 된 거죠.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차별은 우리 주위 곳곳에 존재하고 있어요. 그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고쳐갈 수 있는 적극적이고 의식 있는 젊은이들이 됐으면 좋겠네요."

현재 국내 거주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잠정집계 22만 명이다. 법적인 한계로 발생한 이들은 사회보상은 고사하고 생명과 인권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한국에서 일했던 이주노동자들이나 재중동포들은 한국에서 받은 대우에 따라 고국에 돌아갈 때 친한감정을 품기도 하고 반한감정을 품기도 한다. 이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작은 친절이 큰 민간외교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캠퍼스라이프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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