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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신라왕릉을 가다.

신문왕릉과 효소, 성덕왕릉을 다녀와서

등록|2009.02.10 12:16 수정|2009.02.10 12:16
경주지역의 신라 왕릉은 현재 36기가 남아 있는데 그 중 배반동의 신문왕릉과 조양동의 효소왕릉, 성덕왕릉을 둘러 보았다.   신문왕릉은 능마을 도로변에 있는데 사천왕사지를 지나 조금만 가면 도로변에 송림으로 둘러싸여 왕릉이 보이고 이정표도 설치되어 있다. 둥근 봉토분으로서 왕릉의 호석은 태종무열왕릉 형식에서 한 단계 발전된 것이다.

신문왕릉도로번에 있어 찾아 가기는 쉽다. ⓒ 김환대


왕릉 상석왕릉 앞에는 상석이 놓여 있다. ⓒ 김환대


봉토의 아래에 벽돌 모양으로 석재들을 5단 정도 돌려쌓고, 그 위에 덮개돌을 덮은 호석에 석재를 수 십개 돌려 받치고 있다. 남쪽을 향하고 있는 석재에서 '문(門)'이라고 새겨진 글자가 있으나 마멸이 매우 심하여 알아 보기 어렵고 그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 없다.

왕릉 호석왕릉 주위로 기둥을 다 놓아 보호하고 있다. ⓒ 김환대


문자가 새겨진 호석문 자가 선각으로 새겨져 있다. ⓒ 김환대


상석이 놓여 있으나 원래 것인지 모르며, 주변의 소나무들도 이제는 예전에 비하여 많이 없어졌다. 현재 주인공이 신문왕릉이라 지정되어 있지만 효소왕릉이라는 견해도 있다.
따뜻한 날씨에 찾으면 잔디와 주변 소나무들이 잘 어울리는 곳이다. 제31대 신문왕은 문무대왕의 큰 아들로 삼국통일 이후의 국내정세를 정비하였으며, 여러 업적을 남겼다.

효소왕릉은 조양동에 있는데 현재 도로변에 한국 광고영상박물관이 있다. 주변에 철길을 넘어서면 소나무 숲에 역시나 둘러 싸여 위치해 있다. 둥근 봉토분이나 별다른 장식은 없으며, 일부 호석이 둘레에 보인다. 아무런 장식물이 벗어 역시 주인공의 진위 문제가 의심되는 왕릉이다.

효소왕릉신라 효소왕릉 별다른 특징은 없다. ⓒ 김환대


성덕왕릉은 신라의 완비된 왕릉제도를 갖추고 있다. 면석들 사이에는 탱주를 끼워 고정시켰고 탱주 바깥쪽에는 삼각형의 받침돌을 세워 두르고 있다.

성덕왕릉성덕왕릉 전경 ⓒ 김환대


이 삼각형의 사이에 십이지신상이 배치되었는데, 모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이나 파손이 매우 심하다. 그중 완전한 형상인 원숭이상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전시되어 있고, 현장에는 그나마 닭상만 머리가 남아 있다.

십이지신상십이지신상 중 닭상 ⓒ 김환대


능 앞에는 안상문이 새겨진 석상이 놓여 있고, 석인상 2구를 마주 보고 배치하였으나 한쪽은 현재 상반신만 남아 있다. 양 사방으로 석사자가 배치되어 있어 괘릉이나 흥덕왕릉처럼 볼만한 왕릉에 든다.

왕릉 석사자왕릉 주변 사방에 사자상이 남아 있다. ⓒ 김환대


석인상왕릉 주위에 석인상이 남아 있다. ⓒ 김환대


파괴된 귀부

왕릉에서 보면 정면에 조금 떨어진 위치에 능 앞에 세웠던 비석의 받침인 비대좌 귀부가 남아 있다. 원래는 비석과 비석 위에 씌웠던 이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없어지고 귀부만 남았다. 거북머리 모양 머리부터 전체적으로 파손이 매우 심하다. 앞발에는 발톱이 5개, 뒷발에는 4개가 새겨져 있다. 등에는 6각형의 등 무늬가 큼직하게 조각 되어 있다.

파괴가 심한 귀부전체적으로 파괴가 많이 심하다. ⓒ 김환대


귀갑문양과 발가락귀부의 귀갑 문양과 뒷 발가락 모습 ⓒ 김환대


그 외에도 비좌 주변에 당초문의 문양도 보인다. 신라왕릉의 귀부로는 크기가 매우 큰 편이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면 갈 곳이 매우 많은 곳 경주에는 봄이 오면 이제 많은 사람들이 답사와 관광을 즐기러 올 것 같다. 하나의 주제로 이렇게 잠시 다녀도 마음은 늘 여유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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