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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 봉사의 추억을 떠올리다

<책 읽어주는 남자>

등록|2009.02.12 10:10 수정|2009.02.12 10:10

The reader 책읽기가 하나의 의식이 된 한 여자와 남자의 이야기. ⓒ 이래

 나는 책 읽어주는 여자

내게 새로운 일이 생겼다. 아,  물론 지금 하는 일의 연장선에 있는 일이긴 하다. 난 주중에 저소득층 아이들을 가르친다. 대상은 초등학교 입학을 앞 둔 유치원생부터 초등학생까지다. 여느 방문학습 교사나 과외 교사와 다른 점이 있다면 멘토링을 겸한다는 것이다. 멘토링을 겸한다는 의미는 일반적인 학습만이 아니라 다른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도 있다는 의미다.

한글을 완전히 깨우치지 못한 아이들도 있는데 난 그 아이들에게 30분 정도씩 책을 읽어주곤 한다.  권정생님의 <강아지 똥>이나 보리 사계절 그림책인 <심심해서 그랬어>,<달팽이 과학동화>, <까막눈 삼디기> 등이 내가 주로 읽어주는 책이다. 6개월 여 책을 읽어주자 스스로 동화책을 읽기 시작한 아이가 너무 예뻐 <달걀 한개>와 <심심해서 그랬어>를 선물로 사들고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게 시작된 책읽기로 나의  영역을 넓혀서 지금은 인터넷 방송에서 책을 읽어주고, KBS WORLD에서 일주일에 한 권씩 책을 소개하기도 한다.  앞으로도 내게 생기는 새로운 일이란 바로 책을 읽어주거나 소개하는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의 바람은 눈이 침침해 책을 읽을 수 없는 노인들에게 책을 읽어주며  늙어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되살아난  책읽기 녹음 봉사의 추억

<책 읽어주는 남자>는 미하일이라는 남자와 한나라는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간염으로 길에서 구토를 하던 열다섯 살 미하일이 만난 서른여섯 살의 한나, 그녀에게 받은 도움에 대한 인사차 들른 미하일은 온몸으로  무의식중에 자기를 표현하던 한나의 몸짓에 반해 비밀스런 사랑을 시작한다.

한나는 섹스를 하기 전에 미하일에게 "꼬마야 내 꼬마야  책을 읽어줘"라는 주문을 잊지 않는다. 책을 읽어 주고 지나치리만치 깔끔하게 샤워를 하고 서로의 몸을 탐하며 사랑을 나누는 것이 그들 만남의 절차로 굳어진다.  8개월가량 이어지던 그들의 밀애는 한나가 돌연 사라짐으로 끝이 난다. 법대에 입학한 미하일이 나치에 협력한 전범들을 재판하는 재판정에서 나치 친위대로 감옥의 감시원이었던 한나의 과거를 알게 된다.그녀가 유죄임을 인정하면서도 심중에서 유죄 판결을 내리지 못하던 미하일은 그녀에게서 의식적으로 멀어지며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는다. 그러나 미하일은 자신은 결코 한나와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미하일은 죄인을 사랑한 자신 또한 유죄라는 생각으로  18년간 책을 읽어 녹음테이프에 담아 보내는 것으로 자신의 사랑을 책임지기로 한다. 감옥에서 한나는 미하일이 녹음해서 보내 준 테이프를 통해 글자를 깨우치게 되고 짤막하게나마 편지를 써 보내기도 한다.  모범수로 출옥을  앞 둔 한나는 출옥 전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녀의 유품 속에서 자신의 고등학교 졸업식 사진이 담긴 낡은 신문을 본 미하일은 한나가 단 한 순간도 자신을 가슴에서 밀어내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나는 16년 전 시각장애인을 위한 녹음 봉사를 8개월 정도 했다.  당시는 정말 절실하게 세상을 위해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었고 그래서 찾은 일이 시각장애인을 위한 책읽기 녹음 봉사였다. 내가 하는 일은 일주일에 한 번 시각장애인복지관에 가서 <동의보감>을  읽어 테이프에 녹음하는 것이었다. 혼자 시간이 되는 대로 책을 읽어 테이프에 녹음을 하고 돌아오면 되는 일이었다.

8개월여 가 지난 후, 난 부끄럽게도 책 한 권을 다 끝내지 못하고 일을 핑계로 봉사를 흐지부지 그만두었다.  일도 일이지만 자원봉사라는 한계도 있었고 부족한 책임의식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처음엔 목에 걸린 가시처럼 이따금 앙금처럼 남아 나를 옥죄이던  죄책감이 점차 희미해지더니  어느 순간 내게서  아주 사라졌다.

그런데  18년간  책을 읽어준  한 남자의 이야기가  잠시 책을 읽어주다가  슬며시 팽개쳐버린 지난 날 나의 무책임과 무심함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때 지속적으로 책을 읽어 녹음을 했더라면, 아니 책 한권이라도 끝냈더라면  내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건네져 책의 세계, 글이 펼치는 무한한 빛과 신비의 세계로  캄카만 누군가를 이끌었을런지도 모르겠다. 까막눈 한나가 녹음 테이프를 들으며 한자 한자 축자 대조법으로  마침내 글자를 익혔듯이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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