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꿀 파는 청년과 함께 컨테이너에서 하룻밤

[우즈베키스탄 도보횡단기 33] 도보여행 33일(19라지스→바크말소이)

등록|2009.02.16 17:49 수정|2009.02.16 18:07

19라지스 마을왜 여인들이 모여있을까 ⓒ 김준희


새벽 6시가 되기도 전에 잠에서 깼다. 이 집의 가족들은 이른 시간부터 바쁘게 움직인다. 내 옆에서 함께 잠들었던 할아버지는 어디로 나갔는지 보이지 않고, 어린 아이들도 밖으로 나간 것 같다. 집은 텅 비었다. 모두 어디 갔을까?

나도 일어나서 짐을 꾸리고 출발할 준비를 했다. 마을 한쪽에서 노랫소리 같은 것이 들려온다.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카메라를 들고 그쪽으로 가보았다. 마을의 성인남성들이 10여명 모여있다. 오늘은 월요일인데 함께 모여서 일주일의 시작을 알리는 기도라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때 어제 날 재워주었던 할아버지가 나를 보고 내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손짓발짓으로 물어보았더니, 할아버지는 한쪽에 있는 집을 가리키면서 두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한다.

도보여행하는 동안 '두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동작을 여러차례 보았다. 이 동작은 일반적으로 무언가를 끝낼 때 사용한다. 원래는 무슬림들이 기도를 마치고 일어설 때 사용하는 동작이다.

그런데 기도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이런 동작을 많이 한다. 식사를 끝낼 때도 그렇고, TV에서 보던 축구경기가 끝날 때도 이런 동작을 한다. 할아버지의 표현에 의하면 무언가가 끝났다는 이야기다. 마을에 모여서 함께 기도하던 시간이 끝났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마을 한쪽의 집으로 향했다. 그집의 앞에는 여인들이 모여서 기도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기도하다가 감정이 격해져서 단체로 울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집안으로 들어가서 방문을 열고 나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방에서도 여인들이 모여서 기도하며 울고있다. 그리고 방 안쪽에는 시신 한구가 누워있다. 맙소사, 이 집에서 상을 당했구나. 그래서 마을의 남녀들이 모두 모여서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시신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시신은 염도 하지 않고 관에도 들어가지 않은채 단정한 옷차림으로 마치 잠든 듯이 누워있다.

아까 할아버지가 '끝났다'라는 동작을 했던 것은 바로 사람이 죽었다는 의미였다. 할아버지는 사진 찍어도 괜찮다면서 그 시신 옆에 앉는다. 나는 마음속으로 갈등하고 있다. 상 당한 집에 와서 울고있는 여인들을 보면서 사진찍는 것이 결례가 될 것 같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도보여행의 기록에 이 장면도 남겨두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나는 우선 망자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올리고, 사진을 몇장 찍고는 그 집을 나왔다. 이른 새벽부터 마을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던 것이 이제서야 이해가 된다. 마을에 안좋은 일이 생겼는데 낯선 이방인이 오래 머물어서 좋을건 하나도 없다. 할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나는 할아버지가 내주는 녹차를 몇모금 마신 뒤에, 감사의 인사를 하고 출발했다.

작은 마을을 떠나서 다시 지작 가는 길로

지작 가는 길황무지가 펼쳐진다. ⓒ 김준희


지작 가는 길거리에서 사과를 팔고 있다. ⓒ 김준희


다음 목적지인 지작까지 그렇게 많이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느낌으로는 내일 중으로 지작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도보여행도 어느덧 후반으로 접어든 것이다. 머릿속에서는 아까 본 시신의 모습이 떠나지 않는다. 왜 그 장면을 보고 나는 그렇게 놀랐을까. 단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라서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나의 본능이 그 모습을 안좋은 징조로 해석해서 움츠러들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특유의 소심함이 또 고개를 든 것이다. 길 양옆으로는 황무지가 펼쳐진다. 황무지를 지나면서 사과를 파는 상인들이 주욱 늘어서 있다. 나는 사과 5개를 1000숨(1숨은 한화 약 1원)에 사서 가방에 넣고 계속 걸었다.

어제 저녁부터 아무래도 하늘의 상태가 좀 안좋았는데 결국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진다. 우산을 꺼낼까 말까. 우즈베키스탄의 비가 산성비는 아닐텐데 조금 맞아도 괜찮을 것 같다. 그렇게 걷다가 길가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비도 피하면서 뜨거운 녹차 한잔 마시기 위해서다.

"녹차랑 빵 주세요!"

따뜻한 녹차를 천천히 마시는데 비가 그칠 생각을 안한다. 물론 우리나라처럼 많은 양의 비가 쏟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냥 맞고 걸어도 괜찮을 정도의 가랑비다. 갈등이 일어난다. 비가 그칠 때까지 여기서 쉴까 아니면 출발할까.

"보드카! 보드카!"

다른 탁자에 앉아있던 현지인들이 나를 부른다. 오후 3시인데 이들은 식당에서 토마토 샐러드와 빵을 안주삼아서 보드카를 마시고 있다. 나는 걸어가야 하니까 마시면 안된다고 했지만 소용없다. 억지로 한잔을 따라주더니 마시라고 권한다. 식당주인도 비가 오니까 여기서 자고 내일 가라고 권한다.

또 갈등이 생긴다. 오후 3시인데 벌써 걷기를 끝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빗속을 걷는 것도 좀 망설여진다. 만일 이곳을 떠나서 걷다가 잠잘 곳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비가 오는데 그런 상태로 밤을 맞이한다면 그거야말로 최악이다. 오늘은 이래저래 갈등의 연속이다.

조금 생각하다가 나는 계속 가기로 마음 먹었다. 우산을 쓰고 걸으면 괜찮을 거다. 받은 잔은 마땅히 참고 비워야 하는 법. 나는 그때까지 안마시고 놓아두었던 보드카 한잔을 들고 '원샷'했다. 그러자 현지인들이 감탄사를 내뱉으며 웃는다. 뭐 이정도 쯤이야.

식당에서 보드카 한잔을 마시고

거리의 식당에서보드카 한잔을 원샷했다. ⓒ 김준희


나는 다시 거리로 나와서 식당의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걷기 시작했다. 경찰 검문소가 나오고 그곳을 지나자 고갯길이 보인다. 길 양쪽으로는 아무것도 없다. 저 고개를 넘어가 보자. 그러면 마을이던 식당이던 뭔가가 보일 것이다. 비때문에 한손에는 우산을 들고 고개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앞에서는 강한 바람이 불어온다.

나는 비바람과 맞서 싸우면서 고개를 걸어올랐다. 시간은 어느덧 5시. 빨리 잘곳을 찾지 못한다면 정말 피곤한 밤을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드디어 고개의 정상에 올랐다. 식당이나 마을은 보이지 않고 앞에는 황무지 사이로 뚫린 포장도로 뿐이다.

도로의 한쪽에는 무슨 병을 잔뜩 진열해놓고 있다. 그 옆에는 컨테이너가 한대 놓여져 있다. 여기서 장사하면서 생활하는 사람이 있나보다. 나는 그쪽으로 걸어가 보았다. 때마침 컨테이너 문이 열리고 젊은 남자 한명이 그 안에서 나온다. 나는 더듬거리는 러시아어로 말했다.

"여기가 당신 집이에요?"
"예"
"걸어서 타쉬켄트까지 가는 여행잔데, 여기서 하룻밤 잘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는 흔쾌히 나를 맞아준다. 그는 올해 30세이고 이름은 자수르벡이다. 반가운 마음에 급하게 컨테이너로 오르려다가 발이 미끄러졌다. 쿵! 정강이가 쇠기둥에 부딛히면서 엄청난 통증이 척추를 타고 오른다. 여태까지 조심해왔는데 결국 여기서 다치고 마는구나. 정강이에 생긴 상처에서 피가 나오더니 순식간에 부어오른다.

나는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가서 생수를 꺼내 상처를 씻고 약을 발랐다. 통증은 참으면 되니까 상처가 덧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도보여행하면서 다리를 다치다니 이렇게 멍청한 경우가 어디 있나.

컨테이너에서 생활하는 청년을 만나다

도로에서 만난 청년 자스루벡진열해둔 벌꿀을 팔며 컨테이너에서 생활한다. ⓒ 김준희


컨테이너 안에는 작은 침대가 두개 있다. 컨테이너 밖에는 커다란 가스통이 있고 거기서 가스를 연결해서 안에서 음식을 조리할 수 있게 해두었다. 자스루벡은 8살된 아들이 있다고 한다. 처자식은 모두 지작에서 생활하는데 자신은 돈벌이를 위해서 이곳에 나와 있는 것이다.

밖에 진열해둔 것은 벌꿀이다. 큰거 한통에 1만숨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꿀 한통에 얼마더라.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생각나지 않는다. 여기 꿀은 깨끗한 자연에서 채취한 천연 벌꿀이라서 훨씬 몸에 좋을 것이다.

자스루벡은 컨테이너 한쪽에 놓여진 물통에서 물을 받더니 녹차를 끓였다. 그는 녹차에 꿀을 한 수저 넣으면서 마시라고 권한다. 비맞고 걸어오느라 지친 몸에, 도착하자마자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꿀이 들어간 녹차를 마시면 기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내가 가진 음식들을 꺼냈다. 아까 산 사과와 전통빵, 그리고 생수도 있다.

우리는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대화했다. 내 형편없는 러시아어 실력 때문에 많은 대화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쉽다.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바크말소이'라는 지역이란다. 여기서 지작까지는 25km 정도 남았다. 빠르면 내일 오전중에 지작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밤이 되자 자스루벡은 밖에 진열해두었던 벌꿀들을 안으로 들이기 시작한다. 나도 함께 거들었다. 1/3 가량만 안으로 들이고 나머지는 그냥 밖에 진열해 둔단다. 그래도 괜찮을지 의문이다. 자고 있는 사이에 누가 집어가도 아마 모를텐데.

그 와중에도 비는 계속 내린다. 작은 컨테이너 내부는 조용하고 아늑하다. 컨테이너 지붕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면서 밤을 보내게 생겼다. 오늘은 여러가지로 인상적인 하루였다.

컨테이너 내부에서자스루벡이 음식을 준비한다. ⓒ 김준희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