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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평 삼지천 마을은 고씨들 못자리네

[정월 대보름의 전남 담양 창평 슬로 시티 체험] ④고가 체험

등록|2009.02.17 09:46 수정|2009.02.17 09:46
장흥 고씨들이 삼지천 마을에 터전을 잡게 된 경위

▲ 창평현이 있던 자리에 창평면사무소가 들어섰다. ⓒ 이상기


장흥 고씨들이 전남 담양 창평 삼지천에 터를 잡은 것은 임진왜란 전후이다. 의병장으로 알려진 제봉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이 두 아들 고종후와 고인후를 데리고 김천일, 유팽노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곳이 이곳 담양이다. 고경명은 1590년 가을 동래부사가 되었으나 1591년 여름 파직되어 광주로 돌아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듬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전국이 전쟁터로 변하고 말았다. 고경명은 5월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기 위해 북쪽으로 진군하게 되었다. 이들은 전주, 여산, 황간을 거쳐 7월 금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경명 고인후 부자는 이곳 와평(臥坪: 눈벌)에서 왜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고경명의 시신은 화순현 흑토평에 묻히게 되었고 고인후의 시신은 창평현 수곡리에 묻히게 되었다.

학봉(鶴峰) 고인후(高因厚: 1561-1592)가 창평에 묻히게 된 것은 처가인 함풍이씨가 창평에 세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인후는 32세의 나이로 죽었지만 함풍 이씨와의 사이에 이미 부림, 부천, 부즙, 부량 네 아들이 있었다. 이들이 창평에 터를 잡고 살면서 장흥 고씨들이 퍼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창평 삼지천 마을에 살고 있는 고씨들은 모두 고인후의 후손이다.

삼지천 마을의 문화와 문화유산

▲ 등록문화재가 된 삼지천 마을 돌담길 ⓒ 이상기


삼지천의 현재 행정구역 명칭은 삼천리이다. 삼천(三川)이란 월봉산에서 시작한 월봉천(月峰川)과 운암천(雲岩川) 그리고 유천(柳川)이다. 이들 세 갈래 하천물이 모인다고 해서 삼지천이 되었고, 삼지천이 줄어 삼천리가 된 것이다. 삼천리는 현재 상삼천과 하삼천으로 나누어져 있고, 이곳에 45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삼지천 마을은 동쪽에 월봉산, 남쪽에 국수봉이 자리한 길지로, 봉황이 날개를 펴 감싸 안은 형국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들이 넓고 평화로운 기운이 동네에 가득하다. 삼지천 마을의 농경지 분포를 보면 논이 밭의 네 배나 된다. 그러므로 쌀 생산이 많았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웠던 것 같다. 그 때문에 기와집 같은 전통 가옥들이 많이 지어졌고 마을 분위기 역시 평화로웠을 것이다.

현재 삼지천 마을의 트레이드 마크는 복개한 하천을 따라 만들어진 돌담길과 그 안에 지어진 전통 가옥들이다. 이들 옛 담장과 고가는 현재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마을 전체의 돌담길은 등록문화재이고, 고재선 가옥, 고광표 가옥, 고정주 가옥은 전남 민속자료이다. 이들 외에 남극루가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고재선 가옥

▲ 고재선 가옥의 연못 태당 ⓒ 이상기


고재선 고가는 마을의 동쪽에 위치한다. 금계(錦溪) 고재선이 1915년 지었다. 안채를 중심으로 사랑채와 문간채가 있고 다른 한쪽으로 헛간이 있다. 대문은 3칸의 맞배지붕이다. 평대문의 가운데 칸을 중심으로 양쪽에 방이 한 칸씩 있다. 이들 문간채에는 대개 하인이나 행랑어멈이 거주했다.

안채는 일자형의 기와집으로 전통 주거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915년 다시 지으면서 문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장치를 제거해 전통기법의 일부가 사라졌다. 앞마당 한쪽에는 장항아리가 놓여있고 사랑채와 구별하기 위해 낮은 담이 쌓여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중문으로 연결된다.

사랑채는 고재선 가옥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 역시 일자형으로 오른쪽 두 칸 앞에 마루를 들였다. 그리고 사랑 마당의 동북쪽으로는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었다. ‘태당(苔塘)이란 이름의 이 연못에는 과거 한때 물고기가 노닐고 꽃이 피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물이 없어 쓸쓸하기만다. 집이라는 것은 사람이 살면서 함께 호흡해야 하는데 사람도 없고 물도 없어 아쉽기 이를 데 없다.

고광표(고재환) 가옥

▲ 고광표 가옥의 안마당 ⓒ 이상기


마을광장에서 남쪽으로 곧게 뻗은 돌담길을 따라 가다 정자 못 미쳐 오른쪽으로 10m정도의 안길이 이어진다. 이 길을 따라가면 5칸의 문간채가 나오는데 왼쪽 끝 한 칸을 대문으로 만들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벽돌 담장을 쌓아 대문에서 안채가 들여다보이지 않게 했다.

이 담장을 지나면 넓은 안마당을 가운데로 안채, 사랑채, 삼칸채, 문간(곡간)채가 마당을 에워싼 ㅁ자형식이다. 가옥의 중심은 안채이다. 정면 6칸, 측면 1칸에 전후좌우에 툇마루를 갖춘 아주 격식 있는 집이다.

사랑채는 아담한 정원이 가꾸어진 마당을 가운데 두고 대문 왼편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안사랑과 바깥사랑, 2개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안사랑채만 남아있다. 사랑채는 네모기둥을 가지런히 세운 정면 5칸, 측면 1칸에 전후 툇마루가 있는 우진각 지붕 집이다.

고광표 가옥은 1925년 그의 아버지인 고하주에 의해 지어졌다. 전통적으로 대농의 자손이었던 고광표(1908-1997)는 이 집에 살면서 창평상회를 만들어 창평 지역의 상권을 장악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현재는 그의 아들인 고재환의 소유로 되어 있다. 이 가옥은 창평의 고가 중 그 짜임이 가장 우수하고 보존상태 역시 좋다.

고정주 가옥

▲ 솟을3문으로 된 대문에 이르는 돌담길 ⓒ 이상기


춘강 고정주 가옥은 전남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ㄷ자형 고택이다. 양반가가 갖추어야 할 구성요소인 문간채, 사랑채, 중문간채, 안채, 사당, 곡간 등을 잘 갖추고 있다. 남서측에서 솟을3문을 통과하면 바깥사랑채와 안사랑채가 나온다. 그 뒤로 안채와 곡간채가 위치한다. 그리고 사당은 안사랑채 동편에 조금 떨어져 자리한다.

안채 상량기록을 통해 우리는 이 건물이 1913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육효당이라는 당호가 있는 바깥사랑채는 네 칸 집으로 전후에 툇마루가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고정주 가옥은 전체적으로 관리가 잘 안 되어서인지 퇴락해 보인다.

이 집을 지은 고정주(1863-1933)는 창평지역 근대교육의 창시자이다. 영학숙과 창흥의숙을 만들어 인재를 양성했을 뿐 아니라 이들 토대로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창흥의숙을 나와 성공한 인물로는 지난 회에 언급한 인물들 외에 보사부 장관을 지낸 고재필, 산업은행장을 지낸 고정석, 국회의원을 지낸 김홍용 형제들이 있다. 김홍용 형제들은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의 외삼촌이라고 한다. 

고재욱 가옥

▲ 고재욱 가옥 안채와 마당의 소나무 ⓒ 이상기


고재욱 가옥은 민속자료와 같은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앞에 언급한 고가에 못지않은 가치를 지녔다. 조선 후기의 전통적인 사대부 가옥으로 심강 고재욱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살았다. 고재욱은 이곳에 살면서 고하 송진우의 동지이자 후견인으로 뜻을 같이 했다고 한다.

서쪽으로 나 있는 문을 들어서면 벽돌담이 있고 이 담을 돌아가야 안마당이 나온다. 안마당의 북쪽으로 안채가 남향을 하고 있고 동쪽으로 사랑채가 있다. 안채 앞으로 마당에는 키가 작은 소나무가 심어져 있고, 마당 끝에는 키가 좀 더 큰 소나무와 영산홍 등 꽃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이곳 안채에는 반 한국 사람인 독일인 베르너 잣세(Werner Sasse) 교수가 살고 있다. 베르너 잣세 교수는 현재 한양대학교 석좌교수로 화요일과 수요일에 안산캠퍼스에서 수업을 하고 나머지 5일은 이곳 창평에서 생활한다고 한다. 전에 한두 번 만난 적이 있던 베르너 잣세 교수와는 정말 우연히 이곳에서 다시 만났고 약 1시간 반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회에 소개하겠다.
덧붙이는 글 슬로 시티 창평 삼지천 마을 홈페이지는 http://www.slowco.co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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