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무서워서 아기 못 가져"
유산 두 번의 아픔이 가져온 임신 공포증
아내가 유산을 했다.
이번이 세 번째 임신이었다. 첫 번째 임신 때 실패하고 많이 울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는데, 병원에서 계류유산 판정을 받고 그 다음날 수술대에 올랐다. 고창에서 살던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올라왔다.
나를 보고 반가워하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이 비춰졌다. 내가 수술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긴장한 아내를 더 잘 위로해 주었어야 했는데, 자꾸 삐죽대는 말을 하는 통에 나도 모르게 같이 화를 내고 말았다. 의도는 분명히 아니었는데 말만 따라가다 보니 서로 싸우는 일이 생긴다. 그때는 더더욱 불안한 심기가 싸움을 부추겼다. 결국 화해하게 된 것은 수술받기 직전에 나의 급사과로 이루어졌다.
“미안해”
“…….”
“다음에 건강한 아기 나오려고 그러는가봐.”
“그럴까. 정말?”
수술을 받으면서 무던히 떨다가 잠이 들었을 아내. 30여분정도 뒤에 간호사가 안내해준 회복실에 환자복차림으로 눈만 겨우 뜨다시피한 그녀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웅얼거렸다. 뭐라고? 우어아아나커. 뭐 거의 이런 수준으로 들리니 대화가 불가했지만, 대충 이 시점에 나올 말들을 미루어 짐작하고 있기에 성의껏 대답해 주고 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약간 어눌하지만 분명한 발음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고 무사히 수술이 끝났음에 안도하고, 한생명의 사그라짐에 대한 애도와 미래에 대한 기원을 하며 손을 맞잡았다.
두세 달 지나서 임신 사실을 알고 초기에 신경도 많이 쓰였다. 3~4주차부터 2주마다 한번 씩 병원 가서 검사받고, 안정기가 되자 한 달에 한번, 그리고 입체 초음파와 기형아 검사 등을 받았다. 한 번 병원에 가면 3만~4만원이 나왔다. 부가적인 검사나 예방주사 등을 맞으면 한 달에 십만원이 훌쩍 넘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뱃속에 들어있는 아이에게는 아무래도 검사 자체가 스트레스가 될 듯 한데 특수한 장비를 통해서 아이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는 것은 아무래도 부모의 만족을 위해 너무 못 볼 것까지 들여다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비용도 만만치 않아서 너무 상업적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임신 중후반기에 하는 기형아 검사의 경우엔 이미 장기와 손가락 발가락까지 형성된 아기의 유전자를 엄마의 혈액으로 검사해서 만약 기형아일 가능성(절대 확정이 아니다, 가능성이 높다고 나오면 양수검사를 받아서 더 높은 확률인지 확인하는 검사를 받는다)이 있고 그 확률이 높다고 하면 중절을 노골적으로 권유한다.
도대체 왜 이런 검사를 하나 싶었다. 의사의 경우엔 정상아가 아닌 경우엔 부모가 앞으로 힘들어질 것이라며 주변의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지만, 듣는 나의 경우엔 생명의 소중함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한 인간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다는 오만함으로 느껴졌다.
결국 다운증후군 수치가 꽤 높게 나왔음에도 우리 부부는 양수검사를 하지 않겠다고 결정했고, 의사는 우리의 결정에 인상을 그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출산을 돕는 병원이 아닌 검진만 하는 곳인 데다가, 우리는 그런 의사의 태도가 못마땅하여 병원을 옮겼고 아이를 낳는 곳은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가까운 전주 산부인과로 정했다.
서울에서 전주로 옮겼는데, 예정을 한 달이나 앞둔 시점에 양수가 터져서 성모병원 응급실에서 진료와 처치를 받고, 그곳에서 나올 때까지 대기하라는 권유를 무시하고 그날 마침 쉬고 있던 친구의 차를 빌려서 전주까지 달렸다. 낳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비용도 중요하고 환경도 무시할 수 없었다. 산후조리원도 예약을 해 놓은 상태였다.
낳는 때까지 속을 썩이고 나온 아들은 예정보다 무려 4주나 앞당겨서 나왔지만 3kg정도의 평균체형이었고 놀라울 속도로 잘 자라서 현재 누가 보든 건강하고 튼튼한 22개월 유아로 성장해 있다.
아기를 기르면서 둘째를 가질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많이 해왔지만 아내는 지금의 튼튼한 아들 하나도 감당하기 힘들다는 하소연을 했다. 그러나 한 달여 전에 생리가 늦어진다고 테스트 해본 임신테스트기에서 두 줄이 나오자 오히려 기뻐하며 이번엔 스트레스 안 받고 태교 잘 해보겠다고 했다. 그런 아내를 바라보는 내 모습도 행복했다.
하지만 엄마가 준비가 덜 된 것인지 아니면 아빠가 준 ‘씨앗’이 부실한 것인지 몰라도 4주째 하혈이 시작되고 산부인과에서 ‘절박유산’을 판정하고 안정을 요구했을 때 우리 부부는 불안에 몸을 떨었다. 때맞춰 동네에 물도 나오지 않는 사태로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졌다.
내가 직장을 다녀 주말에 병원에 들렀는데 결국 ‘계류유산’ 판정을 했다. 당일 먹은 것이 있어서 수술이 안 된다고 비우고 다음날 수술을 예약하고 왔다. 의사의 말이 떨어지기 전부터 울었을 아내는 나를 보자 무너지면서 흐느꼈다. 차에다 아이를 재우고 나온 나는 그 모습을 보자 가슴 한구석이 저리게 아팠다. 애써 태연한 척 다음에 더 건강한 아기 낳으려고 그러나 봐. 울지 말라고, 다른 산모들이 불안해하지 않겠느냐며 위로 반, 강요 반 하며 손을 잡고 나왔다.
“세 명 중 두 명은 이 시기에 유산을 한대.”
“…….”
“걱정하지 마. 또 가지면 되지.”
마치 곳간에 쌓아둔 종자를 밭에 풀어놓듯이 나는 이야기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자신이 없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아이가 혼자 노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기 그지없다. 이웃한 또래라도 있으면 모르겠지만, 이곳 시골에서 또래 아이를 찾자고 하면 최소한 30km는 이동해야 한다.
“나. 이제 아기 안 가질래.”
“왜, 그래?”
“이제 무서워.”
임신을 두려워하는 아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두려움을 더 잘 다룬다고 생각하는 내가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우기다가 괜히 또 유산이라도 하면 그 충격은 어떨지 걱정이 앞선다.
철모르는 아들은 엄마 젖을 붙잡고 부벼댄다.
이번이 세 번째 임신이었다. 첫 번째 임신 때 실패하고 많이 울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는데, 병원에서 계류유산 판정을 받고 그 다음날 수술대에 올랐다. 고창에서 살던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올라왔다.
“미안해”
“…….”
“다음에 건강한 아기 나오려고 그러는가봐.”
“그럴까. 정말?”
수술을 받으면서 무던히 떨다가 잠이 들었을 아내. 30여분정도 뒤에 간호사가 안내해준 회복실에 환자복차림으로 눈만 겨우 뜨다시피한 그녀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웅얼거렸다. 뭐라고? 우어아아나커. 뭐 거의 이런 수준으로 들리니 대화가 불가했지만, 대충 이 시점에 나올 말들을 미루어 짐작하고 있기에 성의껏 대답해 주고 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약간 어눌하지만 분명한 발음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고 무사히 수술이 끝났음에 안도하고, 한생명의 사그라짐에 대한 애도와 미래에 대한 기원을 하며 손을 맞잡았다.
두세 달 지나서 임신 사실을 알고 초기에 신경도 많이 쓰였다. 3~4주차부터 2주마다 한번 씩 병원 가서 검사받고, 안정기가 되자 한 달에 한번, 그리고 입체 초음파와 기형아 검사 등을 받았다. 한 번 병원에 가면 3만~4만원이 나왔다. 부가적인 검사나 예방주사 등을 맞으면 한 달에 십만원이 훌쩍 넘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뱃속에 들어있는 아이에게는 아무래도 검사 자체가 스트레스가 될 듯 한데 특수한 장비를 통해서 아이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는 것은 아무래도 부모의 만족을 위해 너무 못 볼 것까지 들여다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비용도 만만치 않아서 너무 상업적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임신 중후반기에 하는 기형아 검사의 경우엔 이미 장기와 손가락 발가락까지 형성된 아기의 유전자를 엄마의 혈액으로 검사해서 만약 기형아일 가능성(절대 확정이 아니다, 가능성이 높다고 나오면 양수검사를 받아서 더 높은 확률인지 확인하는 검사를 받는다)이 있고 그 확률이 높다고 하면 중절을 노골적으로 권유한다.
도대체 왜 이런 검사를 하나 싶었다. 의사의 경우엔 정상아가 아닌 경우엔 부모가 앞으로 힘들어질 것이라며 주변의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지만, 듣는 나의 경우엔 생명의 소중함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한 인간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다는 오만함으로 느껴졌다.
▲ 아들, 하니아들이 한창 기어다닐때 사진, 지금은 춤추고 뛰어다니니 유아의 빠른 변태(變態)(?)를 세삼 느끼게 된다. ⓒ 임준연
어차피 출산을 돕는 병원이 아닌 검진만 하는 곳인 데다가, 우리는 그런 의사의 태도가 못마땅하여 병원을 옮겼고 아이를 낳는 곳은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가까운 전주 산부인과로 정했다.
서울에서 전주로 옮겼는데, 예정을 한 달이나 앞둔 시점에 양수가 터져서 성모병원 응급실에서 진료와 처치를 받고, 그곳에서 나올 때까지 대기하라는 권유를 무시하고 그날 마침 쉬고 있던 친구의 차를 빌려서 전주까지 달렸다. 낳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비용도 중요하고 환경도 무시할 수 없었다. 산후조리원도 예약을 해 놓은 상태였다.
낳는 때까지 속을 썩이고 나온 아들은 예정보다 무려 4주나 앞당겨서 나왔지만 3kg정도의 평균체형이었고 놀라울 속도로 잘 자라서 현재 누가 보든 건강하고 튼튼한 22개월 유아로 성장해 있다.
아기를 기르면서 둘째를 가질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많이 해왔지만 아내는 지금의 튼튼한 아들 하나도 감당하기 힘들다는 하소연을 했다. 그러나 한 달여 전에 생리가 늦어진다고 테스트 해본 임신테스트기에서 두 줄이 나오자 오히려 기뻐하며 이번엔 스트레스 안 받고 태교 잘 해보겠다고 했다. 그런 아내를 바라보는 내 모습도 행복했다.
하지만 엄마가 준비가 덜 된 것인지 아니면 아빠가 준 ‘씨앗’이 부실한 것인지 몰라도 4주째 하혈이 시작되고 산부인과에서 ‘절박유산’을 판정하고 안정을 요구했을 때 우리 부부는 불안에 몸을 떨었다. 때맞춰 동네에 물도 나오지 않는 사태로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졌다.
내가 직장을 다녀 주말에 병원에 들렀는데 결국 ‘계류유산’ 판정을 했다. 당일 먹은 것이 있어서 수술이 안 된다고 비우고 다음날 수술을 예약하고 왔다. 의사의 말이 떨어지기 전부터 울었을 아내는 나를 보자 무너지면서 흐느꼈다. 차에다 아이를 재우고 나온 나는 그 모습을 보자 가슴 한구석이 저리게 아팠다. 애써 태연한 척 다음에 더 건강한 아기 낳으려고 그러나 봐. 울지 말라고, 다른 산모들이 불안해하지 않겠느냐며 위로 반, 강요 반 하며 손을 잡고 나왔다.
▲ 엄마와 아가엄마는 오랜만에 발을 벗고 아기를 유모차에 끌고 가고 있다. ⓒ 임준연
“…….”
“걱정하지 마. 또 가지면 되지.”
마치 곳간에 쌓아둔 종자를 밭에 풀어놓듯이 나는 이야기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자신이 없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아이가 혼자 노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기 그지없다. 이웃한 또래라도 있으면 모르겠지만, 이곳 시골에서 또래 아이를 찾자고 하면 최소한 30km는 이동해야 한다.
“나. 이제 아기 안 가질래.”
“왜, 그래?”
“이제 무서워.”
임신을 두려워하는 아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두려움을 더 잘 다룬다고 생각하는 내가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우기다가 괜히 또 유산이라도 하면 그 충격은 어떨지 걱정이 앞선다.
철모르는 아들은 엄마 젖을 붙잡고 부벼댄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