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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먹어도 상냥한 그녀들, 알고 보니...

국가인권위 '비정규직 텔레마케터 인권실태 조사' 발표

등록|2009.02.19 21:24 수정|2009.02.19 21:24
"'여보세요'만 해도 욕을 하고 죽여버린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회사 규정상) 욕을 들어도 전화를 못 끊게 하거든요. 그리고 무조건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를 해요. 우리가 잘했든 잘못했든." (C보험 콜센터 텔레마케터)

"홈쇼핑 카탈로그에 팬티나 속옷·성인용품도 나가거든요. 남자분이 전화해서 굉장히 자세하게 민망한 질문을 하는 거예요. 밤에 그냥 호흡소리만 내면서 전화하는 고객들도 있어요. 끊지도 못하겠고, 끊고 나면 감정이 추슬러지지 않아요." (K사업장 텔레마케터)

어떤 상황에서도 상냥하고 밝은 하이톤의 말씨. 그러나 콜센터 텔레마케터들이 늘 친절할 수 있는 비결(?)은 '인권 침해'였다.

19일 오후 2시 국가인권위원회가 연 '콜센터 텔레마케터 여성 비정규직 인권상황 실태' 토론회에서는 텔레마케터의 인권침해 사례가 생생하게 소개됐다. 연구를 맡은 한국비정규노동센터는 지난해 9월부터 11월까지 560여 명의 텔레마케터를 설문 조사하고, 같은 해 8월부터 12월까지 텔레마케터 48명을 직접 만나 면접조사도 했다.

이번 조사에 따르면 텔레마케터의 36.7%가 성적 농담 등 성희롱 경험(고객에 의한 성희롱이 77.6%)을 겪고 있었지만, 고객에게 대응하는 경우는 12%에 불과했다. 31%는 성희롱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고객과 전화를 계속했다. '고객 무한만족'을 위해서 무조건 참아야 하기 때문이다.

▲ 19일 오후 2시부터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열린 '콜센터 텔레마케터 여성비정규직 인권실태' 결과발표 및 토론회. ⓒ 권박효원


"한밤중에 신음소리... 이젠 웃고 말지요"

텔레마케터는 욕설을 들어도, 성희롱을 당해도 참아야 한다는 것이 회사의 암묵적 지침이다. 인터넷사이트 '텔레잡'은 텔레마케터의 필수조건으로 "불쾌한 감정을 가진 고객에게서 비난을 받았을 때 적극적으로 극복하는 능력, 감정이 상해도 짧은 시간 안에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들고 있다.

특히 인바운드(고객이 콜센터에 전화를 거는 형태)의 경우, 제품에 불만이 있는 고객들이 전화를 걸자마자 욕설을 퍼붓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텔레마케터는 문제를 해결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텔레마케터 A씨는 "우리가 총알받이"라고 잘라 말했다.

몇 시간 동안 자신의 부부싸움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노래를 불러달라", "모닝콜을 해달라"고 요구하는 '진상' 고객이라면? 그래도 전화를 먼저 끊을 수는 없다. 한 텔레마케터는 "민원인이 다시 전화하면 여파가 크다, 홈페이지 게시판에 민원이라도 들어오면 골치 아프게 된다"고 전했다.

고객의 성희롱에 대해서는 의외로 "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반응이 많았다. 면접을 담당한 신경아 교수(한림대 사회학과)는 "자기 최면으로 내성이 생겼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텔레마케터 B씨는 "성희롱 전화를 받으면 웃고 만다"면서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지금은 거기(성희롱)에 신경 쓰면 정말 기분이 안 좋으니까 안 된다"고 설명했다.

텔레마케터들은 무감각한 감정과 대인기피증을 호소했다. 면접에 참여한 텔레마케터 C씨는 "기분이 안 좋아도 웃으면서 콜해야 한다, 일하는 동안엔 내 감정이 없는 것 같다"면서 "사람 만나는 것도 귀찮고 혼자 있는 게 좋다"고 말했다.

신경아 교수는 "고객으로부터 심각한 상처를 받았거나 상습적으로 괴롭힘을 당한 텔레마케터를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면서 "예방 매뉴얼을 만들고 고충처리 상담원을 육성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텔레마케터들이 물을 많이 못 마시는 까닭

텔레마케터들은 이런 식으로 일주일에 평균 41.5시간을 일한다. 공식적으로는 50분 업무를 하고 10~15분 쉴 수 있지만, 실제로는 점심식사 시간에도 일을 해야 한다.

텔레마케터 C씨는 "점심시간에도 '10분만 쉬라'면서 회사 마음대로 쉬는 시간을 뺏어간다"고 밝혔다. 고객의 전화를 먼저 끊을 수 없기 때문에 통화가 길어지면 휴식이나 식사시간도 사라진다. C씨는 심지어 "(통화 중에) 화장실에 자꾸 갈까봐 물도 못 먹게 한다"고 말했다.

▲ 송경림 부산여성회 텔레마케터협회 사무국장. ⓒ 권박효원

연장근무도 드문 일이 아니다. 6년간 텔레마케터로 일했던 송경림 부산여성회 텔레마케터협회 사무국장은 "팀·개인별 할당을 못 채우면 연장근무를 하는데, 추가근로수당은 없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받는 임금은 월평균 134만2000원(상여금 포함, 세금 공제 전)이다. 30인 미만 영세사업체 노동자의 임금은 월평균 115만6000원이고, 가장 열악한 파트타임 노동자의 임금은 월 89만9000원에 불과했다.

비정규직 비율도 66.1%로 높게 나타났다. 특히 이 중 보험판매 텔레마케터의 경우 대부분 '개인사업자'로 등록되어 있지만, 일반 텔레마케터와 똑같이 보험회사 콜센터에서 관리자의 지시를 받아 업무를 한다.

김성희 한국비정규센터 소장은 "텔레마케터 상당수가 파견 형태로 고용되어 법정 휴가도 사용할 수 없고 4대 사회보험도 적용받지 못하는 등 이중 삼중의 착취를 당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U는 5년 전 '콜센터 노사선언', 한국은 노조가입률 27.5%

EU는 이미 지난 2004년 '콜센터 노사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노동자들은 일과 가족, 공동체의 책임을 충실히 이행할 수 있도록 적정시간을 노동에 투여해야 한다, 노조를 설립하고 가입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김성희 소장은 "이 선언을 참고 삼아 우리도 노동표준을 마련해야 한다"면서 "그러나 한국 현실에서는 이런 노사선언을 할 사회적 기반이 없다, 콜센터 여성 비정규직만을 조직한 단위노조나 산별노조도 없는 상태"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텔레마케터의 노조가입률은 27.5(정규직 포함)%에 불과하다. 송경림 사무국장은 "대부분 회사들이 개인 실적을 공개하기 때문에 업무 스트레스가 높고 경쟁이 극심하다"고 전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는 노동자 의식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김 소장은 "콜센터 텔레마케터를 위한 노동기본권 교육이 시급하고, 사회적 캠페인으로 노동자들의 권리를 알리는 일도 필요하다"면서 "콜센터 텔레마케터 조합원을 일부 포함하는 노동조합의 경우 적극적 조직 노력을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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