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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열정으로 이웃에게 '희망'을

실버악단 '에버그린' 밴드

등록|2009.02.20 15:34 수정|2009.02.20 15:34

에버그린연주연습하는 전제모습. ⓒ 박창우


평생 해온 일을 통해 남에게 기쁨을 주는 것만큼 보람된 일이 있을까. 나이는 비록 황혼을 바라보지만 그 어떤 청춘보다 열정이 넘치는 ‘어르신’들이 있다. 돈을 위해서도 아니고, 멋을 내기 위함도 아니다. 단지, 드럼이면 드럼, 트럼펫이면 트럼펫, 색소폰이면 색소폰, 자신이 다룰 줄 아는 악기를 통해 음악을 만들어 내고, 이 음악으로 소외된 이웃들에게 웃음을 선사해 주자는 이유가 전부다.

2003년 7월 23일, 전 전북도립국악원장이었던 황병근(76) 할아버지 등 평소 음악에 관심 있던 5명의 노신사는 정년퇴직 후 남은여생을 좀 더 뜻 깊게 보낼 수 있는 방안을 생각했다. 각자 소질 있었던 분야는 악기. 서로 연주를 통해 맞춰보니 화음도 제법 괜찮았다. 악단결성은 필연이었다.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늘 푸르게 살자’는 의미로 악단명도 ‘에버그린’으로 지었다. 5명으로 시작한 에버그린은 올해 30명 가까운 단원들이 참여하고 있을 정도로 규모도 제법 커졌다. 3월부터 이어지는 순회공연을 앞두고 연습에 한창이라는 소식을 듣고 지난 19일, 이분들의 연습현장을 찾았다.

내리는 빗소리에 맞춰 아름다운 선율은 전주 KT&G 건물 뒤편의 한 창고 안에서 흘러나왔다. 분위기도 괜찮았고, 음악은 더욱 괜찮았다.

“빰빠밤 빠바 바바밤~♬ 빰빠밤 빠바 바바밤~♪”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가기도 전에 귀에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당신은 나의 동반자~♬ 영원한 나의 동반자~♪”
나도 모르게 입에서 가사가 새어나왔다.

에버그린연주 연습에 몰두한 어르신들 ⓒ 박창우


단원 대부분이 군대 시절 군악대나 학창 시절 음대 출신이라던데, 역시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 지친 기색 없이 연속해서 몇 곡이나 소화한 뒤야서야 백발의 노신사들은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이틈에 인터뷰다!)

“아, 젊어서야 못 다룬 악기가 없었지~. 방송국에서 악단장 생활을 했거든. 라틴, 재즈, 대중음악 등 장르도 다 소화했어. 그런데, 나이 들어 보니까 그때 연주했던 거는 다 직업 때문에 했던 거고, 누군가를 즐겁게 해주려는 목적이 약했던 생각이 들어. 하지만 이곳에서는 정서적으로 메마른 사람들을 위해 무료로 연주하니 나도 즐겁고 듣는 사람도 즐겁고, 모두에게 좋은 일인 듯 싶어.”

에버그린 악장을 맡고 있는 박화실(73) 할아버지는 무료봉사를 통해 소외된 이웃들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일이 에버그린의 목적이며, 자신 또한 그런 의미에서 참여하고 있음을 밝혔다.

실제로 에버그린은 2003년 창단 이후 6년간 소록도를 찾아 한센병 환자들에게 음악선물을, 음성 꽃동네 장애인들에게 음악감동을 안겨 주는 등 주위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자진해서 봉사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양로원과 사회복지관 등도 빼놓지 않았다. 지금까지 120회가 넘는 위문 공연을 다녔다고 하니, 그 열정과 에너지가 새삼 부럽기만 하다.

음악 또한 어려운 클래식 종류가 아닌 대중가요를 택했다. 웃음을 잃고 지내는 소외된 이웃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기 위해서는 신나고 친숙한 음악이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분들이 대중가요만 연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팝, 국악, 퓨전음악 등 해낼 수 없는 장르가 없다고 노신사들은 입을 모았다. 매년 연말에 개최되는 정기공연에서는 이 모든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하니, 한번 기대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한편, 에버그린에게 지난해는 잊을 수 없는 한해였다고 한다. 문화예술위원회와 법무부, 기회재정부, 복권위원회 등의 후원에 힘입어 ‘신나는 예술여행 전국 순회공연’을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어르신들은 4개월 동안의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며 전국 10개 교도소 4천여명의 재소자들에게 음악선물을 안겨줬다.

“그때 공연을 통해 알았는데, 우리나라에 약 6만여 명의 재소자가 있다고 하네요. 하지만 이들이 형기를 마치고 나오면 사회는 이들을 받아주지 않아요. 이렇게 많은 사람이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거죠.

제가 돈이 많으면 성금을 통해 이들을 도와주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이고, 또 다른 이들처럼 밥이나 빨래와 같은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전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노래를 통해 이들을 즐겁해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김종교 교수에버그린 가수겸 사회자를 맡고 있는 전북대 김종규 교수 ⓒ 박창우

에버그린에서 보컬과 사회를 담당하는 김종교(전북대․전자정보공학부) 교수는 이곳에서의 경험을 통해 교수생활에서는 느끼지 못한 많은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아직 우리 사회에는 늙고 병들고 주위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노래를 통해 즐거움을 선사해 주는 것이야 말로 자신이 노래를 부르는 이유라고 하니, 김종교 교수 또한 에버그린 단원으로서 손색이 없어 보였다.

짧은 휴식 시간이 끝나고, 어르신들은 다시금 연주연습에 몰입했다. 틀린 부분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서로에게 충고를 해주고, 잘못된 부분을 짚어 주는 등 다른 악단 못지 않은 ‘프로의식’이 느껴졌다.

연주 가능한 곡만 100곡이 넘는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연습을 통해 이뤄진 화합인지도 짐작 가능하다.

“악기를 연주하다 보면 내 자신도 젊어지는 거 같고 음악을 듣는 분들도 웃어 보이기에 행복해진다”는 한 어르신의 말처럼 실버악단 에버그린은 현재 누구보다 행복한 제2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빠바바밤 빠바바밤 빠빠바밤~♪”
울렁울렁 울렁대는 가슴안고~

다시 시작된 연습. 연주는 힘찼고, 또 그만큼 흥겨움이 넘쳤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선샤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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