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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 작가 '기리노 나쓰오' 더 깊어졌다

[일본소설 맛보기 23] 기리노 나쓰오의 <다마모에>

등록|2009.02.25 09:08 수정|2009.02.25 09:08

▲ <다마모에>는 '혼이여 타올라라', 라는 뜻입니다 ⓒ 황금가지

이전까지의 작품과는 사뭇 다르다. 기리노 나쓰오의 장편소설 <다마모에>. 그로테스크하고 잔인하고 추악한 인물과 사건들이 주를 이루었던 그 전의 작품들에 비하면 이번 <다마모에>는 너무너무 점잖다. 그리고 심심할 정도로 평이하다.

읽는 내내, 올라오는 구토 때문에 손수건으로 입을 막으면서 읽어야했던 그녀의 소설 <아웃> 그리고 <그로테스크>, <잔학기>...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이 치욕스럽고 모욕스럽게 느껴졌던 그녀의 작품들. 그녀의 소설들은 그랬다. 추악하고 어둡고 잔인했다.

그 소설들을 읽으면서 그녀를 얼마나 증오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만큼 사랑했다. 갈데까지 간 인간들의 모습을 그렇게 잔인하고 치사하게 잘 그려낸 작가는 기리노 나쓰오밖에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다마모에>는 정말 의외였다. 어라? 정말 기리노 나쓰오 맞아? 몇 번이나 작가의 이름을 확인했다. 동명이인?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도 늙은 걸까. 아주 평범한 한 50대 후반 여인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그리고 있다. 그녀 자신이 이제 오십을 넘어 육십줄에 들어섰기때문일까.

기리노 나쓰오... 늙은걸까? 깊어진걸까?

이야기의 시작은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남편의 죽음에 무슨 비극적인 음모가 숨어있을거라는 내 추측은 보기좋게 홈 밖으로 날아가고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펼쳐진다.

지극히 평범한 전업주부였던 도시코는 갑작스런 남편의 부재로 인해 삶의 중심을 잃게 된다. 남편이 남겨준 재산이 약간 있긴 하지만 앞으로 살아가야할 일도 막막하고 뭘 해야 좋을지도 모른다. 세상 물정도 모른채 남편의 온실 속에서 안온하게 살아왔던 도시코는 당장 어떻게 살아야할지 방황한다. 자식들의 관심은 오로지 유산에만 있을 뿐, 타인보다 못한 존재다.

게다가 남편에게는 10여년동안 숨겨왔던 내연녀가 있었다. 건실하고 성실했던 남편에게 자신 모르게 교제했던 내연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도시코는 배신감으로 휘청거린다.

젊은 것도, 늙은 것도 아닌 50~60대의 상실과 고독

<다마모에>는 그런 도시코의 이야기다. 그것은 50대 후반의 여자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발 더 나아가서, 젊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늙어버린 것도 아닌 어정쩡한 50대의 애환을 그린 이야기다. 예전만큼 싱그런 젊음을 유지하지는 못하지만, 생의 의욕도 있고, 욕망도 있고, 애정도 있고, 성욕도 있는 그런 50대~60대의 이야기를 잘 버무려 놓았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마음대로 살려고 하면 세상의 상식에서 점점 멀어진다. 그 쓸쓸함을 뛰어넘어야하는 걸까." (233쪽)

그러나 무엇보다 이 작품은 배우자와 사별한 뒤 남겨진 남은 한쪽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불의의 사고로 한날한시에 죽지 않는 이상, 부부 중 누군가 먼저 죽게 된다. 우리는 흔히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남은 사람의 막막함과 쓸쓸함, 고독을 짐작하지 못해서는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사별의 고통, 그것을 어떻게 겪어보지 않고 짐작할 수 있으리.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애통함보다는 함께 나이를 늙어갈 누군가를 상실했다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 더 크다고 하겠다.

도시코의 남편은 퇴직후 메밀국수 만들기를 배웠다.  이 메밀국수를 가르치는 사람은 '이마이'라는 70대의 인물. 그도 부인과 사별했다. 메밀국수 만들기에 누구보다 전문가였지만 정작 자신의 부인에게는 한번도 메밀국수를 만들어주지 못했다. 그러한 이마이의 고백은 가슴이 찡해진다.

"마누라는 3년이나 병상에 누워있었고 마지막에는 쇠약해져 유동식 밖에 먹지 못했습니다. 제가 만든 메밀국수를 먹지 못하고 죽은 거지요. 저는 퇴직하고 더욱 메밀국수에 몰두해 눈에 띄게 실력을 키웠는데 아무도 먹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쓸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메밀국수를 만든 학생들은 자기가 만든 국수를 그릇에 담아 집으로 가져갑니다. 가족들이 막 만든 메밀국수를 기다리고 있다면서요. 그게 무척 부러웠습니다. 아아, 나는 열심히 국수를 만들고있지만 아무도 함께 먹을 사람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470쪽)

<다마모에> 홍보문구를 보니 한국판 <엄마가 뿔났다>라고 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50대 여성의 자아찾기라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그러나 <엄마가 뿔났다>의 한자보다 <다마모에>의 도시코가 더 쓸쓸하고 적막하다. 적어도 한자에게는 돌아갈 가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식, 가족,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남편이 있지 않았던가.

이 책은 50대 여성에게 많은 공감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꼭 여성이 아니더라도 그 나이대의 독자에게 많은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 사람도 꼭 한번은 읽어봐야할 소설이다. 특히 '젊음'이라는 이유로 교만을 부리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권유하고 싶다. '내 젊음엔 유통기한이 없다'며 지나친 자신감을 과시하는 사람도 마찬가지.

인간은 상실한 후에야 비로소 겸손해지는 것일까. 그러나 그것을 깨달았을 때쯤이면 그때는 너무 늦다. 내 삶도 너무 교만했다. 앞으로도 적잖이 그럴 것이다. 그때마다 이 책을 다시금 들춰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쓸쓸한 '상실'에 동참해보는 연습을 해보리라.

기리노 나쓰오, 더 독해져라

여성의 심리를 그리는데 탁월하다는 기리노 나쓰오도 이제 얼추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그녀의 눈이 조금 더 둥글어지고 따뜻해지고 깊어졌다. 그러나 나에게는 영원히 '독한 작가'로 남았으면 좋겠다. 인간의 추악함에 인정사정없이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는 독한 작가. <다마모에>는 평이한 소설같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자만함과 오만함을 꾸짖는 준엄한 질책이 있었다.
덧붙이는 글 다마모에/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황금가지-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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