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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는 효율적인 산출을 만들어내야 하는 공장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 1년 평가 ② 정치분야] 무너진 의회민주주의

등록|2009.02.25 17:15 수정|2009.02.25 17:16
17대 국회는 출범 초기 70-80%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출발했지만, 18대 국회는 개원 초부터 국민적 기대감이 높지 않았다. 총선 직전인 4월 6일, SBS-KSOI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18대 국회에 대한 기대감은 36.4%로 매우 낮았다.

역대 최저 투표율에서 어느 정도는 예견된 일이었지만 이전 국회의 개원 초기에는 볼 수 없었던 지표이다. 더군다나 2008년 말 여야가 소위 '입법 전쟁'을 치른 후 무당파 층이 60%까지 올라가면서 한국 정당정치와 대의민주주의의 심각한 위기라는 진단도 나오고 있다. 시민들의 정치 불신과 혐오가 더욱 커졌다는 반증이다. 이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역사가 주는 교훈

군사독재시절 통법부 국회, 거수기 국회가 민주화 이행기를 거치면서 점차 제도화된 경쟁적 국회로 전환되었다. 물론 민주화가 이행되는 과정에서도 국회 운영에 있어 벼랑 끝 대치, 날치기, 직권상정 등 극단적이고 파행적인 국회 운영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아주 제한적으로 시도되었고, 결국 상당한 갈등과 진통을 겪은 후 되돌려지거나 민심이반, 정권몰락, 선거참패 등으로 심판을 받았다.

돌아보자. 1986년 민정당이 통일민주당 유성환 의원의 대정부질문을 문제 삼아 체포동의안을 단독 처리한 것은 결국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1996년 12월 말, 신한국당은 노동법을 날치기 처리했지만 노동계와 시민사회의 대대적인 저항에 부딪혀 이듬해 노동법을 재개정할 수밖에 없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을 강행처리한 한나라당은 결국 17대 총선에서 참패했다. 이렇듯 과정과 절차를 무시하고, 힘과 수적 우위를 앞세운 정치는 대개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렀다.

원칙을 지켜냄으로써 결과적으로 의회의 권위를 수호한 정치인들의 선례도 있었다. 2000년 16대 국회 출범 초기 민주당은 자민련과의 공조를 위해 자민련의 교섭단체 구성요건 완화안을 직권상정해 달라고 이만섭 국회의장을 압박했지만, 민주당 출신의 이만섭 의장은 끝내 이를 거부했고, 날치기가 횡행하던 시절 소속 정당의 회유와 압력에 굴하지 않고 원칙을 지켰다고 박수를 받았다.

2004년 농촌 출신 의원들의 강력한 반대로 한-칠레FTA비준안 본회의 표결은 세 차례나 무산됐지만 당시 한나라당 출신 박관용 의장은 비준안을 강행처리하지 않았고, 정치적 부담 때문에 무기명 투표를 하자는 한나라당 제안도 단호히 거부했다.

이명박 정부에는 없는 것? ① 소통

국회는 투입에 따라 가장 효율적인 산출을 만들어내야 하는 공장이 아니다. 정책결정 이후 사회가 치러야 할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국회에서의 결정과정은 대화와 토론, 설득과 협상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과정에 충실해야만 한다. 그리고 충분히 토론하여 논의가 숙성됐을 때 민주적인 원칙에 따라 결론을 내려야 한다. 여러 계층과 집단의 이해가 부딪히는 첨예한 문제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달랐다. 속도에만 집착하다보니 소통이 없었다. 야당 설득은 둘째 치고, 상당수의 여당 의원들에게조차 쟁점법안의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지 않았다. 경제위기에 서민들이 살길을 만들어 달라고 아우성치는데 재벌과 부자, 특권층의 세금을 깎아주는 감세안을 밀어붙였고, 경제와 무관한 미디어법을 '경제살리기 법안'이라고 우겼다. 국민을 이해시키고 야당을 설득하는 과정을 우습게 생각했고,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은 공권력으로 눌렀다.

이명박 정부에는 없는 것? ② 국회 존중

지금까지 우리 민주주의의 역사를 볼 때, 국회를 무시한 대통령은 결국 국민들의 무시를 받았다. 그럼에도 이명박 정부는 취임직후부터 줄곧 과거의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지 못하고 역사의 나쁜 길만을 따라가고 있다. 먼저 대통령이 정부와 국회와의 관계를 대등한 관계로 이해하지 않고, 자신의 정책을 관철시키는 수단, 종속적인 관계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주 위험한 전조다.

또한 자신이 속한 여당마저 철저히 무시하는 개인정치로만 일관하고 있다. 지난해 정부는 정부의 중점법안을 5-6개월의 의견수렴 절차를 거쳐야 하는 정부 입법절차를 우회하여 의원입법으로 추진했다. 그리고 여당을 향해 입법에 속도를 낼 것을 주문했다. 효율과 속도, 결과만 중시하다보니 '야당과의 대화와 토론', '여론 수렴' 등의 국회운영 원리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결국 폭력사태로까지 비화된 입법 전쟁, 누가 시작한 것인가?

이명박 정부에는 없는 것? ③ 민주적 절차

여당은 청와대의 지침을 수행하느라 법안상정의 절차를 무시했다. 한나라당이 입법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는 것은 야당과 충분히 토론할 기회를 갖지 않았다는 뜻이고, 국민을 이해시키고, 설득할 시간도 갖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한나라당은 중요한 쟁점법안인 방송법과 금산분리완화법을 지난해 12월 24일 국회에 제출했고, 연내 입법을 위해 국회의장에게 수차례 직권상정을 요구했다. 예외 조항이 있기는 하지만 국회법은 법 개정안이 상임위에 배정되고 15일 지난 뒤 상정ㆍ논의하도록 하고 있다. 정부와 여당은 충분한 숙의 기간을 거치지 않고 수의 힘으로 밀어붙이려 했다.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한 국회 운영의 민주적 절차가 무참하게 파괴되었다.

연말 국회 파행 사태, 책임은 정부와 여당에 있다

정치권의 대립과 투쟁은 드러난 양상만 가지고 옳고 그름을 따지기는 어렵다. 국회 내에서 물리적 폭력 못지않게, 소수를 무시하는 관행, 토론과 숙의를 거치지 않고 다수당 마음대로 법안을 주무르는 관행은 민주주의의 성숙이라는 차원에서 경계해야할 제도적 폭력이다.

한미FTA 비준안을 상정하는 회의에 야당 의원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출입문을 봉쇄한 것은 야당 의원들의 권한과 책무를 침해한 심각한 위법행위였다. 폭력은 그 자체로 옳지 않지만 작년 말 야당의원이 든 해머는, 야당과의 협의절차를 무시하고 출입문을 봉쇄한 채 단독으로 법안을 상정한 여당 의원들이 자초한 일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작년 말 국회에서 한나라당의 뜻대로 이른바 쟁점 법안들의 처리가 강행되었다면, 국회는 파행과 공전을 거듭하고, 파업과 시위 등으로 올해 우리는 더 큰 사회 비용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진통은 컸지만 그나마도 연말 국회에서 정부가 밀어부친 쟁점법안이 강행 처리되지 않은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 하겠다.

이명박 대통령의 여의도 정치 혐오증은 익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다원화된 현대사회를 행정적 접근만으로 다스릴 수는 없다. 청와대 눈치보기에 급급해 시민사회와 가교 역할을 해야 할 여당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니 번번이 시민사회는 청와대와 직접 대결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먼저, 여당이 당정 관계에서 주도성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민심을 정확히 헤아려 전달하고, 청와대의 일방적 독주에는 제동을 걸어야 한다. 다음으로, 야당을 대결의 상대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국정운영의 파트너로 생각해야 한다. 결국 야당의 협조를 얻지 못하면 그 어느 것 하나도 수월하게 추진할 수 없다. 야당과의 대화와 소통에 힘을 써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민과의 소통을 위해 시민사회와 폭넓은 거버넌스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사회 갈등이 첨예해지는데 국회가 갈등 상황을 의회 내에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2009년에는 부디 독불장군 청와대, 서민을 대변하지 못하는 국회, 국민과 소통하지 않는 정당을 보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국민이 정치인에게 대표의 자리를 위임했다고 해서 우리 모두의 미래까지 맡긴 것은 아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참여연대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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