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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중학생 시절 몹쓸 짓이 떠오르다

아리 폴먼의 <바시르와 왈츠를> 때문에 떠오른 유년시절 기억

등록|2009.02.27 18:16 수정|2009.02.28 16:01
내겐 대부분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없다

책겉그림〈바시르와 왈츠를〉 ⓒ 다른

나는 남들보다 조금은 특이한 것 같다. 남들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곧잘 떠올린다지만 나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특별히 기억하는 유년 시절의 기억은 빨간 열매를 따 먹으로 뒷산에 올라갔다가 깨진 콜라 병을 밟은 일이다. 그 일로 산에서부터 피를 질질 흘리면서 집으로 내려왔고, 한 달간 방안에서 민간요법으로 치료한 기억이다.

그 밖에 중학교 2학년 무렵에 아버지가 급작스레 세상을 떠나신 일, 초등학교 시절에는 노래를 조금 잘 불렀다는 것, 중학교 시절에는 남학생으로 구성된 반이라 교실 뒤쪽에서 힘 깨나 쓰던 아이들이 싸움질을 했다는 것,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저 조용한 모범생으로 살았다는 것, 그것들만 내 기억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에 반해 내 아내는 나와 정반대다. 아내에게 어린 시절을 물어 보면 뭐든지 다 떠올리곤 한다. 아내는 초등학교는 물론이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의 모든 기억들을 이야기해 주곤 한다. 특별히 6살 때의 기억도 내게 해 주곤 하는데, 그 시절 여동생이 태어난 이후 어머니가 몹시 아팠던 기억까지도 생생하다고 한다.

최근에는 곧잘 따르는 후배 녀석이 나의 늦깎이 대학시절을 떠올린 일도 있다. 나는 27살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대학 4년 동안 몇 차례 이사를 한 기억도 있지만 구체적으로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후배 녀석은 내가 이사할 때마다 봉고차로 짐을 실어서 함께 이삿짐을 날라줬다는 것이다. 후배 녀석은 이사하면서 겪은 재미난 이야기도 곁들어 주었지만 나는 도통 떠오르지 않아 답답했다.

왜 나는 옛 일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것일까? 어린 시절에 찍어 놓은 사진들이 없어서 그럴까? 사진이라도 찍어 놓았더라면 해마다 한 번씩 들여다보면서 연차적으로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기억하기 싫은 일들이 너무 많아서 의도적으로 내 머리 속에서 지워버린 것일까? 조금 더 나이가 들면 혹시라도 아이들이 '건망증 많은 아빠'라고 놀려대지 않을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바시르와 왈츠를〉이 3천명의 팔레스타인 민간인 학살을 떠올리게 하다

그런데 최근에 〈바시르와 왈츠를〉이라는 만화책을 읽으면서 중학교 시절에 했던 몹쓸 짓이 떠올랐다. 〈바시르와 왈츠를〉은 이스라엘군의 묵인과 협조 하에 팔랑헤당 민병대원들이 3천 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학살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 현장 속에 있던 주인공이자 이 책의 지은이인 아리 폴먼도 꿈속에 나타난 26마리의 개를 통해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지난 시절의 사건들을 풀어나가는 책이다. 

당시 이스라엘 정부는 레바논의 바시르 제마엘 대통령과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바시르 대통령이 기독교인이었던 까닭에 친 이스라엘 정책을 펼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갑작스레 암살을 당하자, 이스라엘 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여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진격해 들어간다. 물론 그곳에는 이미 기독교 측 팔랑헤당 민병대원들이 시가지 곳곳을 점령해 들어간 상태였다. 다만 팔레스타인 민병대원들은 이미 그 시가지를 떠나고 없던 때였다.

바로 그 시가지 곳곳에서 팔랑헤당 민병대원들은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을 무참히 살해하기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어두컴컴한 한밤중에도 그 일을 멈추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군이 조명탄을 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른바 이스라엘 군은 그들의 살육 현장을 돕는 지원군이자 공범인 셈이었다. 주인공 아리 폴먼도 그와 같은 몹쓸 짓을 여태껏 자신의 뇌리 속에서 지우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가 지독한 전쟁 참사를, 자신의 손으로 무참히 쏴 죽인 그 살육현장을 지워 없앴던 것일까? 주인공은 전쟁 트라우마의 세계적인 권위자를 통해, 그와 같은 기억을 지웠던 것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일종의 '방어 기제'였던 것이다. 아리 폴먼은 여태껏 자기 자신을 방어하고 지키기 위해서 그 살해 현장에 있던 자신을 머리 속에서 없애왔던 것이다.

불현듯 중학교 시절에 행한 나의 몹쓸 짓이 떠오르다

〈바시르와 왈츠〉라는 책을 덮고 난 후, 불현듯 내 머리 속에서 지워왔던 중학교 시절의 몹쓸 일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진짜로 해서는 안 될 나쁜 짓이었다. 그 일은 당시 한 동네에 살던 기독교인들이 다른 교단 신도들을 이단으로 몰아세운 나머지 그 신도 집에 쳐들어가 집안 안팎을 벌집 쑤시듯 들쑤신 사건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 집이 우리 집과 불과 몇 미터도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시절 시골 교회의 담임목사님과 장로님, 그리고 몇몇 권사님과 집사님들이 주도하여 그 집을 쳐들어갔는데, 당시 순진했던 나는 교회 어른들이 하는 방식대로 무조건 따라 하기에 바빴다. 당시 교회 어른들은 피켓만 안 들었을 뿐 일반 시위하는 사람들이 하는 대로 다 했다. 우리들은 그 집안 어르신과 아주머니를 향해 수많은 고함과 삿대질과 욕설들을 마구 퍼부어댔다.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왜 그와 같은 기억들을 지금 이 순간에 떠올리고 있는 것일까? 나도 아리 폴먼처럼  '방어기제' 때문에 여태껏 머리 속에서 지우고 있었던 것일까? 더욱이 현직 목사라는 이유 때문에 어린 시절에 했던 그 몹쓸 짓을 사죄하지 않고 그냥 버텨보려고 했던 것일까?

지금은 그 어르신이 이 세상을 떠나고 없다. 그 집도 다 허물어져 잡초만 무성할 뿐이다. 그런데 몇 해 전에 그 어르신의 둘째 아들이 시골 뒷산 가까운 곳에 터를 잡아 초보농사꾼으로 살아가고 있다. 때가 된다면 그 둘째 아들 되는 분을 찾아가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지난 날 그 어르신에게 했던 몹쓸 짓에 대해 정중하게 용서를 구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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