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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늙은이 다섯이 모이면 의기투합이 된다?

등록|2009.02.28 12:41 수정|2009.02.28 12:41

쑥부쟁이쑥부쟁이, 세상살이가 힘들수록 그에 얽힌 전설이 더욱 생각난다. ⓒ 박종국




어제 일이다. 여러 친구들과 함께한 자리였다. 막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대뜸 한 친구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짓궂기로 정평이 나 있다. 하지만 하는 짓이 그다지 밉상스럽게 보이지 않아 다들 그러려니 받아넘기며 애써 상대를 하지 않는다.

"야, 니들은 한 십년만 젊었다면 무엇부터 하고 싶냐?"
"자식, 나잇살을 그냥 처먹었나? 지금까지 산 것도 부족해서 또 욕심을 부려."
"난 말이야. 딱 십 년만 젊었다면 저기 서빙하는 저 아가씨와 결혼하고 싶다."
"그래? 좋겠다. 네 말대로 된다고 해도 저 아가씨, 네 꼬락서니 보자마자 엄마야 날 살려라하고 도망치겠다. 에라이, 더러운 놈아! 정신 차려라."

그쯤에서 끝났으면 좋았다. 하지만 제 버릇 개 못준다했듯이 그 친구는 계속 좔좔거렸다. 고등학교 때부터 녀석은 도무지 속내를 감추지 않고 치근댔다. 그런 까닭에 우리들도 덩달아 못돼먹은 아이들로 낙인이 찍혔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억울한 일이었다. 쉰 나이에도 친구는 여전하다.

"야, 임마, 입 좀 닫아라. 넌 어찌 입만 뻥긋하면 시궁창이냐?"
"왜 또 나만 갖고 그래? 사실은 너희들도 귀가 솔깃한 얘기잖아?"
"너 정말 이럴래? 아무리 세상을 제 맛에 산다고 하지만, 할 말이 있고, 가지 않아야 할 길이 있는 거야. 지금 그것도 얘기라고 하고 있어. 우리가 헤헤거리며 끝까지 들어줘?" 
"아따 선생나리 아니라할까 서러운가 보네요."
"그래, 난 언제든 선생냄새를 내고 사는 놈이다. 그만두자." 

다그치며 충고했더니 선생냄새가 난다고 볼이 붓는다. 내가 직업습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굳이 아니라고 우겨대며 고집할 까닭이 없다. 선생이 선생냄새가 나는 게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쑥부쟁이어렵고 척박한 땅일수록 더욱 어울림이 좋은 쑥부쟁이. 언제나 친근한 야생화다. ⓒ 박종국




그 사람을 알려면 그가 사귀는 친구를 보면 안다고 했다. 그렇듯이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를 알자면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훤히 알 수 있다. 말을 표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화가는 그림으로, 가수는 노래에다, 춤을 추는 사람은 춤사위로 자기의 모든 혼을 불어 넣듯이 표현하고자 한다.

하고픈 이야기가 많다는 것 그만큼 삶에 치열하다는 것

자기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는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주어진 삶을 치열하게 산다는 증거다. 더구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가슴으로 느낀 것을 다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 그렇지만 할 말이 있고 뱉어서는 안 될 말이 있다.

"야, 오랜만에 만났는데 티격태격 말싸움 하지 말고 뭔가 건설적인 이야기가 없을까?"
"난 올해 들어 참 생각이 많아졌다. 나이 오십이라는 무게가 새롭게 느껴져. 간단없이 살았지만 아이들이 커가는 것을 보니까 더욱 그래.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을 하게 돼. 우리가 그만큼 늙었다는 얘기겠지?"
"나도 그래, 요즘 아침저녁으로 거울을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는데, 하루 다르게 흰머리가 늘어. 탱글탱글하던 마누라 얼굴에도 잔주름이 많아 보이고. 일하고픈 의욕도 예전 같지 않아."
"그동안 어렵다 어렵다고해도 용케 버텨왔는데 이제 한계가 온 것 같아. 평생 몸담을 직장이라고 여겼지만 언제 내 자리가 없어질지 하루하루가 살얼음을 걷는 듯해. 아날로그 세대가 디지털 세대를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어제도 그랬어. 난 외국 바이어 한 사람하고도 쩔쩔 매는데, 갓 입사한 젊은 친구는 마치 해묵은 친구 대하듯이 자연스럽게 얘기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주눅이 들던지…. 더 이상 직책을 가지고 연명할 수 없을 것 같아."
"……."

침울했다. 다들 비슷한 처지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할 따름이었다. 때문에 밤이 이슥해지도록 쓴 소주만 들이켰다. 요즘 같으면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힘들겠지만, 그래도 치인 세대인 우리 386세대가 가장 어려운 기로에 선 것 같다. 정말 곁눈질 한번 안하고 앞만 보고 열심히 일했는데, 급변하는 세상은 그런 공치사쯤은 아무렇지 않게 내팽개치고 있다.

치인 세대라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현실은 현실

나이테나무도 나이테로 나이를 먹듯이 사람도 세월따라 그에 걸맞는 나잇살을 가진다. ⓒ 박종국




공감하기가 쉽지 않는데도 현실은 현실이다. 문제원인은 타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있는데도 그것을 인정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술자리가 길어질수록 의기소침해지는 우리들은 끝내 답답한 현실을 안주삼은 채 자리를 파했다. 어떻게 살아야 지독하게 힘겨운 이 난국을 잘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야, 야. 목 고개 푹 빠트리지 말고 힘내. 어디 죽어라는 법 있겠나."
"냄비에 끓는 물은 쉽게 식지만 가마솥에 끓는 물은 오래 가는 거다. 그렇게 살자."
"까짓것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사는 거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아닌가."
"난 맨땅에 헤딩하는 꼴을 만나도 버겁지 않아. 파이팅!"
"왜 있잖아. '나 힘들다'를 거꾸로 뒤집어 봐. '다들 힘내'는 말 아니나? 힘내자!"

다섯 중늙은이들은 그렇게 의기투합을 했다. 평생지기로서 신실함을 나눈 것이다. 경기침체가 나락을 헤매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푸념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조그만 것 하나도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 호황국면에 이르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한해살이에 대한 초발심이 중요한 것이다.  

불콰한 얼굴로 집에 돌아와서 책상머리에 앉았다. 자신의 내적성장을 위해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산행을 하며, 여행을 하는 것도 좋은 방편이겠지만, 무엇보다 올 한 해는 아이들에게 좋은 향기가 나는 선생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내게 주어진 소임이 아이들을 맡아 가르치는 것이라면 마땅히 아이들 곁에 서야하고, 그들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함께 보아야겠다. 새 학년 새 학기를 앞두고 스스로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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