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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바위 모습이 사람얼굴을 닮았네

[전국 100대 명산을 찾아서 49]밀양, 청도 가지산

등록|2009.02.28 12:14 수정|2009.02.28 12:14

▲ 사람얼굴 모습을 닮은 쌀바위 ⓒ 이승철


"우와! 저 바위봉우리 좀 봐, 대단하잖아? 우린 안 되겠는데…."
"어, 정말 대단한데, 저 봉우리는 오르지 말고 우회해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능선 길 앞에 나타난 바위봉우리를 바라본 일행들이 지레 겁을 먹고 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바라본 모습은 또 다른 얼굴이었다.

"아니. 저 바위봉우리 모습이 사람 얼굴처럼 생겼잖아?"
"정말 그러네, 그런데 상당히 험상궂은 표정인 걸?"

일행들이 위협적인 모습으로 앞을 막아선 바위봉우리를 바라보고 있을 때 뒤따라온 산악회원들이 다가왔다.

"저 바위봉우리가 바로 쌀 바위예요. 어때요? 멋있지요?"
"저 봉우리가 쌀 바위라고요? 그런데 쌀 바위가 왜 사람얼굴을 닮았죠?"
그러나 쌀 바위가 왜 사람얼굴을 닮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난 25일 찾은 가지산은 낯선 산악회와 처음으로 함께한 산행이었다. 서울에서 처음으로 어울린 낯선 사람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달렸다. 고속도로에서 청도 나들목을 빠져나와 다시 1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이 운문령이었다.

처음으로 함께한 낯선 산악회를 따라 나선 가지산 등산길

산악회장은 놀랍게도 겉으로 보기엔 가냘프게 생긴 여성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 산악회장은 철인으로 불릴 만큼 대단한 등산 실력을 가진 여성이었다. 산악회장은 회원들을 두 팀으로 나누었다.

▲ 귀바위에 오른 등산객들 ⓒ 이승철


먼저 산행에 자신 있는 팀은 생금바리 골짜기에서부터 시작되는 코스로 오르도록 하고,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운문령에서부터 오르도록 한 것이다. 나와 일행 3명은 운문령에서 시작하는 30분 정도 시간이 덜 걸리는 조금 쉬운 코스를 택했다. 처음으로 함께하는 산악회여서 그들을 따르지 못해 피해를 줄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운문령에서 내린 일행들은 곧바로 가파른 오른편 능선길로 오르기 시작했다. 날씨는 봄날처럼 포근했지만 옅은 안개가 끼어 있어서 시야가 흐린 것이 흠이었다. 산길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전날 내린 비로 등산로가 젖어있어서 신발에 진흙이 달라붙기도 하고 쭉쭉 미끄러졌다.

그런데 함께 오르는 회원들의 등산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남성 리더는 그렇다 해도 스스로 후미 리더를 맡은 40대의 여성뿐만 아니라 조금은 엄살을 부리며 우리 팀이 된 사람들도 어찌나 잘 걷는지 따라가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 가지산 능선길 ⓒ 이승철


금방 땀이 배어나와 이마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헉헉 숨이 막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그들을 같은 속도로 따라가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아 숨고르기를 하며 속도를 늦췄다. 나 혼자 50여 미터쯤 뒤로 처졌다.

"자! 여러분! 힘내세요, 그리고 속도를 조금만 줄이세요."
후미 리더를 맡은 여성이 앞장선 사람들이게 속도를 조금 줄이라고 한다. 맨 뒤에 처져 쩔쩔매는 나를 배려하는 것 같았다. 천천히 걸어 조금 올라가자 앞서 걷던 사람들이 첫 번째 안부에서 잠깐 쉬며 기다려주고 있었다.

안부에서 잠깐 쉬며 땀을 들인 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르막길은 여전했지만 1주일 만에 오르는 산길에 쉽게 적응하지 못해서 힘들었던 조금 전과는 달리 몸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 다음 안부에서 바라보았던 귀바위를 목표로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일단 적응이 되자 별로 힘들이지 않고 귀바위에 도착했다.

"저 바위 저거 어디가 귀처럼 생겼다는 거야? 왜 귀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졌는지 이유를 모르겠네?"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보다 상당히 위험스러워 보이는 절벽바위를 바라보며 여성들 몇이 바위 이름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나 바위의 모양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단정적인 판단은 무리였다.

▲ 가지산 정상 ⓒ 이승철


그래도 모두들 첫 번째 봉우리인 귀바위에 올라 기념사진을 찍었다. 귀바위에서부터는 능선길이었다. 약간의 오르내림은 있었지만 그리 어렵지 않게 상운산(上雲山)에 올랐다. 해발 1114미터, 이만한 높이면 구름 위에 솟아있다는 뜻을 가진 산 이름이 어색하지 않은 수준이다.

상운산에서 가지산으로 가는 길도 능선길이었다. 내리막 능선을 따라 조금 내려오다가 양지 바른 곳에 앉아 잠깐 쉬며 간식을 먹었다. 다른 회원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다시 길을 나서 조금 더 내려오자 산 아래 골짜기를 굽어볼 수 있는 전망대에 회원들이 모여 앉아 간식을 먹고 있다가 우리들을 부른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미 간식을 먹은 후여서 목례로 대신하고 능선길을 따라 걸었다. 능선길 옆 응달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조금씩 쌓여 있었지만 길은 여전히 질퍽거린다. 신발과 바짓가랑이가 진흙을 뒤집어 써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가지산은 아직 저 멀리 바라보이고 있었다.

사람얼굴처럼 생긴 쌀바위의 전설

그렇게 능선길을 걷다가 만난 바위봉우리가 쌀 바위였다. 쌀바위 아래는 약간 넓은 공터가 있고 그 한쪽에는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전망대에서 쌀바위를 쳐다보고 있을 때 쌀바위 위에서 우리들을 내려다보며 소리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 밧줄을 붙잡고 바위절벽을 오르는 일행 ⓒ 이승철


생금바리에서 출발한 같은 산악회 회원들이다. 우리들보다 30여 분이 더 걸리는 지점에서 출발한 사람들인데 우리들보다 앞서 있었다. 역시 그들은 등산 실력이 상당히 좋았던 것이다. 그들을 발견한 사람들이 우르르 쌀바위를 뒤쪽으로 돌아 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이 바위 올라가지 말고 그냥 우회하여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쌀바위 중간 쯤 절벽 아래 세워져 있는 추모비를 발견한 일행이 하는 말이었다. 추모비에는 '정녕 산인가. 큰 한 웃음을 옥류골에 묻어놓고' 라고 새겨놓았다. 쌀바위 암벽등반을 하다가 떨어져 사망한 사람을 추모하기 위해 친구들이 세운 비인 듯 했다.

쌀바위는 옛날 이 산에서 수도하던 어느 승려를 위해 날마다 적당량의 쌀이 솟아나오던 바위틈이 바로 이 바위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소식을 전해들은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쌀을 많이 퍼내려고 바위틈을 파헤치자 그 뒤부터 쌀이 솟아나지 않았다는, 욕심을 경계하는 전설에서 유래된 이름이었다.

쌀바위 꼭대기에 오르지 않고 뒤쪽으로 돌아 가지산을 향했다. 길은 여전히 능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안개가 조금 걷혀서 시야가 조금 밝아져 있었다. 저 앞쪽으로 가지산뿐만 아니라 오른편으로 운문산이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능선길에서 멀리 가까이 바라보이는 산들이 하나같이 고산준령들이다.

▲ 북릉에서 바라본 가지산의 위용 ⓒ 이승철


"그런데 왜 이쪽을 영남 알프스라고 하지? 알프스는 스위스에 있는데 말이야."
누군가 이쪽에 있는 산들을 묶어 영남알프스라고 부르는 것이 몹시 궁금한가 보았다.

영남알프스는 조금 전에 지나온 상운산을 포함하여 지금 우리들이 가고 있는 가지산(1240m), 운문산(1188m), 재약산(1189m), 신불산(1208m), 영취산(1059m), 고헌산(1032m), 간헐산(1083m) 등 7개의 산군이 유럽의 알프스처럼 아름답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본에도 북알프스가 있고 뉴질랜드 알프스, 캐나다에도 로키알프스가 있는가 하면 우리나라 충청북도의 속리산 일대를 충북알프스라고 부른다. 그러고 보면 알프스라는 이름은 이미 고유명사가 아니었다. 스위스 등 유럽 몇 개국에 걸쳐 있는 알프스 산맥을 유럽 알프스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태백산맥 끝 줄기를 왜 영남알프스라 부를까

능선을 타고 가다가 약간 솟아 오른 봉우리가 가지산 정상이었다. 해발 1240미터, 정상에는 정상 표지석과 함께 낙동정맥이라는 또 하나의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표지석 옆에는 깃대 끝에 매달려 펄럭이는 태극기가 세찬 바람에 찢겨나가고 1/3정도만 남아 있는 모습이 보기에 좋지 않았다.

▲ 개구리가 깨어난 골짜기 풍경과 물속에 납짝 엎드려 숨은 개구리 ⓒ 이승철


내려가는 길은 오른편 길이었다. 조금 내려가자 겨우 길만 터놓은 산죽밭이 능선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산죽 사이로 뚫린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가파른 봉우리를 올라서니 가지산 북릉이다. 북릉에서 뒤돌아본 가지산 정상과 이어진 준령들이 우람하게 다가온다.

위험하고 힘든 고생길은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한 발짝만 잘 못 내딛으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날카로운 바위봉우리를 걸을 때는 오금이 저린다. 미끄럽고 옹색한 바위 절벽을 오르내리는 것도 위험하고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내리막 능선길은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전날 내린 비에 젖고 눈과 얼음이 녹은 내리막 산길은 여간 미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일행 두 사람이 그 미끄러운 길에서 두 번씩이나 미끄러져 흙투성이가 되었지만 다치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 북치는 비구니와 출입문으로 이용되는 범종루 ⓒ 이승철


"어이쿠! 살았네,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구먼."
저만큼 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발견한 일행이 탄성을 지른다. 2시간 30분을 넘겨 고생하며 내려오니 골짜기가 나타났다. 골짜기는 전날 내린 비 때문인지 수량이 제법 많았다.

물가 바위에 배낭을 벗어놓고 바짓가랑이와 신발에 뒤범벅이 된 흙을 씻어 내렸다. 그런데 물에 손을 담가도 손이 시리지 않다. 일행 한 사람은 아예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발까지 물에 담근다. 힘든 산행을 하느라 고생한 발과 발목을 식혀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개구리도 깨어난 봄이 오는 길목 풍경과 운문사 북소리

다시 길을 나서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는 길은 상쾌하기 짝이 없었다. 골짜기 주차장을 지나 조금 더 내려오자 숲 속 골짜기에서 개굴개굴 개구리 소리가 요란하다. 수십, 아니 수백 마리의 개구리들이 합창을 하고 있었다. 포근한 날씨에 겨우내 잠들었던 개구리들이 깨어 일어난 것이었다. 개구리소리를 따라 가까이 다가가자 놀란 개구리들이 바위틈과 물속에 납작 엎드려 숨는다. 아직 알은 보이지 않았다.

승려들이 수행중이라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문수선원을 지나 조금 더 내려오자 절집들이 즐비한 거찰 하나가 나타난다. 운문사였다. 운문사는 서기 560년(진흥왕 21)에 창건된 것을 608년에 원광국사가 중건하고. 신라 말기에는 보양국사가 중건한 고찰이다.

▲ 운문사 처진 소나무 ⓒ 이승철


특이한 것은 사찰을 드나드는 2층 문루가 범종루였는데 마침 비구니 한 사람이 북을 치고 있는 중이어서 좋은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여승 두 사람은 옆으로 비껴서 있고 여승 한 사람이 양손에 북채를 들고 엄청 커다란 북을 치는 손놀림과 몸동작이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범종루 문 안쪽 넓은 마당에는 1966년 8월 25일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된 처진 소나무 한 그루가 자리 잡고 있었다. 수령이 500여년에 나무높이 6미터, 가슴높이 줄기둘레 2.9미터에 가지가 퍼져 나간 것이 동쪽으로 8.4미터, 서쪽으로 9.2미터, 남쪽으로 10.3미터, 북쪽으로 10미터나 퍼져나간 특이한 모양의 거목이었다.

이 '처진 소나무'는 가지가 아래로 처져 옆으로 자라는 특성 때문에 매우 희귀한 편이다. 운문사 뜰 평평한 곳에 충분한 생육 공간을 갖고 넓은 수관을 가진 이 소나무는 가지가 계속 옆으로 자라기 때문에 수많은 받침기둥이 나무의 가지를 떠받치고 있었다. 

이 소나무는 옛날 어느 고승이 나뭇가지를 꽂아 놓은 것이 자라났다는 삽목전설(揷木傳說)이 전해지고 있는데, 운문사에서는 매년 봄이면 이 소나무에 12말의 막걸리를 물 12말에 타서 뿌려주는 행사를 한다고 한다.

▲ 굴국밥을 먹는 일행들과 푸짐한 생굴안주 ⓒ 이승철


우리들이 타고 간 버스는 사찰 옆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찰 옆이어서 그곳에서는 식사를 할 수 없었다. 버스를 타고 잠깐 달려 길가에 있는 마을 옆 공터에 이르자 구수한 국 끓이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산악회에서는 푸짐한 생굴을 술안주로 준비해놓고 있었다. 여섯 시간동안 산을 타느라 출출했던 회원들은 밥을 먹기 전에 우선 저마다 막걸리와 소주잔을 비우며 싱싱한 생굴을 초고추장에 찍어 맛있게 먹는다.

"캬! 쥑인다 쥑여, 산행이 힘들어서 그런지 술맛이 더 좋은 걸."

일행들도 술잔을 기울이며 힘들었던 산행으로 피곤한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술을 몇 잔씩 마신 사람들은 곧 생굴을 넣어 끓인 미역국에 밥을 말아 점심 겸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후루룩 후루룩 뜨거운 국물을 마시는 등산객들이 기분 좋은 포만감에 젖어들고 있을 때 산등성이에 걸렸던 해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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