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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서점, '길담서원' 첫돌을 맞다

[길담서원의 삼백예순다섯 날]

등록|2009.03.01 10:48 수정|2009.03.02 00:14

길담서원 전경길담서원 바깥 풍경 ⓒ 라디오21TV



2008년 2월 25일  경복궁역 2번 출구 근처  통인동에서 소문도 없이 조용히 문을 연 서점이 한 곳 있다. 그곳에 들르는 모든 이들의 갈증과 목마름을 채워주는 옹달샘 같은 곳, 대한민국의 섹스피어 & 컴퍼니 같은 곳을 꿈꾼다던 '길담서원'이다.

길담서원은 말 그대로 길과 담, 안과 밖, 내적 성찰과 외적 활동을 모두 아우르는 문화적 코드 길과 담을 포함한 이름이다. 길담서원 안의 행사는 책을 통한 만남 못지않게 실제적 만남의 문화 또한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것이 바로 '길담서원'이 인문학 서적을 외면하는 현실이나 여러 가지 경제적 어려움을 고사하면서까지 고집스럽게 인문학 서적만을 취급하고 끊임없이 새롭고 다양한 문화 행사를 마련해 온 이유다.

이제는 겨우 다섯 손가락 안에서 꼽아야만 하는 전문 인문학 서점 중 하나인 '길담서원' 대표는 성공회대학에서 평화학을 가르치는 박성준(한명숙 전 총리의 부군) 교수다.

길담서원을 방문한 알바로와 마리 프랑스콜롬비아 '몸의 학교' 교장인 알바로와 감독 마리 프랑스가 길담서원을 방문해 박성준 교수 부부와 함께 했다. ⓒ 이명옥



지난 2월 25일로 문을 연지 만 한 해가 되는 '길담 서원'은 삼백예순다섯 날 동안 국경, 인종, 성별을 초월한 수많은 사람들의 문화적 갈증을 채워주는 옹달샘이자 안식처였고 다양한 문화 행사의 마중물 역할을 해주었다. 첫돌을 맞이한 '길담 서원' 삼백예순다섯 날 동안 어떤 행사들이 펼쳐졌는지 그 현장을 들여다봤다.

'담 안의 놀이터 엿보기'

'길담서원'에서는 '길담'을 매개로 새로운 문화적 패러다임이 형성되길 바라던 서원지기의 바람대로 다양한 실험들이 진행되고 있다. 두 주에 한 번씩 열리는 '책여세 모임' 매주 원서를 강독하는 콩글리시 모임. 논어와 한시를 현대어 중국어로 배우는 중국어 모임, 음악 감상회, 길담 백야제, 영화 감상 모임 등이 그것이다. 행사에  멍석을 펴 주는 것은 길담이지만 행사의 주최는 참여자 모두가 된다.

행사 시작 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귀가 시간 또한 자유롭다. 한밤을 꼬박 새우는 '길담 백야제' 같은 경우, 전철 시간에 맞춘 자정 전, 시외버스 막차 시간인 새벽 2시, 그리고 다음날 첫 전철 시간까지 세 번에 걸쳐 형편에 맞게 귀가 시간을 정할 수 있다.

길담서원을 방문한 수지 모건스턴세계적인 동화작가 수지 모건스턴이 길담서원을 방문해 책여세 회원들과 함께했다 ⓒ 이명옥



[책여세 모임]

'홍시'라는 아이디를 쓰는 여성이 지기로 있는 '책여세(책읽기 모임)'은 2008년 6월 6일 첫 모임을 시작한 이후 한 달에 두 번씩 자율적인 모임을 지속하고 있다. 책읽기에 참석하기 전 정해진 책을 읽고 가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형식으로 진행이 된다. 다음에 읽을 책 역시 누구든 추천할 수 있으며 가장 많은 사람들의 추천을 받은 책을 다음 책으로 정해 읽는다. 십대부터 칠십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함께 모여 서로의 감상평을 나누며 이해의 폭을 넓혀간다. 특별한 조건은 없으며 다만 참석하려면 정해진 책을 읽고 가야 한다.

[콩글리시 모임]
콩글리시 모임은 영어 원서 강독 모임이다. 청소년 반, 주부를 배려한 낮반, 직장인을 위한 저녁 반까지 다양한 요일과 시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적절한 시간과 실력에 맞추어 들어가 공부할 수 있다.

[음악 감상회]
베토벤 마니아인 서원지기 소년은 DVD를 통해서 화면을 보며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시설을 마련했으며 서점 한 편에 피아노까지 준비해 두었다. 음악 감상회는 한 달에 두 번 일요일에 있으며 음악 교사가 지기로 수고하고 있다. 이따금 바리톤 가수와 작곡가 신동일 교수, 피아니스트 신은경씨가 연주하는 생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도 마련되어 있으며 대금 해금 가야금 등 국악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기회도 마련된다.

길담 백야제자연식 요리 연구가 문성희씨와 함께 한 길담 백야제 ⓒ 이명옥



[길담 백야제]
'길담서원'이 마련한 고유한 행사로 지금까지 <건축기행>을 쓴 이용재씨를 비롯해 <야생초 편지>의 황대권씨, 도법스님, 콜롬비아 몸의 학교 교장인 라틴 아메리카 무용의 선두 주자 알바로, 자연식 요리 연구가 문성희씨, 길담서원 대표 박성준 등이 말씀 손님으로 자리를 함께 했다. '길담 백야제'는 가벼운 음식과 함께 와인을 나누는 시간, 초대 손님의 춤이나 연주를 감상하는 시간, 하이라이트인 말씀 손님을 청해 이야기를 듣는 시간, 마지막으로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시간 순으로 준비된다.

길담 북 페어 길담에서 열린 북 페어 현장 '책 꿍댕이 어루만지기'라는 글이 익살스럽다 ⓒ 이명옥



그 밖에도 논어와 한시를 현대 중국어로 낭송하는 중국어 강독 모임, 비정기적인 모임인 영화감상 모임도 있다 영화 감상은 누구든 함께 나누고 싶은 좋은 영화 DVD를 가지고 번개를 치면 원하는 사람끼리 함께 모여 영화를 감상하는 모임이다.

'길 위에 서 꿈꾸는 '초록별 소년'의 여정이 궁금하다'

2009년은 길담 서원 대표 박성준 교수가 일흔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일흔을 맞이한 서원지기에게 요즘 내적 외적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우선 서원지기 소년은 어릴적 못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예순 해가 될 때까지 잃어 버렸던 웃음도 되찾았다. 이제는 커다란 소리로 파안대소하는 행복한 모습의 박성준 교수를 가끔 볼 수 있다. 그것은 칠순을 바라보며 시작한 삼모작, 그의 평생의 꿈의 집결체인 '길담서원'이 경제성을 초월해 그의 인생에 있어 성공적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또 하나의 커다란 변화라면 박성준 교수가 그렇게 고집하던 '서원지기 늙은 소년'에서 '초록별 소년'으로 자의적으로 아이디를 바꾼 사건이다. 그 자신의  마음에 일어난 변화를 자신과 길담 지기들에게 가시적으로 확인시키는 징표로 왼쪽 귀를 뚫어 조그만 초록별도 달았다. 그가 단 초록별은 그가 꿈꾸는 새로운 세상 만남과 희망의 상징이며 그의 내적 외적 변화를 암시하는 상징이리라.

잘 알다시피 박성준 교수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원치 않던 담 안에 남들보다 더 오랜 세월동안 머물렀다. 전쟁의 상흔, 부모와의 생이별이 아홉 살 소년 박성준이 이를 악물고  억척스럽게 공부하며 자신을 곧추세우도록 내몰았다면, 신혼의 단꿈과 젊은 날의 희망의 날개를 세상에 펼쳐보기도 전에 강제로 교도소 담장 안에 머물러야 했던 세월들은 그에게서 꿈과 웃음마저 앗아가 버렸다.

박성준 교수길담 서원 1주년 기념 백야제 행사 말씀 손님인 박성준 교수가 라디오21과 인터뷰하고 있다. ⓒ 라디오 21tv



일흔이 되는 2009년 비로소 스스로 닫아 건 단단한 마음의 빗장을 자신의 손으로 풀고 세상과 화해를 시작한 그는 이제 더 이상 상처 받고 웅크린 영혼이 아니다. 그저 길담 서원이라는 담 안에서 그를 찾아오는 손님들만 맞이하려던 점잖고 소극적인 '서원지기 늙은 소년'에서 자의적으로 '초록별 소년'으로 거듭난 그는 이제 길 위로 나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관계망을 정립할 꿈에 부풀어 있다. 그는 이제부터 걷기 여행을 자주 떠날 예정이라고 한다. 스스로 길을 나서 사람들을 두루 찾아가 만나고, 그렇게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를 책으로 엮어 낼 계획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의 삼모작의 푸른 꿈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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