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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출장 좀 며칠 다녀오면 안돼?"

워킹맘-현관 문만 나서면 행복한 아줌마

등록|2009.05.11 17:21 수정|2009.05.13 11:56

음악이 있는 정원출근길에 거치는 노원구청 앞 정원 종종 꽃을 바꿔가며 꾸며 놓는다. 도심 속에서 스치는 가운데도 눈길이 한 번 더 가고 기분이 밝아진다. ⓒ 송진숙




남편은 평생 키워야 할 데리고 온 아들?

시체놀이 좋아하는 남편은 자기를 제외한 식구들을 도깨비 방망이쯤으로 생각한다

휴일날 컴퓨터 앞에 앉아 있거나 책이라도 읽을라 치면 남편 왈 "우리 커피 한 잔 마시면 안될까? 또는 우리 집은 사과 안먹나?" 한다. 못들은 척하면 다시 한 번 꺼낸다. 가끔은 베푸는 척 해주기도 하고 가끔은 말씨름 끝에 본인이 하기도 한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코드다. 본인은 누워서 TV를 보면서 주문을 하는 남편. 속터지게 한다. 마누라 편한 꼴을 못보는 건지. 남편은 데리고 온 아들? 낳은 아들 챙기기도 바쁜데 데리고 온 아들까지 챙겨야 하다니!

물론 내가 직장일로 바쁠 때는 요구를 하지 않는다. 같이 직장 다니면서 주부도 쉬고 싶다는 걸 모르는 걸까? 아님 아무 생각이 없는 걸까? 가끔 기분이 내키면 본인이 서비스를 하기도 하지만 아주 가끔 있는 일이다. 스스로의 일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엄마나 집안 식구들에 의해 해결하면서 커온 사회관습 때문일까?

남편은 미성숙한 성인일까? 정말 누군가의 말처럼 미성숙한 남편을 보낸 시댁에 피켓 들고 시위라도 해야 할 일 아닐까? 가정일을 해결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한다. 슈퍼우먼 아내의 세심한 매뉴얼이 필요하다.

어린이날 오후엔  마지막 짐정리를 하러 성골(전에 살던 동네)에 가기로 했다. 낮엔 그동안 밀린 일과 처리할 게 있어 직장에 출근을 했다. 일을 잘 보고 있는데 4시쯤에 전화가 울렸다.

"나 감기가 심한 거 같애. 감기약 좀 챙겨와. 그리고 몇 시에 와?"
"일이 끝나야 가지."
"일찍 와-"

남들이 보면 아마도 아들과의 대화인 줄 알겠지만 남편과의 대화다. 남편은 목소리마저 착 가라앉혀서 최대한의 동정심을 유발하는 듯했다. 아내를 마치 엄마로 착각하는 듯. 결국 일을 일차적인 것만 끝내고 목표했던 것을 마치지도 못한 상태에서 감기약을 준비해서 집으로 갔다. 소파에 누워서 TV시청중이다. 남편이 아프니 짐정리는 못할 것 같아 남편 혼자만 보내려 했다.

그런데 부득이 같이 가자는 것이다. 원고 청탁할 게 있는데 상대방에게 미안하니 맥주라도 한 잔 하면 운전을 대신 해달라는 것이다. 짜증이 났지만 따라나섰다.

생맥주 한 잔으로 끝나고 남편이 운전을 했다. 난 따라가지 않았어도 되는 일이었다. 남편에게 조용히 말했다. 이런 경우에는 내 스케줄을 방해하는 것이니, 미리 양해를 구하거나 최소한 미안하다는 제스처는 보여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주부도 혼자만의 오롯한 시간을 즐기고 싶다

와인을 한 잔 하면서 얘기 하자고 했다.

'와인 좋지. 굳이 진지하게 얼굴 경색해가지고 얘기하는 것보단 와인잔을 마주 하면서 얘기를 하면 좀 더 부드럽겠지.'

시원하게 넣어둔 아끼던 화이트 와인을 꺼내오고 조각치즈와 향기나는 쑥설기(집에서 손수 찐)를 안주로 해서 상을 차렸다. 쫄깃쫄깃한 쑥설기는 생각보다 와인에 잘 어울리는 듯했다. 와인잔을 들어 마시면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네 일 내 일이 어딨어?"

"왜 없어? 당신 일, 가족 공동의 일, 내 일이 따로 있는 거야. 빨래 널기, 설거지, 청소, 빨래개기, 화장실 청소, 베란다 청소, 장보기 등의 집안 일은 가족 공동의 일이야. 그러니까 그건 식구들이 모두 나서서 해야 하는 일이고, 오늘처럼 당신 원고 부탁하는 일은 당신 일이므로 내가 안 가도 되는 거지. 나도 나름으로 할 일이 많다고. 디카로 찍은 사진 정리도 해야 하고, 글도 써야 하고, 책도 읽어야 하고…."

"당신 일에 나도 같이 했잖아. 예전에 당신이 학교 아이들 데리고 답사갈 때 사전답사를 비롯해 인솔도 같이 해주었잖아."

"물론 했지. 그건 당신이 토요일 업무를 보지 않을 때였고, 당신 스케줄에 무리가 없을 때였지. 강권한 적은 없어. 그리고 지금도 당신한테 운전을 부탁한 적도 어디 같이 가길 간절히 부탁한 적도 없어, 난 혼자 다해. 아파도 내가 약 사다 먹지, 직장에 가 있는 사람한테 부탁하거나 일찍 들어오라고 조르지도 않아.

그리고 당신 일에 내가 가줄 수도 있지만 사전에 부탁을 했어야지. 일방적으로 하면 안되지. 가족이라고 모든 걸 같이 해야 된다는 생각을 버려. 그런 사고 방식은 곤란해. 아무리 가족이라도 각자의 고유영역은 침범하지 말고 지켜줘야지. 인권은 집에서도 지켜져야 하는 거 아닌가?

나도 나만의 시간과 영역을 인정받고 싶어. 나도 혼자만의 오롯한 시간을 갖고 싶어. 누구로부터의 간섭도 없이. 그런데 식구 누구도 인식을 잘 못하는 것 같애. 그래서 직장에서 늦게 퇴근하고 휴일에도 몇 시간이나마 출근해서 일도 보고 혼자만의 시간도 즐기는 거라고."

예전엔 내 감정에 내 설움에 복받쳐서 눈물바람 콧물바람이었는데 이젠 또박또박 얘기했다. 얘기하는 사이 와인 한 병을 다 비웠다. 알콜기운이 온몸으로 퍼지는 느낌이 들었고 알딸딸해지면서 기분도 업되었다.

나의 승리(?)였다. 남편은 알았노라고 했다. 진짜 알아들은 건지, 나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한 작전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논쟁은 여기서 일단락되었다.

남편에 대한 매뉴얼을 완전히 터득할 때는 언제쯤일지! 아무리 봐도 남편은 더 이상 성숙하긴 힘들 것 같다. 내가 접고 사는 게 훨씬 빠를 듯도 하다. 애들 둘도 모자라서 남편까지 셋째 아이로 키워야 하는 건지. 자식 복도 많아라!

직장은 나의 활력소이자 에너지 충전이다

요즘 들어 직장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예전엔 퇴근시간 되자마자 부리나케 집으로 향했다. 누가 잡기라도 할세라 꽁지 빠지게 달려나가곤 했다. 이젠 누가 잡아주면 더욱 좋고, 퇴근시간이 지나도 자리에 앉아 있는다. 모두 돌아간 이후의 조용하고 고요한 시간이 좋다. 퇴화해가는 뇌세포로 인해 가물거려 잘 처리하지 못했던 일을 돌이켜 차근차근 정리해보기도 하고 앞으로의 계획도 세워본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 느긋하게 음악 들어가며 글 쓰고 사진 정리하고. 명상도 즐기고. 직장 있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할 줄이야! 하루하루가 감사한 마음이다.

집에선 하기 어려운 일이다. 집에 돌아가면 일의 맥이 끊긴다. 물이라도 마시러 주방에 들렀다가 설거지꺼리 있으면 해야 되고, 물건 찾으러 안방에 들어갔다가 지저분한거나 빨래꺼리 있으면 치워야 하고…. 산만해서 일에 집중할 수가 없다. 때되면 상차려 밥 먹어야 하고.

다른 집 남편은 출장도 잘 가더구만 우리집 남편은 출장 갔다가도 이틀을 못넘긴다. 술 마시고 새벽이 되어도 몇 만원씩 하는 택시비 들여 귀가한다. 자기 인생에 외박은 없단다. 얼마 전에는 고창에 9시간 운전을 해서 갔다가 4시간 걸려 새벽 3시가 넘어서 귀가했다.

"자고 오지. 당신 출장 좀 며칠 다녀오면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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