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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 30년... 나는 매일 적었을 뿐이고"

[온고을 사람들 29] 메모는 나의 힘 (1) 가계부 30년 써온 히로꼬씨

등록|2009.03.02 18:49 수정|2009.03.03 11:01

▲ 지출항목을 빼곡히 적은 히로꼬씨의 가계부. 일본어로 적었을 거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한글로 또박또박 썼다. ⓒ 안소민


"사실 저의 어떤 점이 특별한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적기만 했을 뿐인데요. 보통 주부들이라면 다 하지 않나요?(웃음)"

보통(?) 주부인 나는 멋쩍었다. 가계부를 쓰지 않기 때문이다. 한두 번 시도는 해보았다. 하지만 몇일 못 갔다. 나는 불량주부니까 그렇다 치자. 물론 보통 주부라면 가계부를 쓴다. 한 푼이라도 절약하자는 '비장한 각오'로 시작한다. 그러나 30년 이상을 한결같이 쓴 사람은 정말 드물다.

일본 후쿠시마에 살다가 1996년 한국으로 시집와서 전주에 터를 잡기 시작한 지 햇수로 14년째. 마츠모토 히로꼬(46)씨는 깨알 같은 글씨로 오늘도 또박또박 가계부를 쓰고 있다.

'두부 1300원, 빵 980원, 딸기잼(500g) 2,980원….'

잠시 가계부를 들여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뛰어나올 듯한 생생한 살림살이가 그 안에 있었다. 필요에 따라서는 형광펜으로 칠하기도 하고 빨간펜으로 밑줄 '쫙'도 그어놓았다. 깨알같지만 가지런한 글씨. 일본어로 썼을 거라는 내 생각과 달리 한글로 참 예쁘고 가지런하게 적어놓았다. 이제는 한국어로 쓰는 게 더 편하다는 히로꼬씨.

히로꼬씨는 이렇게 30여년 이상 꼼꼼한 가계부 쓰기를 해왔다. 정확히 말하면 근 40년동안이다.

용돈기입장부터 근 40여년 가계부 메모

▲ 마츠모토 히로꼬씨. 가계부쓰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가계부를 쓰다보면 돈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고 한다. ⓒ 안소민

히로꼬씨의 가계부 쓰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용돈을 받을 때부터 용돈기입장을 쓰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에는 용돈이 많지 않으니까 아껴 써야 한다는 생각에 쓰기 시작했어요. 부모님이 강제로 시킨 것은 아니었어요. 친구들이 용돈으로 군것질할 때 저는 저금했어요. 그때부터 습관이 된 것 같아요."

그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받은 월급, 결혼한 뒤에는 남편으로 받은 생활비를 가계부에 적기 시작했다. 용돈기입장과 결혼 전 썼던 가계부는 일본의 친정집에 있다. 여태껏 한 해도 빠뜨리지 않았다. 히로꼬씨에게는 '비장한 각오'는 없었다. 다만, 적지않으면 왠지 허전하고 찜찜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귀찮을 때도 있죠. 예전에는 물건을 구입하면 바로바로 가계부에 적었지만 요즘은 조금 게을러져서 몇 일치를 모았다가 쓸 때도 있어요. 그래도 안 쓰면 너무 허전해요. 뭔가 찜찜하고 하루를 제대로 마감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습관처럼 몸에 밴 가계부 메모 습관. 하다 보니 '절약'은 덩달아 따라오는 덤이 되었다. 가계부를 쓰다 보니 '충동구매'와 '바가지 구매'가 눈에 보였다. 가계부는 단지 적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 절약을 배울 수 있고 앞으로의 구매 노하우를 배우게 되었다. 

식비 가장 많이 증가... 살림의 역사가 한눈에

"지난 가계부를 들춰보면 '아~ 이때는 이것을 얼마에 주고 샀구나', '커피포트를 이때 샀었구나'는 것을 새삼 알게 되요. 살림의 역사가 한눈에 보인 달까요. 제 스스로 가계부 쓰는 것을 특별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그동안의 메모가 제게 큰 재산이 된다는 느낌이 들 때는 그럴 때예요."

히로꼬씨는 매일 가계부를 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연말에는 1년치 가계부를 각 항목별로 분류해서 통계를 낸다. 마치 회사에서 연말결산작업을 하듯이 엑셀을 사용해 각 항목별로 1년 동안 사용한 통계를 적는다. 여기에 각종 쿠폰·포인트·보너스까지 다 합해 1년치 통계를 낸다.

"해마다 이걸 해보니까 작년과 대조가 돼요. 해마다 늘어나는 것은 아무래도 아이들 교육비와 식비죠. 식비의 경우, 10년 전과 비교해서 거의 두 배가 늘었어요. 정말 장보기 너무 힘들어요. 그래도 쿠폰을 이용하거나 전단에 나와있는 할인품목을 미리 알고 가서 구입하죠. 그렇게 하면 조금은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거든요."

▲ 연말 지출결산표. 이 정도면 한 회사의 경리 수준이다. ⓒ 안소민


▲ 2007년도 연말결산. '쿠폰' '장바구니' 항목이 별도로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절약이 생활화되어있다는 증거다. ⓒ 안소민


30년 이상 가계부를 써온 비결에 대해 묻자 히로꼬씨는 웃기만 한다. 정말 비결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쓸 뿐이다.

"제가 전업주부니까 오로지 남편의 수입에 의지해서 살림을 꾸려가야하거든요. 돈이 너무 적다고 불평하기보다는 돈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리고 돈을 벌어다 준 사람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 같아요. 요즘 사람들은 너무 펑펑 쓰면서 돈이 너무 없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해요."

가계부 안에는 '절약'과 '재테크'가 있다

기계부를 쓰는 요령은 이와 같다. 첫째 장을 보고 난뒤 바로 쓸 것. 영수증을 챙겨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나중에'라고 미루다 보면 때를 놓치게 되고 쓰기 힘들게 된다. 둘째, 장을 보기 전에 구입품목 리스트를 반드시 적을 것. 이것은 충동구매방지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나중에 가계부를 쓸 때 품목을 대조해볼 수 있는 긴요한 자료가 된다.

히로꼬씨는 가계부를 어디서 구매할까. 히로꼬씨가 좋아하는 가계부는 일단 칸이 크고 넓은 것이다. 그래야 항목을 꼼꼼히 적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은행이나 보험사에서 주는 가계부는 칸이 너무 작아서 제대로 쓸 수 없다고. 그녀가 문구점에서 구입한 가계부는 2년 정도 쓸 수 있을 정도로 두툼한 대학 노트 형식이다. 정성껏 기입하다보니 어느 때는 가계부 작성에만 1시간 정도 걸린 경우도 있다고 한다.

▲ 히로꼬시의 최근 가계부들. 한 권에 2~3년은 족히 쓸 수 있는 튼튼하고 두꺼운 것들로 골랐다. 나머지 처녀적에 쓰던 것들과 용돈기입장은 일본 친정집에 있다. ⓒ 안소민


현재 5학년과 2학년 남매를 둔 그녀는 아이들에게 경제교육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 뜻밖에 그녀의 아이들은 용돈기입장을 쓰지 않는다. 애써 강요하지 않는다. 그 대신 필요한 만큼 용돈을 조절해 주면서 경제관념을 키워주고 있다. 강요하지 않아도 엄마의 가계부 쓰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도 자연히 용돈기입장을 쓰게 될 거라고 했다. 그녀가 그랬듯.
덧붙이는 글 선샤인뉴스에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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