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 30년... 나는 매일 적었을 뿐이고"
[온고을 사람들 29] 메모는 나의 힘 (1) 가계부 30년 써온 히로꼬씨
▲ 지출항목을 빼곡히 적은 히로꼬씨의 가계부. 일본어로 적었을 거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한글로 또박또박 썼다. ⓒ 안소민
"사실 저의 어떤 점이 특별한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적기만 했을 뿐인데요. 보통 주부들이라면 다 하지 않나요?(웃음)"
보통(?) 주부인 나는 멋쩍었다. 가계부를 쓰지 않기 때문이다. 한두 번 시도는 해보았다. 하지만 몇일 못 갔다. 나는 불량주부니까 그렇다 치자. 물론 보통 주부라면 가계부를 쓴다. 한 푼이라도 절약하자는 '비장한 각오'로 시작한다. 그러나 30년 이상을 한결같이 쓴 사람은 정말 드물다.
'두부 1300원, 빵 980원, 딸기잼(500g) 2,980원….'
잠시 가계부를 들여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뛰어나올 듯한 생생한 살림살이가 그 안에 있었다. 필요에 따라서는 형광펜으로 칠하기도 하고 빨간펜으로 밑줄 '쫙'도 그어놓았다. 깨알같지만 가지런한 글씨. 일본어로 썼을 거라는 내 생각과 달리 한글로 참 예쁘고 가지런하게 적어놓았다. 이제는 한국어로 쓰는 게 더 편하다는 히로꼬씨.
히로꼬씨는 이렇게 30여년 이상 꼼꼼한 가계부 쓰기를 해왔다. 정확히 말하면 근 40년동안이다.
용돈기입장부터 근 40여년 가계부 메모
▲ 마츠모토 히로꼬씨. 가계부쓰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가계부를 쓰다보면 돈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고 한다. ⓒ 안소민
"어렸을 적에는 용돈이 많지 않으니까 아껴 써야 한다는 생각에 쓰기 시작했어요. 부모님이 강제로 시킨 것은 아니었어요. 친구들이 용돈으로 군것질할 때 저는 저금했어요. 그때부터 습관이 된 것 같아요."
그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받은 월급, 결혼한 뒤에는 남편으로 받은 생활비를 가계부에 적기 시작했다. 용돈기입장과 결혼 전 썼던 가계부는 일본의 친정집에 있다. 여태껏 한 해도 빠뜨리지 않았다. 히로꼬씨에게는 '비장한 각오'는 없었다. 다만, 적지않으면 왠지 허전하고 찜찜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귀찮을 때도 있죠. 예전에는 물건을 구입하면 바로바로 가계부에 적었지만 요즘은 조금 게을러져서 몇 일치를 모았다가 쓸 때도 있어요. 그래도 안 쓰면 너무 허전해요. 뭔가 찜찜하고 하루를 제대로 마감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습관처럼 몸에 밴 가계부 메모 습관. 하다 보니 '절약'은 덩달아 따라오는 덤이 되었다. 가계부를 쓰다 보니 '충동구매'와 '바가지 구매'가 눈에 보였다. 가계부는 단지 적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 절약을 배울 수 있고 앞으로의 구매 노하우를 배우게 되었다.
식비 가장 많이 증가... 살림의 역사가 한눈에
"지난 가계부를 들춰보면 '아~ 이때는 이것을 얼마에 주고 샀구나', '커피포트를 이때 샀었구나'는 것을 새삼 알게 되요. 살림의 역사가 한눈에 보인 달까요. 제 스스로 가계부 쓰는 것을 특별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그동안의 메모가 제게 큰 재산이 된다는 느낌이 들 때는 그럴 때예요."
히로꼬씨는 매일 가계부를 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연말에는 1년치 가계부를 각 항목별로 분류해서 통계를 낸다. 마치 회사에서 연말결산작업을 하듯이 엑셀을 사용해 각 항목별로 1년 동안 사용한 통계를 적는다. 여기에 각종 쿠폰·포인트·보너스까지 다 합해 1년치 통계를 낸다.
"해마다 이걸 해보니까 작년과 대조가 돼요. 해마다 늘어나는 것은 아무래도 아이들 교육비와 식비죠. 식비의 경우, 10년 전과 비교해서 거의 두 배가 늘었어요. 정말 장보기 너무 힘들어요. 그래도 쿠폰을 이용하거나 전단에 나와있는 할인품목을 미리 알고 가서 구입하죠. 그렇게 하면 조금은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거든요."
▲ 연말 지출결산표. 이 정도면 한 회사의 경리 수준이다. ⓒ 안소민
▲ 2007년도 연말결산. '쿠폰' '장바구니' 항목이 별도로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절약이 생활화되어있다는 증거다. ⓒ 안소민
30년 이상 가계부를 써온 비결에 대해 묻자 히로꼬씨는 웃기만 한다. 정말 비결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쓸 뿐이다.
"제가 전업주부니까 오로지 남편의 수입에 의지해서 살림을 꾸려가야하거든요. 돈이 너무 적다고 불평하기보다는 돈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리고 돈을 벌어다 준 사람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 같아요. 요즘 사람들은 너무 펑펑 쓰면서 돈이 너무 없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해요."
가계부 안에는 '절약'과 '재테크'가 있다
기계부를 쓰는 요령은 이와 같다. 첫째 장을 보고 난뒤 바로 쓸 것. 영수증을 챙겨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나중에'라고 미루다 보면 때를 놓치게 되고 쓰기 힘들게 된다. 둘째, 장을 보기 전에 구입품목 리스트를 반드시 적을 것. 이것은 충동구매방지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나중에 가계부를 쓸 때 품목을 대조해볼 수 있는 긴요한 자료가 된다.
히로꼬씨는 가계부를 어디서 구매할까. 히로꼬씨가 좋아하는 가계부는 일단 칸이 크고 넓은 것이다. 그래야 항목을 꼼꼼히 적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은행이나 보험사에서 주는 가계부는 칸이 너무 작아서 제대로 쓸 수 없다고. 그녀가 문구점에서 구입한 가계부는 2년 정도 쓸 수 있을 정도로 두툼한 대학 노트 형식이다. 정성껏 기입하다보니 어느 때는 가계부 작성에만 1시간 정도 걸린 경우도 있다고 한다.
▲ 히로꼬시의 최근 가계부들. 한 권에 2~3년은 족히 쓸 수 있는 튼튼하고 두꺼운 것들로 골랐다. 나머지 처녀적에 쓰던 것들과 용돈기입장은 일본 친정집에 있다. ⓒ 안소민
현재 5학년과 2학년 남매를 둔 그녀는 아이들에게 경제교육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 뜻밖에 그녀의 아이들은 용돈기입장을 쓰지 않는다. 애써 강요하지 않는다. 그 대신 필요한 만큼 용돈을 조절해 주면서 경제관념을 키워주고 있다. 강요하지 않아도 엄마의 가계부 쓰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도 자연히 용돈기입장을 쓰게 될 거라고 했다. 그녀가 그랬듯.
덧붙이는 글
선샤인뉴스에도 올립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