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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생이 된 조카녀석의 안부 전화를 받고

엄마의 빈자리를 채울 수는 없겠지만...

등록|2009.03.04 15:45 수정|2009.03.04 16:01
 지난 2005년 12월, 서른 아홉 살 제수씨가 '뇌혈관기형뇌출혈'로 세상을 떴다. 가운데 동생은 마흔 일곱 나이에 홀아비 신세가 됐다. 그때부터 엄마 잃은 두 조카아이는 큰집에서 살게 되었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과 2학년이던 아이들이었다.
 어느 새 4년의 세월이 흘렀다. 엄마 잃은 이듬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된 큰 녀석 규왕이는 올해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되었다. 지난 2월 12일 치러진 졸업식을 끝으로 중학생 시절을 마감했는데, 3월 2일 치러진 고등학교 입학식과 함께 고교 시절을 시작했다. 

 녀석은 초등학교 졸업식부터 중학교 입학식과 졸업식, 고등학교 입학식까지 다른 아이들의 수많은 엄마들만 보아야 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엄마들 가운데서 엄마의 '빈자리'를 많이 느꼈을 터였다.   

 엄마의 그 빈자리 때문에 할머니는 물론이고 큰어머니와 큰아버지까지 이렇게 저렇게 신경이야 많이 썼지만, 그것이 온전히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줄 리는 만무하다. 어쩌면 큰집에서 살면서 '엄마가 있는 집'의 분위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제 엄마의 빈자리를 더 많이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녀석은 엄마를 잃은 후 만 3년 동안 큰집에서 살았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동시에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녀석은 외지로 고교 진학을 하지 않고 고장의 고교로 진학을 했는데, 고장의 고교도 기숙사를 운영하고 또 지역에 거주하는 학생들도 수용을 해주는 덕에 1학년초부터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녀석은 1일 오후 7시쯤 기숙사에 입소했다. 녀석과 녀석의 짐을 차에 싣고 가서 기숙사에 넣어주는 일은 아빠가 해주었다. 그 일도 당연히 내가 하게 될 줄 알았고, 그 일을 위해 서울에서(두 대학생 녀석의 자취방 정돈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내려왔다. 그런데 일터에서 일찍 퇴근해 온 동생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아들 일에 자진해서 나서 주어서 여간 다행이 아니었다.

 아무튼 그렇게, 이번에는 아빠의 도움을 받으며 고교 기숙사에 입소한 녀석이 다음날인 2일 저녁 집으로 전화를 했다. 내가 받았는데, 녀석의 안부 전화였다. 기숙사 생활을 잘 시작했다는 얘기였고, 요즘 다리가 불편하신 큰 아빠의 몸 상태가 궁금해서 전화를 했노라는 얘기였다. 녀석은 할머니께도 안부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 녀석으로부터 그런 안부 전화를 받고 보니 가슴이 짠해지는 느낌이었다. 녀석이 사용했던 방 쪽으로 절로 눈이 갔다. 평소에는 녀석 혼자 사용하고, 방학 때는 사촌형과 함께 쓰던 방이었다. 앞으로는 누이동생 규빈이의 차지가 되겠지만, 방문이 열려져 있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 방은 온전히 빈방이었다.

 그 빈방을 보자 하니 여러 가지 감회가 피어올랐다. 녀석에게 좀더 자상하게 신경을 써주고 잘해 줄 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돌아보면 녀석과 나 사이에 갈등도 없지 않았고, 속상하는 일도 많았다. 아침에 녀석을 깨우는 일이 완전히 전쟁인 때도 있었다. 매사에 엄마 잃은 아이라는 사실이 전제되곤 했고, 내 자식에게처럼 호되게 야단칠 수 없는 큰아버지의 한계 때문에 한숨을 쉰 적들도 많았다.

 식탁 앞에 앉아 큰아버지 앞에서도 성호를 긋지 않는 녀석에게 야단을 칠 때는 내가 과연 잘하는 짓인지 속으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족이 함께 하는 '식사 전 기도' 후에 식탁 앞에 앉는 경우에도 녀석은 성호 긋는 것을 곧잘 잊었고, 때로는 고의적으로 기피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녀석의 그런 모습에서 사춘기 시절의 '반항' 같은 것을 느끼면서 한번은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었다.



 "어디에서 무슨 식사를 하든, 천주교 신자로서 당당하게 성호를 긋고 기도를 하고 밥을 먹어야 하지만, 밖에서의 일은 큰 아빠가 볼 수도 알 수도 없으니, 그것까지 강요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는, 그리고 큰 아빠 앞에서는 반드시 성호를 긋고 '식사 전 기도'를 하고 밥을 먹어야 한다. 네가 그것마저도 지키지 않는다면, 그런 식으로 큰 아빠를 무시한다면 큰 아빠는 너와 함께 밥을 먹을 수 없다. 너와 함께 밥을 먹을 수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생각해 보거라."

 녀석은 성당의 학생미사에 여러 번 가지 않고도 갖다 왔다고 거짓말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 거짓말은 쉽게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그때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큰 아빠는 거짓말을 가장 싫어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놈이 거짓말하는 놈이다. 거짓말을 잘하는 놈은 그 어떤 나쁜 짓도 다 할 수 있는 놈이다. 짧은 한 세상을 살면서 절대로 비겁한 놈은 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큰 아빠는 다른 것은 다 용서할 수 있어도 주일 미사에 빠지는 것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큰 아빠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주일미사 참례다. 주일미사에 빠지면, 또 주일미사에 빠지고도 또다시 미사에 갔다 왔다고 거짓말을 하면, 그때는 큰집에서 살지 말고 네 아빠 집에 가서 너 혼자 밥해먹고 살아야 한다."

 녀석이 중학교 2학년 시절에는 녀석에게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었다. 2007년 5월 7일(월)에 피붙이 겨레붙이 인연지기들에게 띄운 '가족 메일' 안에 기록된 내용을 그대로 소개해 본다. 

 "큰 아빠는 명색이 소설가다. 돈을 많이 벌든 적게 벌든 고료라는 이름의 돈이 생기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좋은 글을, 즉 좋은 상품을 독자들에게 제공해야 할 책임을 안고 늘 긴장 속에서 작업을 한다. 그리고 큰 아빠는 주로 새벽과 오전에 작업을 하고, 저녁에는 대개 인터넷으로 읽는 일을 한다.

큰 아빠가 작업을 하지 않고 인터넷을 할 때는 거실의 텔레비전을 켜놓고 네가 좋아하는 스포츠를 보고 영화를 보아도 상관없다. 그런데 큰 아빠가 가끔 바쁜 글이 있을 때는 밤에도 작업을 한다. 그럴 때는 네가 상황을 눈치채고 양보를 해야 한다. 큰 아빠가 이 집을 장만할 때는 별도의 집필실을 가질 생각이었다. 그러나 너희들과 함께 살게 된 관계로 별도의 집필실을 포기하고 거실에서 작업을 하게 되었다.

자기 집을 갖고 사는 작가 치고 집필실을 갖지 못하고 공동 공간인 거실에서 글을 쓰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다. 그러니 네가 큰 아빠의 처지를 잘 살펴서 상황에 따라서는 배려를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큰 아빠는 주변이 어수선하거나 깨끗지 못하면 정서 교란을 느끼는 사람이다. 책상 위 볼펜 하나라도 제 자리에 있지 않으면 즉시 그것을 알아채고 신경이 쓰일 정도로 예민한 사람이다. 그런 큰 아빠는 거실뿐만 아니라 안방도, 할머니방도, 또 네 방에도 신경을 쓴다.

네가 학교 간 뒤에 네 방에 들어가서 잠옷과 옷가지들이 동서남북으로 널려 있는 풍경이며, 과자봉지와 과자부스러기가 그대로 방바닥과 책상 위에 널려 있는 것을 보면 한숨을 나오고 슬퍼진다. 거실 그릇장 서랍에 있어야 할 손톱깎이를 네 방에서 발견할 때도 한숨이 나온다. 사용한 물건은 반드시 제 자리에 갖다 놓고, 네 방만이라도 스스로 정리를 하고, 옷가지만이라도 보기 좋게 벗어놓았으면 참 좋겠다. 그런 습관을 잘 기르면 나중에 커서 군대 갔을 때 큰 도움이 된다."

 이런 내용의 얘기를 딱딱하지 않게 부드러운 소리로 웃음을 섞어가며 말해 주었다. 그런데 녀석이 돌연 "전 군대 가지 않고 방위 갈 건데요"라고 해서 가족 모두 헛심 빠지는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방위도 일정 기간 군부대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를 했지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큰아버지의 훈계나 가르침이 처음에는 거의 실효가 없었다는 점이다. 아이는 큰아버지 앞에서 식사 때 성호를 긋고 기도를 하면서도, 또 주일에 성당에 가면서도 썩 내켜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제 손으로 방 청소 한번 하지 않는 버릇은 여전했다.

 그런데 중3이 되고 학년말이 되면서 태도가 확연히 달라졌다.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사촌형 때문이었다. 사촌형이 대학 수능시험 후 일찍 집에 내려온 덕에 녀석은 사촌형과 오래 함께 생활할 수 있었다. 사촌형제들 사이에는 많은 대화가 오가는 것 같았다. 녀석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주는 사람은 아빠도 큰아버지도 할머니나 큰어머니도 아닌 사촌형이었다.

 녀석은 성격이 소심한 편이었다. 수학여행 때마다 큰 엄마가 김밥을 싸주고, 담임 선생님께 갖다 드리라고 별도로 싸주는 김밥을 한 번도 가져가지를 않았다. 번번이 거부를 했다. 한번은 이유를 물으니, "선생님께 김밥 갖다 드리는 것을 다른 아이들이 보면 '왕따' 당해요"하는  것이었다. 3학년 봄 소풍 땐가, 선생님 김밥을 한번 가져간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이들에게 도둑을 맞았다나…. 그것도 실은 의도적으로 도둑을 맞은 것이었다.    

 큰 엄마가 정성스럽게 싸준 김밥을 한 번도 담임 선생님께 갖다 드리지 못했을 정도로 소심하고 수줍던 녀석이 장족의 발전을 했다. 점점 말도 잘하고, 할머니와 큰 엄마에게 이것저것 부탁을 하거나 요구할 줄도 알더니, 고등학교 기숙사에 입소한 다음날 저녁에는 큰 아빠와 할머니께 안부 전화도 했다.

 대견스럽고 고마워지는 마음 한편으로, 그런 안부 전화를 엄마에게는 할 수 없는 녀석의 처지가 일순 다시금 가슴을 아프게 옥죄는 것 같았다. 아내는 어제 저녁 퇴근을 하면서 정육점에 들러 쇠고기 안심을 네 근이나 샀다. 냉동실에 잘 두었다가 규왕이가 주말에 외박이라도 나오면 맛있게 요리해서 먹일 생각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큰 엄마가 아무리 잘해 주어도 엄마 같지는 않을 텐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는데, 녀석이 3년 동안 생활했던 빈방을 보자니, 그런 생각이 더욱 새록새록 피어오르며 가슴이 짠해지는 것이었다.

 비록 그렇더라도, 그 누구도 엄마의 빈자리를 대신 채워줄 수는 없겠지만, 고등학생이 되고 집을 떠나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된 녀석이 세월과 함께 점점 더 어른스러워지고, 타고난 성품을 잘 유지하면서 바르고 착하고 씩씩하게 성장하기를 간절히 빌며 성호를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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