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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의 성>, 사랑보다 일을 택하다

등록|2009.03.06 10:44 수정|2009.03.06 10:44

▲ <유리의 성>의 출연진들은 모두 고른 연기력을 선보이며 작품의 주제의식을 잘 표현해냈다. ⓒ SBS





 "…그리하여 신데렐라와 왕자님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어렸을 적 동화책을 읽을 때에는 그게 끝인 줄 알았다. 서로 사랑하는 남녀 둘이 결혼했으니 평생 행복하게 사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왕자의 백마에 올라탄 신데렐라와 왕자가 사이좋게 사라지는 삽화를 보며 얼마나 가슴이 뿌듯했던지. 그런데 자라면서 머리가 굵어지고 생각이 많아지고 보고 들은 게 늘어갈수록, 신데렐라와 왕자가 과연 끝까지 행복하게 잘 살았을까 하는 의문이 차곡차곡 쌓였다.

 계모와 새언니들의 구박으로 하루하루를 고달프게 살아가던 신데렐라, 그리고 그런 그녀를 구원한 왕자, 동화책에서는 왕자의 주변인물이라고 해봤자 신발을 들고 따라 다니는 시종이 전부이지만, 현실세계에도 그럴 리 없다. 왕자가 있으니 왕도 있고 왕비도 있을 것이고, 그 밖에 무수한 왕족들과 귀족들이 존재할 것이다. 졸지에 왕족이 된 신데렐라, 그녀는 왕자비가 되어 과연 행복하게 살았을까?

 바로 여기서부터 신데렐라 이야기의 딜레마는 시작된다. 그나마 동화책 속의 신데렐라는 사정이 나은 편이다. 계모와 새언니들에게 구박받아 졸지에 허드렛일이나 하는 식모살이 신세가 되었지만 어쨌든 태생이 '귀족'이었으므로, 적어도 왕자와 결혼할 자격은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드라마 속의 신데렐라 이야기는 그것보다 사정이 훨씬 나쁘다. 대부분의 여주인공들이 보잘것없는, 못 사는 집안 출신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왕자들은 대개 재벌 2세, 또는 3세쯤 된다.

 지난 1일 종영한 SBS 주말드라마 <유리의 성>은 이런 신데렐라 이야기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세밀하게 그려냈다. 종전의 신데렐라류 드라마가 신데렐라와 왕자의 결혼 전 역경에 초점을 맞추고 둘의 결혼을 해피엔딩으로 그려 끝맺었다면, <유리의 성>은 지금까지 거의 다뤄지지 않았던 결혼 이후에 신데렐라가 겪는 여러 고난과 어려움을 현실감 있게 그려내 호평을 받았다. 매회 20%가 넘는 안정적인 시청률은 덤으로 딸려온 부상이었다.

▲ 민주는 이혼 후 그토록 바라던 뉴스 앵커가 된다. ⓒ 화면캡쳐




 민주(윤소이 분)는 신입 아나운서로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고 살아간다. 분식집을 하는 어머니와 새아버지, 그리고 성이 다른 두 동생과 함께 근근이 살아가는 어려운 가정 형편이지만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는 당찬 여성이다. 어느날 그녀에게 호감을 보이는 준성(이진욱 분)이 다가온다. 그런데 이 남자, 준성은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유성그룹의 차남이자 후계자였다. 이 말도 안 되는 환경의 차이에 냉랭하게 굴던 민주는 그러나 점점 준성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데….

 결국 준성의 어머니인 인경(박원숙 분)이 민주에게 "헤어지든지 결혼하든지 양자택일하라"는 최후통첩을 하게 되고, 고민하던 민주는 준성과 결혼한다. 준성은 체면을 목숨보다 중요시하는 가풍 속에서 사랑하는 민주 하나만큼은 어떻게든 지켜줄 수 있을 거라 믿었고, 민주는 자신의 진심을 보이다보면 언젠가는 인정받을 거라 믿었지만 불행히도 둘의 믿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 났다.

 "결혼한 이상 며느리도 내 자식이니 내 뜻에 따라야 한다"는 준성 아버지 두형(박근형 분) 앞에서 준성은 번번이 물러날 수 밖에 없었고, 체면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인경에게 자존심만 내세우는 민주는 도무지 예쁜 구석이 없는 며느리였다. 크고 호화로운 대저택에서 명품으로 치장하고 맛있는 것들만 먹고 살게 되었지만 민주는 늘 자신의 집이 그리웠다. 후줄근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삼겹살을 넣어 끓인 김치찌개를 먹더라도 정이 가득한 친정에서 살고 싶었다.

 이처럼 <유리의 성>은 환경과 문화의 차이, 그리고 가치관의 차이를 결코 좁힐 수 없는 두 인물, 인경과 민주의 갈등을 그려낸다. 대부분의 신데렐라류 드라마가 종국에 가서는 시어머니도 며느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유리의 성>에서의 인경은 끝까지 자신의 가치관을 고수하며 타협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민주 또한 갈등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의견과 고집으로 버티며 머리 숙이려 하지 않는다.

▲ 엔딩 컷으로 민주와 석진의 만남을 보여준 건 시청자를 위한 제작진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 화면캡쳐




 이런 갈등은 비단 이 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맏이인 규성(장현성 분)과 유란(양정아 분) 부부는 겉보기엔 완벽한 부부이지만 실상은 위선이라는 보호막을 겹겹이 둘러친 위태로운 사이였다. 둘째인 준희(유서진 분)는 10년 전 사랑하는 사람과 억지로 헤어지게 만든 자신의 부모에게 깊은 원망을 하며 매일 술로 살아가다 결국 이혼하고 돌아온다. 이혼한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옛 애인인 석진(김승수 분)을 다시 만나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석진과의 재혼을 허락받은 준희는 기뻐하지만 그 이면에, 두형이 석진을 규성의 정계 진출의 발판쯤으로 이용하려 하는 야심이 있었음을 엿본 이후 괴로워하다 결국 석진과 다시 헤어지고 만다. 이처럼 유성그룹의 세 형제들은 모두 '사랑'해서 괴로워지고 힘들어한다. 통상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사랑은 묘약이고 최선의 해결책으로 그려지지만, <유리의 성>에서 '사랑'은 자신과 상대 모두를 힘들어지게 만드는 '독약'이 된다.

 <유리의 성>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말하고 있는 건 바로 '자아'이다. 작가는 드라마를 통해 유성그룹이라는 큰 성 안에 갇혀 매몰되어 가는 자아를 되찾아 '누구의 며느리' '누구의 아내'가 아닌 '아나운서 정민주'로 우뚝 서야 한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달했다. 드라마 내내 "~답다" 혹은 "~답지 않다"는 대사가 많았던 이유 역시 그와 같다. 사랑이 인생의 전부인양 말하는 드라마들의 사랑 타령 속에서, 사랑보다 중요한 건 '일'을 통해 '자아'를 찾고 스스로의 자존감을 세우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 시간대인 주말 저녁 9시 타임에 내보내는 주말 드라마치곤 가지는 주제의식도 남다르고, 분위기도 내내 침울하다. '대체 이 드라마에서 행복한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거냐?'며 비아냥대도 할 말이 없을 만큼, 드라마는 51회 내내 시종일관 무겁다. 이런 불리한 점 속에서도 <유리의 성>이 20% 중반의 높은 시청률로 사랑받을 수 있었던 까닭은 허황되지 않고 개연성 있는 이야기의 짜임새와 배우들의 호연에 있다. 기존의 신데렐라류 드라마가 범하는 구태의연한 실수나 과장도 드물었고, 주연 조연 할 것 없이 출연 배우들 모두 고른 연기력을 선보이며 작품의 주제의식을 잘 표현했다.

 결국 준성과 이혼한 민주는 한동안 이혼의 아픔과 타인들의 굴절된 시선 속에서 많이 힘들어했지만 묵묵히 일에 매진했고, 결국 바라던 뉴스 앵커가 됐다. 준희는 파리로 가서 하고 싶었던 사진 공부를 하고, 석진은 뉴스 전문 채널로 자리를 옮겨 역시 일에 전념하고 있다. 규성과 준성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있는 모습을 끝으로 드라마는 마무리된다. 서로에게 애틋한 감정을 갖고 있었던 석진과 민주가 다시 만나는 장면을 엔딩 컷으로 한 것은 그래도 '사랑'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는 시청자를 위한 제작진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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