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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없애야 말 된다 (172) 운명적

― ‘운명적으로 아는’, ‘운명적으로 가두어’, ‘운명적인 만남’ 다듬기

등록|2009.03.06 18:58 수정|2009.03.06 18:59
ㄱ. 운명적으로 아는 듯했던

.. 찔레꽃 같던 그 애 얼굴 / 어리지만 죽음과 슬픔을 운명적으로 아는 듯했던 / 그 애의 희미한 웃음, 낮은 말소리 ..  《양정자-내가 읽은 삶》(실천문학사,2004) 17쪽

시에 쓴 말이지만, "희미(稀微)한 웃음"은 "엷은 웃음"이나 "어렴풋한 웃음"이나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처럼 다듬어 봅니다. 시에 쓰는 말이라 해도 얄궂게 쓴 말은 다듬어 주어 한결 살갑고 알뜰한 문학으로 자리매기도록 도와주어야지 싶습니다.

 ┌ 운명적(運命的) : 운명과 관련되어 있는
 │   - 운명적 만남 / 그는 그녀와 운명적 이별을 하게 되었다 / 운명적인 사랑 /
 │     그와 그녀가 붙어 살게 되면 그가 운명적으로 불행하게 될 수밖에 없을
 ├ 운명(運命)
 │  (1)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      의하여 이미 정하여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
 │   - 운명에 맡기다 /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부딪히다 /
 │     그는 딸의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  (2) 앞으로의 생사나 존망에 관한 처지
 │   - 조국의 운명을 걸머지다 / 환경 보호는 세계 전체의 운명과 관련된 일이다
 │
 ├ 죽음과 슬픔을 운명적으로 아는 듯했던
 │→ 죽음과 슬픔을 운명처럼 아는 듯했던
 │→ 죽음과 슬픔을 운명으로 아는 듯했던
 │→ 죽음과 슬픔이 어쩔 수 없는 줄 아는 듯했던
 │→ 죽음과 슬픔을 태어날 적부터 아는 듯했던
 └ …

운명은 '운명'일 뿐입니다. 운명처럼 벌어지는 일은 '운명처럼' 벌어지는 일일 뿐입니다. 그래서 구태여 '-적'을 붙인 '운명적'이라 할 까닭이 없습니다.

 ┌ 운명적 만남 → 운명 같은 만남 / 하늘이 맺어 준 만남
 ├ 운명적 이별을 하게 되었다 → 운명처럼 헤어지게 되었다
 ├ 운명적인 사랑 → 운명 같은 사랑 / 하늘이 맺은 사랑
 └ 운명적으로 → 운명으로 / 어쩔 수 없이 / 어찌할 길 없이

우리들은 우리 일이 우리 힘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리라 느끼면서 '운명'에 맡기기도 하지만, '하늘'에 맡기기도 합니다. 이제는 어디로 물러서거나 비켜설 수 없는 곳에 내몰렸다면 '운명'에 부딪혔다고 하지만, '벼랑'에 부딪히거나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다고도 합니다. 딸아이나 아들아이가 어버이 먼저 죽은 일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도 하나, '하늘 뜻'이나 '하느님 뜻'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나라 '운명'을 걸머진 사람입니다만, 우리 나라 '앞날'을 걸머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우리 삶터를 아름답고 깨끗하게 지키는 일은 세계 모두한테 '운명'이 걸린 일인데, '죽느냐 사느냐' 또한 걸리고 '삶과 죽음' 또한 걸리며 '목숨'이 걸리기도 합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 우리들이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지기도 하듯, 우리들 말씀씀이 하나와 글씀씀이 하나는 우리 삶을 북돋우기도 하고 굴러떨어뜨리기도 합니다. 우리 말 앞날은 우리 스스로 빚어냅니다. 우리 삶은 우리 손으로 일굽니다. 우리 넋은 우리 가슴으로 다스립니다. 우리 생각은 우리 깜냥껏 다독입니다.

ㄴ. 운명적으로 가두어 놓는다

.. 삼복 여름에는 할미산 허리에서 해가 떠오르자마자 그 해는 가장 잘 달구어진 시뻘건 쇳덩이처럼 마을 전체를 무더위 속에 운명적으로 가두어 놓는다 ..  《고은-황토의 아들》(한길사,1986) 31쪽

'전체(全體)'는 '모두'로 다듬고, "무더위 속에"는 "무더위에"로 다듬어 줍니다.

 ┌ 마을을 운명적으로 가두어 놓는다
 │
 │→ 마을을 그예 가두어 놓는다
 │→ 마을을 끝내 가두어 놓는다
 │→ 마을을 남김없이 가두어 놓는다
 │→ 마을을 언제나처럼 가두어 놓는다
 │→ 마을을 어김없이 가두어 놓는다
 └ …

이 보기글에서는 '운명처럼'이라고만 적어도 되고, '운명과 같이'라 적어도 잘 어울립니다. '그예'나 '끝내'라는 말도 괜찮고, '언제나'나 '언제나처럼'도 괜찮습니다.

 ┌ 마을을 통째로 무더위에 빠지게 한다
 ├ 마을을 송두리째 무더위에 푹푹 찌게 가두어 놓는다
 ├ 마을을 온통 무더위에 허우적거리도록 가두어 놓는다
 └ …

무더운 여름에는 푹푹 찌는 어느 마을을 이야기합니다. 이 마을은 해마다 '어김없이' 푹푹 찌는 무더위가 찾아왔다고 하는군요. 그러면 '꼭'이나 '반드시'를 넣어도 될 테고, '예나 이제나'를 넣어도 됩니다. 무더위에 가둔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나 '빠져나오지 못하도록'이나 '허우적거리게'를 넣어 보아도 되고요. 뜻을 살피고 느낌을 돌아보면서 알맞춤하게 넣을 낱말과 말투를 찾아 줍니다.

ㄷ. 운명적인 만남

.. 그리고 며칠 후, 시튼과 살쾡이는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  《이마이즈미 요시하루(글),다니구치 지로(그림)/김완 옮김-시튼 (2)》(애니북스,2007) 26쪽

"며칠 후(後)"는 "며칠 뒤"로 고치고, "만남을 갖게 된다"는 "만나게 된다"나 "만난다"로 고쳐 줍니다.

 ┌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
 │→ 운명처럼 만나게 된다
 │→ 비로소 만나게 된다
 │→ 바야흐로 만난다
 └ …

운명이란 둘 사이를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움직이는 흐름이나 힘입니다. 좁은 우물에서 꺼내어 주는 흐름이기도 하고, 좁은 우물에 갇히게 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생각하지 못하던 세상을 보도록 하는 흐름이면서, 생각은 했으나 살갗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던 일을 깨우치는 힘입니다.

 ┌ 잊을 수 없는 만남이 이루어진다
 ├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만남이 이루어진다
 └ …

운명처럼 만나는 둘은 오래오래 첫 만남을 잊지 못합니다. 운명처럼 만나 부대끼는 둘은 언제까지나 서로 얼키고 설키며 지내던 일을 되새깁니다. 머리에 남고 몸에 남으며 가슴에 남습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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