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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없애야 말 된다 (175) 과학적

― ‘과학적이지 못합니다’, ‘과학적 개선’, ‘과학적이라는 생각’ 다듬기

등록|2009.03.16 14:12 수정|2009.03.16 14:12
ㄱ. 과학적이지 못합니다

..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을 덮어두고 생물학적 산소요구량(BOD) 따위의 기준으로 헤아리는 것은 너무나 과학적이지 못합니다 .. <잘 먹겠습니다>(요시다 도시미찌/홍순명 옮김, 그물코, 2007) 47쪽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差異)가 있는 것을"은 "하늘과 땅만큼 다름을"로 손봅니다. '생물학적 산소요구량'이라는 말은 좀 쉽게 풀어서 쓰면 어떨까요. 이렇게 적고 'BOD'라는 말을 묶음표를 치고 넣는다고 해서 알아듣기 좋은 말이 되지는 않아요. "따위의 기준(基準)으로"는 "따위 잣대로"로 다듬어 줍니다.

┌ 과학적(科學的) : 과학의 바탕에서 본 정확성이나 타당성이 있는
│ - 과학적 사고 / 과학적 설명 / 과학적인 탐구 / 과학적으로 살피다 /
│ 탐정은 매우 과학적인 방법으로 사건을 풀어 나갔다
├ 과학(科學) :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지식

├ 너무나 과학적이지 못합니다
│→ 너무나 과학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 너무나 과학에서 빗나가 있습니다
└ …

과학을 바탕으로 생각한다면 "과학을 바탕으로 생각(← 과학적 사고)"하는 일입니다. 과학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과학을 바탕으로 말(← 과학적 설명)"하는 일이고요. 과학에 따라 살피면 "과학에 따라 생각(← 과학적인 탐구)"하는 일이에요. 그러나 우리들은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는 일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못하고 맙니다. '-적'을 붙여 '과학적'이 됩니다. 때로는 '수학적'이 됩니다. 때로는 '문학적'이 되고, 때에 따라서는 '철학적'이 되고 '정치적'이 되고 '경제적'이 됩니다. '-적'을 붙이면서 "어떤 학문에 바탕을 둔"을 나타낸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우리 스스로 이런 생각에 젖어들면서 우리 생각을 외려 더 두루뭉술하게 보여주고 맙니다.

┌ 과학에 따라
├ 과학을 바탕으로
├ 과학으로
├ 과학을 헤아리며
└ …

우리는 '어떤 과학'을 하는지를 밝혀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는 과학'인지를 살뜰히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바탕'인지를 낱낱이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저 과학이라면 '과학' 한 마디면 넉넉합니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사건을 풀어" 나갔다고 한다면, 이 '과학적'이란 무엇을 가리킬까요. 탐정이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과학을 아주 잘 알아서 과학을 바탕으로 문제를 풀었다는 소리일까요? 빈틈없이 살피고 하나하나 헤아리면서 앞뒤를 잘 잇는 가운데 숨겨진 모두를 알아냈다는 소리일까요? '과학을 바탕으로 삼지' 않고 '정확성'과 '타당성'을 두고 문제를 풀었다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사건을 풀"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면 '정확성(正確性)'이란 무엇일까요? "틀리지 않음, 올바름, 빈틈없음"입니다. '타당성(妥當性)'이란 무엇일까요? "옳음, 걸맞음, 알맞음"입니다. 곧, '올바르게 알맞게' 하는 일을 두고도 '과학적'이라는 꾸밈말을 넣어서 가리키는 셈입니다. "과학적 수사"란, 첫째 '과학에 바탕을 두며 하는 수사'일 수 있는 한편, '빈틈이 없이 올바르고 알맞게 하는 수사'일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쪽인지 또렷하게 밝혀야 하지만, 우리들은 그예 '과학적'이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하면서 제대로 이야기를 건네지 못합니다.

어쩌면, '과학적'은 이 두 가지를 모두 나타낸다고 말씀할는지 모르겠는데, 아주 다른 두 가지를 한 낱말로 나타내는 뜬구름 말씀씀이가 '과학'과 같을까 생각해 보면, 피식 웃음이 납니다.

ㄴ. 과학적으로 개선하고

.. 그러기 위해서는 또 학습 방법을 과학적으로 개선하고 .. <참 교육의 돛을 달고>(찌까즈 께이시/김성원 옮김, 가서원, 1990) 101쪽

"그러기 위(爲)해서는"은 '그러자면'이나 "그렇게 하자면"으로 손봅니다. '개선(改善)하고'는 '고치고'나 '가다듬고'로 다듬으며, '학습(學習)'은 '배우는'으로 다듬습니다.

┌ 과학적으로 개선하고

│→ 하나하나 고치고
│→ 차근차근 고치고
│→ 잘 살펴서 가다듬고
│→ 깊이 돌아보며 추스르고
└ …

'배우는' 방법을 '과학에 맞추어' 바꾸는 일을 생각해 봅니다. 과학에 맞추어 바꾸는 일이라면, 아무렇게나 할 수 없습니다. 하나하나 잘 살피면서 바꾸어야 합니다.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니, 차근차근 돌아봅니다. 하나씩 되짚고 차츰차츰 가다듬습니다.

그나저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과학에 맞추어' 바꾼다는 일은 무엇을 말하는지 알쏭달쏭합니다. 교사들이 하나같이 과학자가 되어서 학습 과정을 바꾼다는 소리일까요? 국어며 수학이며 사회며 역사며 '과학에 맞추어' 가르쳐야 한다는 소리일까요? 여태까지는 과학을 너무 업신여겼기에, 이제부터는 과학에 무게를 두어서 아이들을 가르치겠다는 소리일까요?

┌ 짜임새 있게 바꾸고 / 짜임새를 갖추어 바꾸고
├ 빈틈없이 다시 짜고 / 아이들한테 맞추어 다시 짜고
└ 야무지게 손보고 / 슬기롭게 손보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제까지는 아이들을 가르칠 때 '또렷한 틀거리'를 잡지 못한 채 진도 맞추기에 바빴다거나, 대입시험 따위에 매여 '아이들 하나하나를 살피지' 못했기에, 이제부터 '짜임새를 잘 갖추는' 한편, '아이들 몸과 마음을 잘 가누면'서 학습 방법을 바꾸겠다는 소리가 아니랴 싶습니다.

이리하여, 고쳐 나가는 짜임새를 야무지게 손보겠다는 소리라고 느낍니다. 슬기를 모두어 손질하겠다는 소리라고 봅니다. 빈틈이 없도록 다시 짜고, 모자람이나 어수룩함이 없도록, 빠진 구석이나 어설픈 대목이 없게끔 가다듬겠다는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ㄷ. 아주 과학적이라는 생각

..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내린 결론은 아주 과학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엄마 친구 아들>(노경실, 어린이작가정신, 2008) 30쪽

'결론(結論)'은 그대로 두어도 나쁘지 않으나 '생각'으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다만, 보기글에서 이렇게 다듬자면 앞말과 묶어서 "아무리 봐도 내가 내린 생각은"처럼 다듬습니다.

┌ 아주 과학적이라는

│→ 아주 올바르다는
│→ 아주 옳다는
│→ 아주 그럴싸하다는
│→ 아주 멋지다는
│→ 아주 말이 된다는
└ …

흔히들 과학은 '틀림이 없이 꼭 맞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터럭만큼도 어긋나지 않아야 하는 일이 과학이라고 느끼기도 합니다. 앞뒤가 딱딱 맞아야 하는 일이며, 마땅하고, 틀이 잘 짜여져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이 자리를 보면, 초등학교 어린이가 자기 생각이 아주 '과학적'이라고 느낍니다. 이야기 흐름을 살피니, '과학적'이 아닌 '논리적'을 넣거나 '합리적'을 넣어도 잘 어울리겠구나 싶습니다. 그러니까 "이치에 맞는"이나 "앞뒤가 맞는"이나 "말이 잘 되는"을 뜻한다고 하겠어요. 한마디로 말해서 '올바르다'는 소리를 '과학적' 같은 낱말을 집어넣으며 스스로 '그럴싸하다'고 느끼는 셈입니다. 둘레 어른들, 그러니까 아이 어머니나 학교 교사들이 아이들 앞에서 한결같이 읊는 '과학적'이라는 말투를 흉내내어 자기도 "과학적으로 생각한다"고 뽐내고픈 마음이었구나 싶습니다.

┌ 아주 기막히다 / 아주 기똥차다
├ 아주 훌륭하다 / 아주 대단하다
├ 아주 멋지다 / 아주 멋있다
├ 아주 놀랍다 / 아주 괜찮다
└ …

아이는 틀림없이 어른한테 말을 듣고 배웁니다(어린이책에 나온 글도 마찬가지). 어른이 쓰는 말 가운데 자기 마음에 들거나 자기가 생각하기에 멋이 있다고 느끼는 말을 따라 씁니다. 그 말이 무엇을 가리키거나 뜻하는지를 제대로 몰라도, 하나둘 어영부영 이래저래 길들고 익숙하게 됩니다. 어미게가 걷듯 새끼게가 걷는다고, 아이들은 어른들 말과 글뿐 아니라 생각과 마음과 매무새 모두를 물려받고 이어받습니다.

제가 다녔던 학교를 더듬어 보면, 국어 교사조차도 '가르치다'와 '가리키다'를 올바르게 가누어 말하던 분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제 또래 가운데에도 '가르치다'와 '가리키다'를 입으로 말할 때 올바르게 가누던 녀석이 아주 드물었습니다.

예전 국민학교에서도 '과학적 탐구'니 '과학적 사고'니 하면서, '과학적'이란 참말 무엇인지를 제대로 밝히거나 알리거나 나타내지도 않으면서 숱하게 이런 말을 썼습니다. 이제 와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자리에도 '과학적' 같은 말을 끼워넣으면서 겉멋과 겉치레를 부렸을 뿐이었는데, 교사들이든 학부모이든 우리들이든, 이런 겉말과 겉글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주 드물거나 아예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다르지 않습니다.

'기막히다'라든지 '훌륭하다'라든지 '괜찮다'라든지 '놀랍다'라든지 '멋있다'라고 할 자리에, 뜬금없이 '과학적' 같은 말투를 척척 집어넣으면서 뽐내거나 자랑하거나 으슥대기 일쑤였습니다. 이런 흐름은 요즈음도 마찬가지라고 느낍니다. 말로 겉멋을 키우고 글로 겉치레를 하면서 정작 알맹이는 하나도 없기 일쑤입니다. 말로 몸피를 부풀릴 줄은 알아도, 말에 사랑과 믿음을 담을 줄은 모릅니다. 말로 지식자랑은 할 줄 알아도, 말로 지식을 즐겁게 나눌 줄은 모릅니다.

┌ 아무리 봐도 내 생각은 아주 옳았습니다
├ 아무리 봐도 내 생각은 아주 빈틈이 없었습니다
├ 아무리 봐도 내 생각은 아주 멋졌습니다
├ 아무리 봐도 내 생각은 아주 그럴싸했습니다
└ …

군더더기라는 옷은 입히면 입힐수록 커집니다. 튀김옷은 튀기면 튀길수록 더 부풀어오릅니다. 알맹이는 아주 작거나 아예 없기조차 한데, 껍데기만 지나치게 커집니다. 우리들은 말을 할 때건 글을 쓸 때건, 그리고 생각을 할 때건 삶을 꾸릴 때건, 겉옷을 키우는 움직임이 아니라 알맹이를 단단하고 야무지게 돌보는 움직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껍데기는 이제 그만입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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