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마해주는 시인, "시는 내 업보"
굳이 안성시민회관 앞에서 미용실을 하는 김정조 시인의 속내는?
"시는 먹고 살만 한 사람들이나 하는 거 아녀?"라고 김정조 시인(56세, 미용사)에게 묻는다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올시다"라고 대답할 것이 분명하다. 사람들이 어려울 때 일수록 또 다른 출구를 찾으려고 시를 더 찾게 된다는 것을 그녀는 목격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열린 중앙대(안성 캠퍼스) 평생교육원 '시 창작반'에는 청소부, 미용사, 편의점원, 가정주부 등으로 구성되어 모집 정원이 꽉 찼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 그녀 또한 예순이 다 되가는 나이지만, 요즘도 거기서 소위 '열공'중이다.
그렇게 된 것은 이 일이 있고 부터였다. 14년 전 어느 날, 공장에서 힘들게 일하다 우연히 창밖으로 내다 본 은행나무 한 그루에 어렸을 적부터 키워왔던 '시의 전설'이 그녀의 마음에서 솟아났었다. 그렇게 탄생한 시가 '겨울나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순간은 항상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었던가.
그 후 시를 쓰려면 몸이 자유로워야 함을 실감하고 일단 시 쓰기에 자유로운 직업을 택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자본이 적게 들어가는 일, 바로 그녀가 택한 것은 미용사였다.
그렇다면 미용실을 어디로 구했을까. 남들은 좋은 길목에 자리 잡아 돈을 벌려고 할 때 그녀는 시 쓰기 좋은 곳을 찾아 떠났다. 그렇게 고르고 고른 곳, 지금의 미용실 자리. 1년 넘게 나가지 않고 비워져 있었던 그 자리를 택한 이유는 단 한 가지. 시민회관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는 것. 시민회관 옆에 있으면 시낭송회와 시화전 등을 언제나 볼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시작한 미용실이 어언 14년 째. 그동안 별의별 손님들의 머리를 만졌다. 말하기보다 들어야 하는 직업이었다. 십 수 년 째 매 맞으며 사는 주부, 6.25 전쟁 때 미군·북한군·한국군으로부터 차례로 강간당한 이후 질곡의 삶을 살아야 했던 칠순 할머니, 눈이 보이지 않은 채로 고생하며 살았던 맹인협회 회장 등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시로 탄생했다.
그들은 마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듯 말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걸 들은 그녀 자신이 오히려 인생관이 달라졌다. 자신의 삶이 최고 고단한 줄로만 알았던 미용실 하기 전의 생각을 벗어 버리고 자신 보다 고단한 인생이 훨씬 많음을 깨닫게 된 것은 크나큰 인생의 힘이 되었다. 미용실에서의 14년은 좀 더 넓은 혜안으로 삶을 만나고 시를 만나게 했던 것이다.
그녀가 굳이 시를 자신의 업보라고 말하는 데는 더 질긴 사연이 있다. 바로 그녀의 아버지가 시인이 되는 게 꿈이었던 것. 하지만 가장으로서 삶의 치열한 전선에서 부대끼다보니 아버지의 꿈은 이상이었을 뿐. 못다 이룬 꿈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려고 어렸을 적부터 자녀들에게 책을 읽히려 부지런히 책을 사다 나른 아버지 덕분에 책은 원 없이 읽었다는 그녀.
그런 어린 시절 탓에 초중고 시절은 모두 문예부에서 문학소녀로 꿈을 키웠다. 가정 형편 상 비록 시 쓰는 대학은 못 갔지만, 돌고 돌아 이제 육순 가까운 나이에 평생교육원에서 '시 쓰기'를 공부하고 있다. 사실 아버지의 바람은 헛되지 않아 여동생은 소설가, 언니는 희곡작가, 자신은 시인으로 살아가고 있기도 하다.
뿌리치려해도 뿌리 칠 수 없었던 '시의 유혹'은 오늘도 그녀가 4평 남짓 되는 미용실에서 '파마해주는 시인'으로 그렇게 살아가게 하고 있다. 미용사는 현실, 시인은 이상. 하지만 그 둘은 이제 그녀의 시에서 착하게 만나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그녀는 겪을 만큼 겪었기에 이제는 알고 있다. 파마해주며 나오는 시가 진짜 자신만의 시임을, 그래서 '시는 나의 업보, 시는 내 삶의 경전'이라고 고백하고 있음을.
오늘도 그녀의 미용실에는 14년 째 단골인 '안성댁 할머니'가 파마를 하러 왔다.
겨울나무
김정조
비추어 다오. 따사로운 해!
공장 창밖으로 보이는 은행나무 한 그루.
빛을 받아 은회색으로 빛나고 있다.
비추어 다오. 따사로운 해!
등 뒤로 비추어 다오.
나의 노동은 그늘진 곳.
기계소리에 묻혀
젊은 피의 들끓음도 곧 잠잠해지리라.
거기서 있었던가
잎을 떨군 나무
한줌의 햇살도 온몸으로 받으며
누구 시련에 방황하는 자, 있는가
혹독한 찬바람에 인고하는,
나의 헐벗은 몸뚱이를 기억해주오.
"기도하며 수행 중이오니
잠시 침묵 하시오"
▲ 김정조시인미용기계 앞에 앉아서 자신의 삶과 시를 이야기 하고 있는 김정조 시인. 그녀는 동네에서 흔히 만나는 마음씨 좋은 아줌마의 모습이다. 사실 그녀의 미용실도 동네 골목에서 만날 법한 조그마한 미용실이다. 그녀는 거기서 자신의 삶과 시를 써내려 가고 있다. ⓒ 송상호
그렇게 된 것은 이 일이 있고 부터였다. 14년 전 어느 날, 공장에서 힘들게 일하다 우연히 창밖으로 내다 본 은행나무 한 그루에 어렸을 적부터 키워왔던 '시의 전설'이 그녀의 마음에서 솟아났었다. 그렇게 탄생한 시가 '겨울나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순간은 항상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었던가.
그렇다면 미용실을 어디로 구했을까. 남들은 좋은 길목에 자리 잡아 돈을 벌려고 할 때 그녀는 시 쓰기 좋은 곳을 찾아 떠났다. 그렇게 고르고 고른 곳, 지금의 미용실 자리. 1년 넘게 나가지 않고 비워져 있었던 그 자리를 택한 이유는 단 한 가지. 시민회관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는 것. 시민회관 옆에 있으면 시낭송회와 시화전 등을 언제나 볼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시작한 미용실이 어언 14년 째. 그동안 별의별 손님들의 머리를 만졌다. 말하기보다 들어야 하는 직업이었다. 십 수 년 째 매 맞으며 사는 주부, 6.25 전쟁 때 미군·북한군·한국군으로부터 차례로 강간당한 이후 질곡의 삶을 살아야 했던 칠순 할머니, 눈이 보이지 않은 채로 고생하며 살았던 맹인협회 회장 등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시로 탄생했다.
▲ 시동인지에 실린 김정조 시인의 시를 책 그대로 찍은 사진이다. 시의 내용엔 그녀의 일상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다. ⓒ 송상호
그들은 마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듯 말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걸 들은 그녀 자신이 오히려 인생관이 달라졌다. 자신의 삶이 최고 고단한 줄로만 알았던 미용실 하기 전의 생각을 벗어 버리고 자신 보다 고단한 인생이 훨씬 많음을 깨닫게 된 것은 크나큰 인생의 힘이 되었다. 미용실에서의 14년은 좀 더 넓은 혜안으로 삶을 만나고 시를 만나게 했던 것이다.
그녀가 굳이 시를 자신의 업보라고 말하는 데는 더 질긴 사연이 있다. 바로 그녀의 아버지가 시인이 되는 게 꿈이었던 것. 하지만 가장으로서 삶의 치열한 전선에서 부대끼다보니 아버지의 꿈은 이상이었을 뿐. 못다 이룬 꿈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려고 어렸을 적부터 자녀들에게 책을 읽히려 부지런히 책을 사다 나른 아버지 덕분에 책은 원 없이 읽었다는 그녀.
그런 어린 시절 탓에 초중고 시절은 모두 문예부에서 문학소녀로 꿈을 키웠다. 가정 형편 상 비록 시 쓰는 대학은 못 갔지만, 돌고 돌아 이제 육순 가까운 나이에 평생교육원에서 '시 쓰기'를 공부하고 있다. 사실 아버지의 바람은 헛되지 않아 여동생은 소설가, 언니는 희곡작가, 자신은 시인으로 살아가고 있기도 하다.
뿌리치려해도 뿌리 칠 수 없었던 '시의 유혹'은 오늘도 그녀가 4평 남짓 되는 미용실에서 '파마해주는 시인'으로 그렇게 살아가게 하고 있다. 미용사는 현실, 시인은 이상. 하지만 그 둘은 이제 그녀의 시에서 착하게 만나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그녀는 겪을 만큼 겪었기에 이제는 알고 있다. 파마해주며 나오는 시가 진짜 자신만의 시임을, 그래서 '시는 나의 업보, 시는 내 삶의 경전'이라고 고백하고 있음을.
오늘도 그녀의 미용실에는 14년 째 단골인 '안성댁 할머니'가 파마를 하러 왔다.
겨울나무
김정조
비추어 다오. 따사로운 해!
공장 창밖으로 보이는 은행나무 한 그루.
빛을 받아 은회색으로 빛나고 있다.
비추어 다오. 따사로운 해!
등 뒤로 비추어 다오.
나의 노동은 그늘진 곳.
기계소리에 묻혀
젊은 피의 들끓음도 곧 잠잠해지리라.
거기서 있었던가
잎을 떨군 나무
한줌의 햇살도 온몸으로 받으며
누구 시련에 방황하는 자, 있는가
혹독한 찬바람에 인고하는,
나의 헐벗은 몸뚱이를 기억해주오.
"기도하며 수행 중이오니
잠시 침묵 하시오"
덧붙이는 글
이 인터뷰는 지난 12일 안성시민회관 앞 예인 미용실(031-675-6535 )에서 이루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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