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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이 양민을 괴롭히는 무장 폭도?

[책 속으로 떠난 역사 여행 36] 김삼웅의 <안중근 평전>

등록|2009.03.15 12:48 수정|2009.03.15 17:08
1994년 16세

<표지>안중근 평전 ⓒ 시대의 창

부친을 도와 동학을 빙자, 양민을 괴롭히는 무장 폭도들을 진압.
김이려 규수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둠.(587쪽, 연보 중에서)

책 말미에 부록으로 실린 연보의 한 구절이다.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숨이 탁 막혔다. <녹두장군 전봉준 평전>을 읽으며 느꼈던 감동이 <안중근 평전>을 읽으면서 생생하게 되살아났는데 이 구절 때문에 와르르 무너져버리는 느낌이었다.

한편으로는 이해해보려 애쓰기도 했다. 안중근이 16세의 나이로 부친을 따라 해주 지방의 동학농민군 진압에 뛰어들었을 때, 동학농민군을 단지 무장 폭도라 여겼던 안중근의 입장을 반영한 구절이라고 생각한다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지 싶었다. 그래도 불편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안중근 일가의 동학농민군 진압

우리 근현대사 속 인물들을 보면 서로 다른 상황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고부 봉기에서 가렴주구의 원흉으로 지목되었던 조병갑, 동학의 2대 교주로 40여 년을 보따리에 의존해서 떠돌면서 동학 전파에 앞장섰던 최시형, 후일 최시형은 강원도 원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조병갑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전근대적 봉건제도를 걷어내고 근대국가를 수립하고자 갑신정변의 주역이 되었던 서광범, 고부 봉기부터 우금치 전투 이후 체포 처형되기까지 고린내 나는 상투 속에서 부패한 조선 왕조에 저항했던 전봉준, 후일 서광범은 법무대신이 되어 전봉준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다.

안중근과 김구의 경우도 정반대 상황에서 역사의 무대로 뛰어든다. 16세 나이로 동학농민군 진압에 앞장섰던 안중근, 18세의 나이로 동학농민군 아기접주 소리를 들으며 봉기에 앞장섰던 김구, 후일 안중근과 김구는 무너지는 국권을 회복하고자 항일운동의 대열에 합류한다.

안중근은 왜 동학농민군 탄압에 앞장섰을까. 일찍이 개화파 세력에 가담했고, 천주교로 개종한 뒤 서구 문물의 수용에 앞장섰던 부친 안태훈의 영향 때문에 안중근은 개화적 인식을 갖추게 된다.

개화적 인식을 갖춘 안중근은 동학농민군과 추구하는 바가 달랐다. 반봉건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도 있었지만, 개화파가 서구의 문물을 수용하려 했던 데 비해, 동학농민군은 외세를 철저하게 배척했기 때문이다. 반외세의 입장을 추구하던 동학농민군의 눈에 개화 세력은 외세의 앞잡이로 보였고, 개화를 추구하던 세력에서 본다면 동학농민군의 봉기는 민란에 불과했고 동학농민군은 폭도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부록 한 구절도 소홀히 다루지 않았으면

<안중근 평전>을 쓰기 위해 저자는 20여 년간 국내 뿐 아니라, 북한, 중국, 러시아, 일본 등지에서 자료를 수집했다. 기존에 썼던 평전과는 달리 오마이뉴스에 3개월 반 동안 107회에 걸쳐 연재한 뒤 책으로 출판됐다.

이처럼 치열한 노력 속에서 탄생한 <안중근 평전>은 600여 페이지에 이를 정도로 두꺼운 책이지만 읽는 재미도 있고 감동도 뒤따른다. 32년의 짧은 생애를 불꽃처럼 살다 간 안 의사의 뜨거운 삶이 책갈피갈피마다 진하게 배어 있다.

하지만 아쉬움도 있다. 동학농민군이 한낱 양민을 괴롭히는 무장 폭도였다고 서술된 부록의 한 부분. <녹두장군 전봉준> 평전을 썼고, 우리 근현대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많은 지사들의 평전을 지속적으로 쓰고 있는 저자의 책 속에 나온 것이어서 더욱 아쉽고 안타깝다.

전기와 달리 평전이 시비곡직을 제대로 밝히고 저자의 주관적 의도와 역량이 많이 반영되는 책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부록의 한 구절조차 소홀히 하지 않는 세심함이 필요하다. 소홀히 쓴 한 구절이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시대의 창/2009.1/17,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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