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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들이 '탐매'했던 야생 홍매화의 기품과 멋

백양사 고불매, 곡성 산절로야생다원 '선암매'와 7색 홍매

등록|2009.03.17 17:06 수정|2009.03.17 17:40

▲ 산절로야생다원 홍매 ⓒ 최성민



바야흐로 매화의 절기여서 지금부터 4월초까지 대한민국의 흥취를 좇는 사람들은 매화를 찾아 이곳저곳으로 몰려갈 것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해마다 이때 매화를 보러가는 것은 좋은 것이로되, 만들어 주어지는 매화나 관광물에 늘 되풀이하듯 너나없이 몰려가는 것은 주체성이나 통찰력이 없는 '무감각 관행'이라고 생각해 왔다. 즉 그런 매화나 매화여행이 선조들이 누렸던 격조높은 매화이거나 품격있는 '매화 만나기'이기엔 아쉽다는 것이다.

▲ 산절로야생다원 홍매 ⓒ 최성민


매화는 봄에 가장 먼저 피는 꽃으로, 황량하고 삭막한 겨울 끝에 환상적인 향기와 아름다운 자태로 우리에게 생기를 돋우어주는 미덕이 있어서 '꽃중의 군자'라고 할만하다. 그렇기에 기품높은 선조들께서는 눈발 날리는 늦겨울(이른 봄)에 깊은 산 모퉁이에서 향기를 던져주는 한 그루 설중매를 찾아 탐매 행보를 나서곤했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제 살아가기에 바쁜 이기심만이 냉정과 적막 속에 꽉차 흐르는 가운데, 여리지만 우아한 자태와 은은한 향기로 세상을 위로해주는 매화는 고난에 찬 세상을 아우르는 성인과도 같은 꽃이다. 선조들이 천착했던 이런 매화의 미덕을 생각하면, 매실 대량생산을 위한 장사 목적으로 개량된 매화들이 이 땅을 도배하며 '탐매' 전통의 그 '토종' 행세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는 것도 선조들의 운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뜻깊은 일일 것이다.

▲ <탐매, 그림으로 피어난 매화>전에 나온 매화 그림 ⓒ 최성민



마침 <전라도닷컴> 3월호는 '탐매, 그림으로 피어난 매화' 전시회를 소개하고 있다. 오는 29일까지 국립광주박물관에서 무료로 열리고 있다. 안내문의 글귀가 매화의 격조와 향취를 전한다.

"입춘, 우수, 경칩의 풍취라면 의당 봄을 기다리는 산야의 풍격이리라. 매화는 이런 계절의 변화를 가장 예민하게 전하는 설중군자(雪中君子). 옛 수묵화의 보편적 화재였던 매란국죽이 관념적, 사의적 대상이라 하지만, 기실 이것들이 정말 현실을 떠난 탈속의 대상이었는지는 재고해 봐야 한다. 현재의 정치, 사회적 지평 위에서 볼 때 매화를 단지 '추상'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 없는 까닭이다. 예로부터 혹독한 추위 속에서 꽃을 피우는 매화는 늘 '암울한 현실 속에서 희망을 찾는 행위'로 등치되곤 해왔으며, '탐매도' '파교심매도' '매화서옥도'와 같은 그림들이 모두 그것들…."   

▲ <탐매, 그림으로 피어난 매화>전에 나온 매화 그림 ⓒ 최성민


나는 지난 주말 '꽃중의 군자' 매화를 그리며 선조들의 탐매여행 한쪽 귀퉁이라도 흉내내보고자 남쪽으로 발길을 향했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이 장성 백양사. <전라도 닷컴> 3월호에서 본 목운(木雲) 오견규 화백이 그린 우화루(雨花樓) 옆의 고불매(古佛梅)에 반해서다. 우선 내가 좋아하는 홍매(백매는 너무 흔해서)인데다가 350 여년 세월 이리저리 고풍스런 색깔로 단아 운치있게 뻗어 오른 매화의 등걸에서 '연륜'을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고불매는 아직 피지는 않았고 나이를 이긴 듯 늙은 가지 잔 가지 가리지 않고 송글송글 꽃봉오리들을 맺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을 말해주고 있었다. 고불매는 이번 주말부터 피어나기 시작해서 다음 주말이면 많이 필 것으로 보인다.

▲ 고불매 그림 ⓒ 최성민



고불매는 '호남 5매' 가운데 하나이고 2007년 천연기념물 제486호로 지정되었다. '고불'이라는 말은 '인간 본연의 자세'라는 뜻으로 1947년 당시 스님들이 "부처의 원래 가르침을 기리자"는 뜻으로 백양사에 '고불총림' 결성했는데, 고불매는 고불총림의 기품을 닮았다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3월말부터 4월초까지 담홍색 꽃을 피운다. 나무 가득 꽃을 피워서 절집 전체와 산골짜기에 매향을 채운다.

'호남 5매' 이야기가 나온 김에, 고불매 외에 다른 것들은 전남대 대강당 앞에 있는 '대명매'(홍매), 담양 지실마을 송강 선생 넷째 아들이 살던 '계당'(골짜기 가에 있는 집)터에 남아있는 '계당매'(홍매와 백매 각각 1그루), 순천 선암사 팔상전 뒤 백매(한국 백매 중 가장 큰 나무이다), 소록도 중앙공원에 있는 수양매(가지가 수양버들처럼 뻗어내리는 매화, 전국 수양매 중에서 제일 크다. 높이 6.8미터) 등이다.

▲ 고불매 사진.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 최성민




이밖에 전국의 유서깊기로 유명한 토종 매화로는 강릉 오죽헌 '율곡매'(수세가 양호하고 수형이 좋다), 경남 산청 '단청매' 등이 있다. 여기서 우리 토종 매화의 특성이자 장점을 알아본다. 요즘 흔한 상업주의 매화와 비교해보면 좋겠다. 토종매화는 꽃은 작고 듬성듬성 달리지만 향기가 깊어서 한 그루면 집안 가득, 산골짜기 구석구석까지 향기를 전한다. 그렇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산모퉁이 어딘가에 한 그루의 토종 매화가 피면 십리밖에서 그 향기만 맡고서도 '탐매'가 가능했겠다. 또 맛이나 약효가 뛰어나서 입맛떨어지는 초여름날 매실김치 한 알만 입에 물고 오물조물해도 밥 한 그릇 비우기가 가벼웠다고 한다.

옛날 선인들이 그린 탐매도를 보면 매화가지에 매화가 한 송이씩 떨어져 이따금 달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요즘 현대화가들이 그린 매화는 꽃이 버글버글 빈틈없이 달려있다. 지금 광주국립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탐매, 그림으로 피어난 매화' 전시회에서도 요즘 화가들의 그런 매화와 옛 그림을 비교해 볼 수 있어서 재미있다.

▲ 산절로야생다원 홍매 ⓒ 최성민




그럼 이제 그림으로 보는 매화를 떠나 실제 선조들이 나섰던 탐매여행의 운치를 품고 그런 매화를 찾아 나서보자. 고불매나 선암매 등은 3월말쯤 활짝 핀다고 하니 기다리기로 하고, 풍치좋은 섬진강가인 전남 곡성군 오곡면 침곡리 '산절로 야생다원'에 그런 매화가 있다. 사실 이곳은 필자가 우리 전통차를 아끼는 몇몇 동호인들과 함께 야생 전통차 복원운동 차원에서 보존하고 있는 야생다원이다. 전에 이와 관련한 글을 올렸더니 어떤 독자께서 "자기것을 선전하는 글을 올렸다"고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는데, 상업성을 띠고 대량생산하는 곳이 아니어서 선전할 목적은 아니다.

▲ 산절로야생다원 홍매 ⓒ 최성민


다만 거기에 다른 곳에서 보기 쉽지 않은 여러색깔의 홍매화를 심어놨으니 사진으로나마 한 번 눈요기라도 하시라는 뜻이다. 많은 손님들을 불러들이고 매실제품을 장사할 목적으로 인위적으로 가꾼 곳이 아니어서과는 '난장'의 정취가 없다. 단지 홍매화가 지 맘대로 가지를 마구 뻗고 자라고 있는 곳인데, 잡목 잡초와 어우러진 모습이 선조들의 '탐매' 발길을 유혹했던 그런 매화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모습이 아닐까해서 얼핏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다. 이 매화가 고불매처럼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에 살았던 사람들의 호흡과 영혼과…, 매화 향기에 코를 갖다대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후세에 길이 전해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옷깃을 저며 보는 것도 괜찮은 봄여행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산절로야생다원 홍매 ⓒ 최성민


산절로야생다원엔 더불어 사는 다른 나무들 덕에 한겨울에도 동해를 입지 않는 싱그러운 야생 차나무 숲이 있고, 그 속에 홍매화 나무들이 등대처럼 들어서 있다. 여기엔 희귀한 토종 매화가 더 있다.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흑매화'에서 2년~3년에 걸쳐 씨를 받아다 발아시킨 2세 '화엄 흑매화'가 3년째 자라고 있다. 또 토종 '선암매'의 씨가 자란 홍매화와 백매화가 올해 10년째로 접어들면서 처음으로 꽃을 피우고 있다.

어디를 가서든 운치있는 토종 홍매화를 보게 되면, 개량종 백매화가 매화의 전부인 줄 알았던 사람들은 즐거운 충격을 느낄 것이다. 식상할 자태로 피어 향기 퍼내던지고 쉬 오그라져 버리는 매화에 비해 토종 매화가 주는 맛은 '장기하와 얼굴들'의 몸짓을 보며 그들의 노래를 듣는 일만큼이나 상큼한 느낌을 줄 것이다.

푸른 매실은 '청매실'이 아니라 '풋매실'
생물학자의 눈으로 보면 매화의 다양한 향기와 색깔 등 아름다움과 멋은 단지 특정 곤충을 유혹해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한 화장술에 다름아니다. 매화의 종족유지술은 매실로 이어진다. 그런 맥락에서 요즘 나도는 매실의 이름과 매실 수확의 적기를 생각해봄직하다.

대부분의 매실농가에서는 6월 초순 무렵이면 아직 푸른 색깔이 많이 남아있는 매실을 따서 매실주 등 각종 매실제품을 만든다. 이동이나 보관 중 매실의 원형 보존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게 유리한 점도 있다. 그러나 무슨 열매든지 설익은 상태에서는 아직 열매와 씨앗을 보호하기 위해  곤충 등 해충퇴치 성분(매실에서는 지나치게 쓴 맛 등)을 열매살에 품고 있다. 따라서 매실도 노랗게 충분히 익은 상태에서 따야 제맛과 효능이 난다는 게 필자의 체험에서 나오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잘 익은 열매는 이제 열매 안에 든 씨앗만 보호하여 잘 퍼뜨리면 되므로 열매살은 독소를 내버리고 곤충이나 사람들이 먹기 좋은 맛과 물렁한 상태로 변한다. 물론 이 물렁한 상태가 매실제품을 만들거나 상품으로 갖고 다니기에 불편하다. 시중에서 파는 매실액이 짙은 갈색을 띠고 있는 것은 설익은 매실에 남아있는 탄닌 성분 등이 산화해서 갈변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매실주에 한 알 씩 들어있는 푸른 매실도 '청매실'이 아니라 '풋매실'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매실은 익으면 노란색(백매화나 청매화의 매실)이나 빨간색(홍매실)을 띤다. 익어서도 푸른 색을 띠는 '청매실'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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