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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등록|2009.03.17 20:31 수정|2009.03.17 20:31

▲ <유고시집> ⓒ 마로니에북스

박경리 작가는 1955년 작가 김동리의 추천으로 월간 <현대문학>에 단편 '계산'을 발표했다. 그 뒤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김약국의 딸들> <토지> 등을 내놓으며 한국문학의 거목으로 자리매김했다.

1926년 경남 통영에서 장녀로 태어나 1946년 결혼해 1남1녀를 두었다. 하지만, 1950년 남편과 사별했다. 불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아 1956년 어린 아들을 잃었다. 홀로된 외로움을, 자식을 잃은 슬픔을 겪어보지 않은 자가 감히 그 심정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작가 개인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고 쓰신 39편의 시를 모아 유고집으로 출간을 한 것이다.



이 시집은 지나친 함축적 시어를 사용하지 않고, 일상적 용어로 물 흐르듯 잔잔하다. 마치 산문을 읽는 것 같다. 작가 개인의 80여년의 세월을 회상하며 쓴 시는 우리 할머니같이, 우리 어머니같이 친숙하게 다가오게 만든다. 그 속에서 삶의 지혜를 엿보며 독자로 하여금 지금의 위치에서 삶에 대해 한번쯤 반추해보게끔 한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옛날의 그 집中)

외로움이 절절히 묻어나는 시다. 그런 적막함이 외로움이 없었다면 독자로서 위대한 작가를 만날 수 있었을까? 그 적막함 속에서 위대한 문학의 씨앗이 자랐겠지만, 작가로서가 아닌 한 여성으로서는 얼마나 힘든 삶을 사셨을까?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산다는 것' 가운데)

힘들어도 청춘은 짧고 아름다웠다고.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만약, 지금 청춘이라면 얼마나 좋은 시기인지 감사한 마음을 가졌으면 싶다. 청춘이 지났다고 생각하더라도 한 개인의 인생에서는 지금 현재가 가장 청춘이기에 이 순간에 감사하며 보내야 할 것 같다.

가난하다고
다 인색한 것은 아니다
부자라고
모두가 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됨됨이에 따라 다르다 ('사람의 됨됨이' 가운데)

꿈에서 깨면
아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그 사실이 얼마나 절실한지
마치 생살이 찢겨 나가는 듯했다 ('어머니' 가운데)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
내 대답 ('일 잘하는 사내' 가운데)

평범한 삶에 대한 갈망이 묻어난다. 필부로서 평탄하게 한 여인으로 살아가고픈 마음이 절절히 묻어난다. 작가가 다시 태어난다면, 바라는 대로 평범한 한 여성으로 행복하게 사시기를 기원해본다.
덧붙이는 글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마로니에북스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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