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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볶이, 너도 변했구나...옛날 그맛이 아니야

[떡볶이의 추억] 30여 년 전, 나를 '홀렸던' 포장마차 떡볶이

등록|2009.03.22 14:00 수정|2009.03.22 14:00
언제부턴가 용돈만 생기면 그곳으로 달려갔다. 귀신에라도 홀린 것처럼. 행복했다. 그 순간만큼은. 시작은 까마득하다. 여섯 살 때부터인가. 일곱 살 때부터인가. 동네 포장마차 떡볶이에 빠진 게.

당시 살던 곳은 부산 서대신동 도랑 옆 골목이었다. 부산 구도심 마을로 산자락에 있었다. 골목에서 나온 뒤 도랑을 따라서 마을 입구까지 간 다음 시장 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포장마차가 나타났다. 아이 걸음으로도 10분 정도면 닿는 거리였다.

이빨이 '쏙' 빠져도 맛있었던 떡볶이

▲ 또 하나의 별미 국물 가래떡 생각에, 대학교 들어갈 때까지 어묵꽂이는 입에 대지 않았다. ⓒ 조경국


먹을거리는 많았다. 아이스케키도 있었고, 콩과자도 있었으며, 연탄불에 구워먹는 각종 과자들이 넘쳐났다. 국자에 설탕을 넣고 소다를 뿌려 부풀려 먹는 '똥과자'('오리떼기'라고도 하고, '뽑기'라고도 했지만 우리 동네에선 이렇게 불렀다)도 인기 있었다.

그 수많은 먹을거리 사이에서 단 하나만 뽑으라는 것은 행복한 고민이었지만, 포장마차 떡볶이는 늘 첫 순위였다. 떡 하나에 10원으로 다른 것보다 비쌌다. 10원을 내면 한 줌씩 주는 과자들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양이냐, 질이냐가 문제였다. 아마 아이는 그렇게 선택했던 것 같다. 50원 미만 되는 용돈을 받으면 양 많은 과자를 사먹었을 것이다. 100원이라는 풍족한 용돈을 받으면 곧장 떡볶이를 먹으러 갔을 것이고. 그 당시 떡볶이는 사먹을 수 있는 가장 맛있으면서도 값비싼 먹을거리였다.

대체 얼마나 맛있었느냐고? 70년대니 아마 밀가루 떡을 사용했을 거고,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내가 잘 먹었으니 아주 맵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적당히 달콤했을 것이다. 이 정도밖에 그 때 그 맛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어 아쉽지만, 다시 맛을 보면 알 수 있을 만큼 내 혀가 그 맛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빨이 썩어 흔들릴 때도 떡볶이 집으로 달려갔다. 열심히 떡볶이를 먹다가 갑자기 '딱' 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빨이 빠져서 입 속에서 맴돌았다. 그 때 기억은 뚜렷하다. 곧장 어머니께 달려가 자랑했고, 어머니는 칭찬하셨던 것 같다. 큰 고통 겪지 않고 이빨이 빠져서인지, 치과 치료비가 굳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떡볶이 가게엔 국물 가래떡도 있었다. 대표 길거리 음식 가운데 하나인 어묵꽂이가 있지 않은가. 가래떡을 꽂이에 꽂아 국물에 '푹' 담가놓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 맛은 환상이었다.

단언컨대, 대학교 들어갈 때까지 어묵꽂이는 입에 대지 않았다. 가래떡꽂이가 너무 맛있었기 때문이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포장마차에 가면 떡볶이와 가래떡꽂이 사이에서 갈등을 해야 했다. 둘 다 먹어야 하는데, 몇 개씩 나눠서 먹느냐가 문제였다.

1주일에 대략 한 번쯤 갔을(용돈이 매일 나오는 게 아니었기에) 포장마차 떡볶이와 이별을 한 것은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서였다. 마산으로 이사했기 때문이다.

그 맛이 그리워 향수병에 시달리다

도랑 옆 마을이 무에 그리 그리웠는지 심한 향수병에 시달렸다. 초등학교 내내 그랬었고,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귀뚜라미가 울던 어느 가을 추석 때 받아온 용돈을 꺼내들었다. '총알택시'를 타고 부산까지 다녀올 수 있는 돈이었다.

돈을 들고 한참을 고민했다. 한밤중에 나가다 부모님을 만나면 뭐라고 변명할 것인가. 골목을 걸어나가다 동네 어르신을 만나면 어떡하나. 다음날 부모님 귀에 소식이 들어갈 텐데 그 밤중에 어디에 갔다고 둘러댈 것인가. 어린 소년이 큰 결심을 하기엔 걱정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결국 한밤중 '총알택시' 계획은 실행하지 못했다.

그래도 해마다 전에 살던 동네에 들렀다. 큰집이 부산이었기 때문이다. 명절에 큰집에 가서 차례를 지내고 나면 혼자 몰래 나와 옛날 살던 동네를 찾아가곤 했다. 어느 날 몰래 동네를 빠져나가려다 사촌누나에게 걸렸다. 누나는 어른들이 걱정한다면 말렸지만, 이내 마음을 바꿔 함께 따라나섰다.

아마 중학교 3학년 때였을 것이다. 포장마차 떡볶이집에 다시 찾아간 것은. 흔히들 말한다. 그 때 그 맛이 나오지 않는다고. 못 살고 부족했기 때문에 맛있었던 것이라고. 그 날을 기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여전히 맛있었기 때문이다.

포장마차는 그 자리에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어쩌면 그 때부터 그 길고 긴 향수병이 사라졌는지도 모르겠다. 자연스레 나이가 들면서 옛 기억이나 감정이 희미해졌을 수도 있고, 입시라는 지루한 싸움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내겐 너무 실망스런 요즘 떡볶이들

▲ 언제부턴가 용돈만 생기면 그 곳으로 달려갔다. 귀신에라도 홀린 것처럼. 행복했다. ⓒ 조경국

서울에 올라온 뒤에 떡볶이로 유명한 신당동에 갔다. 아, 그 실망감이란. 맛있는 떡볶이집이란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옹기종기 모여서 먹어야 맛이라는 생각이 너무 뿌리 깊어서 일까. 큰 식당에서 파는 떡볶이는 호텔에서 순대를 먹는 것만큼이나 어색했다.

게다가 이쑤시개로 '콕' 찍어서 먹는 게 아니라 젓가락질이라니. 무엇보다 그 가격에 놀랐다. 더불어 라면에 계란 넣는 것도 싫어하는 나에게 다양한 퓨전떡볶이들은 정통떡볶이에 대해 실례라는 느낌이었다.

이래저래 떡볶이는 옛 추억이 돼 버렸다. 큰집도 이사를 했다. 명절에 부산에 가더라도 큰집에서 옛날 살던 집까지 가기엔 너무 멀었다. 어쩌다 부산에 가더라도 옛 동네에 들를 시간이 없었다. 여섯 일곱 살 아이는 어느덧 마흔을 앞둔 나이가 됐고, 마음 속엔 잡다한 세상이 너무나 깊이 들어와 버렸다. 설렘보다는 무덤덤함이 보다 가까운 나이.

그래도 마음으론 간절히 바란다. 그 포장마차 떡볶이가 그 자리에 있어주기를. 그 맛이 여전하기를. 너무나 쉽게 변하고 사라지는 세상에서 그래도 변치 않는 게 있음을 전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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