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스터뮤지컬 <기발한 자살여행> 포스터 ⓒ (주) 쇼팩, (주) 트라이프로
사업 실패로 모든 걸 잃은 남자는 목을 매려 하고, 휘하 부대도 임무도 없어져 버린 육군 장교는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려고 한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하필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골랐다. 그러니 서로 모른 체하고 각자 죽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서로를 죽일 수도 없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급기야 자살하려는 사람들을 모아 함께 죽기로 하고, 세 규합에 나선다. 그러고는 모인 사람들 모두 버스 한 대에 올라타 '자살여행'을 떠난다.
최근 죽음 이후의 여러 뒷이야기들 때문에 죽음 자체가 오히려 묻혀버린 듯한 신인 탤런트의 자살에서부터 지난해 가을 우리 모두를 충격에 빠뜨린 최고 여배우의 자살까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만 꼽아도 세기 어려울 정도다.
죽고 싶어하는, 그래서 자살하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의 사연은 그야말로 가지각색이다. 실연한 여자, 외로운 기러기 아빠, 정치적인 이유로 쫓기고 있는 공산당 간부, 가정폭력 피해 주부, 은퇴 여배우, 직업병에 걸렸지만 보상 받지 못한 계약직 노동자 등등.
이들은 소리친다. 결코 외로워서가 아니라고, 낭만으로 생각해서도 아니라고, 책임을 회피하는 게 아니라고. 다만, 내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리고,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가르쳐주고, 결코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고.
뮤지컬은 원작의 무대인 핀란드를 통일 한국으로 가져왔고, 사람들의 사연 또한 통일 이후에 있음직한 우리식의 이야기로 완전히 바꾸었다. 핀란드와 주변 지역을 여행하는 것 역시 백두산을 거쳐 중국으로, 또 실크로드로 가는 여정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들의 '자살여행'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한 마디로 모진 마음먹고 떠난 여행이지만 인생에 끼어드는 수많은 변수와 마찬가지로 이들의 여행 역시 파란만장이다. 그러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사람들, 혼자가 아니라 단체로 죽음의 길을 나섰다가 결국 사람 사이에서 온기를 느끼는 사람들. 거기다가 남녀 간의 사랑까지.
최근에 계속되는 자살 뉴스를 염두에 두고 발 빠르게 만들어낸 뮤지컬이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뮤지컬은 벌써 2006년도 말에 원작 소설을 뮤지컬로 만들기로 계약을 맺고 준비에 들어갔다고 한다. 음악이며, 무대며 공들인 흔적이 여기저기서 묻어난다.
▲ 공연 시작을 기다리며두산아트센터 연강홀 앞에 있는 뮤지컬 <기발한 자살여행> 알림판 앞에서... ⓒ 유경
원작 소설을 읽은 것은 2006년 봄, 자살이라는 주제를 이렇게 내놓고 다루면서 죽음을 통해 삶의 길을 찾는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전개하는 소설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끝없이 새로운 이야기가 덧붙여지는 긴 소설을 무대 공연으로, 그것도 뮤지컬로 만드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으리라.
그 어려움을 감안하더라도 전형적인 결말로 서둘러 가버린 마지막 부분은 유감이었다. 물론 자살자들을 도와 죽음의 길에서 돌이키게 하는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사랑·관심·정·배려·위로·가치·소통 같은 것들을 꼽을 수 있는데 지나칠 정도로 단순하게 마무리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 아쉬움이 나만의 생각일까 의심이 들었는데, 공연이 끝난 후 만난 '수원시자살예방센터'의 백민정씨(여·교육 담당) 역시 "단순하고 전형적인 결말은 조금 유감"이라며, 그래도 "정답보다는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더 소중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자살을 주제로 한 뮤지컬이 공연될 만큼 우리 사회도 많이 변했다. 이것을 계기로 자살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밝은 공론의 장으로 나왔으면 좋겠다. 그래야 자살을 예방할 수 있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제대로 도울 수 있다. 청소년들이 이 뮤지컬을 함께 보고 토론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자살'을 계속해서 말하다 보면 저절로 '살자, 살자!'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자살할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함께 떠나는 여행길 저 끝에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거기서 그들은 또 무엇을 만나고 자신의 어떤 얼굴과 마주치게 되는지 '자살여행 버스'에 한 번 같이 타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 시간에도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이 살고 싶지 않다고, 죽고 싶다고 고민하며 세상과 동떨어진 방에 갇혀 '나 좀 봐달라!'고 소리 없이 외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아픔과 외로움과 죽음은 결코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바로 나의 아픔이며 외로움이며 죽음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인생버스'에 올라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뮤지컬 <기발한 자살여행>(원작 : 아르토 파실린나 / 프로듀서, 가사 : 송한샘 / 작곡, 음악감독 : 이지수 / 극작 : 이수연 / 연출 : 임도완 / 출연 : 성기윤, 김성기, 임강희, 김민수, 양꽃님 등) 3. 17 - 4. 19,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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