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을 비우니 목탁 소리가 쉬더라
[부안기행① ] 전북 부안 내변산 실상사지
▲ 월명암 가는 고갯길에서 바라본 내변산 봉우리들 ⓒ 안병기
그리고 무슨 실익(실익)이 있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애써 변산반도를 내변산과 외변산으로 나누기도 한다. 내변산으로 발길을 돌리면 내소사·개암사와 같은 고찰을 만날 수 있고, 외변산으로 향하면 해수욕장과 채석강과 적벽강 등 시원한 바닷바람을 쐴 수가 있다. 나는 바닷바람보다는 천 년의 세월을 넘어 불어오는 옛사람의 향기에 도취할 수 있는 내변산을 즐겨찾는 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다시 내변산의 지형에 대해 부연설명한다. "봉우리들이 백여 리를 빙 둘러 있고 높고 큰 산이 첩첩이 싸여 있으며, 바위와 골짜기가 깊숙하여, 궁실과 배의 재목은 고려 때부터 모두 여기서 얻어 갔다. 전하는 말에는 호랑이와 표범들이 사람을 보면 곧 피하였으므로 밤길이 막히지 않았다 한다"라고. 그 옛날 이곳이 얼마나 심산유곡이었는지를 능히 짐작게 한다.
버스 안엔 승객이라곤 단 두 사람뿐이다. 나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등산복 차림의 신사와 나. 그는 사자동이 고향이라는데 홀로 계신 어머님을 뵈러 서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내려온다고 한다. 736번 지방도를 따라 달리던 버스가 내변산 속으로 들어서더니 이내 중계터널을 통과한다. 이 터널이 뚫리기 전인 80년대만 해도 눈이 내리면 재를 넘지 못해서 버스가 다니지 못했노라고 시내버스 기사가 넌지시 귀띔한다. 굳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이규보의 <남행월일기>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곳이 얼마나 오지였는지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터널을 빠져나온 온 버스는 산과 산 사이, 좁은 골짜기 사이로 난 길을 달려간다. 창밖으로 보이는 경치가 자못 절경이다. 마치 강원도 정선의 소금강 지역을 지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수려한 경치다. 성긴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고 있다.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눈발인가. 들뜬 마음이 뒤척이기 시작한다. 당장에라도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고 싶은 기분이다.
6·25전쟁의 와중에서 소실된 가람
▲ 폐사지에 새로 들어선 미륵전 ⓒ 안병기
▲ 새로 들어선 삼성각. 옛 석축과 고목이 드러나 있다. ⓒ 안병기
한껏 고조된 감정을 부여안고 사자동 마을에서 버스를 내린다. 서울에서 온 신사와 작별의 악수를 한다. 자기 집을 가리키며 언제 기회가 있으면 한 번 들르라고 한다. 내변산 속으로 한 마리 지네처럼 뻗은 뻗은 길이 눈에 들어온다. 내변산탐방지원센터가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나그네를 반긴다. '시인의 마을'이란 새 이름이 낯 간지러운지 약간 멋쩍은 표정이다.
실상사지는 직소폭포로 가는 길목에 있다. 채 몇 걸음 걷기도 전에 폐사지인 실상사지에 닿는다. 실상사지는 도장처럼 생긴 인장봉과 제법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암봉인 천왕봉 사이에 있다. 한때 내소·선계·청림 등 과 더불어 내변산 4대 사찰의 하나로 손꼽히던 절이었건만 폐허가 된 것이다.
실상사는 689년(신문왕 9)에 초의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1394~1462)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절은 6·25전쟁의 와중에서 소실되고 말았다. 이 절에는 태종의 2남인 효녕대군이 쓴《효녕대군원문(孝寧大君願文)》·《고사경》·《고인경》 등 수백 권의 책과 고려시대에 만든 불상과 대장경 등 중요한 유물이 있었다고 한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1997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실시한 전면적인 발굴 조사 결과 총 네 곳의 건물지가 발굴 되었다. 전면 5칸, 측면 3칸 크기의 불전이 있었던 제1 건물지, 전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법당과 승방을 겸한 인법당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제2 건물지, 선방이나 요사채로 추정되는 전면 5칸, 측면 3칸의 제4 건물지 등. 출토유물은 조선시대 기와와 도자조각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내소사 봉래루는 실상사의 유물
▲ 내소사로 옮겨간 봉래루. ⓒ 안병기
행여 이곳 폐사지에서 아무것도 볼 것이 없었노라고 적잖이 실망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산 너머 내소사로 갈 일이다. 내소사로 가서 천왕문을 지나 몇 걸음 위로 올라가면 봉래루라는 멋들어진 2층 누각을 만날 수 있다. 이 누각은 본래 내소사의 것이 아니다. 1914년 이곳 실상사지에서 옮겨가 원형 그대로 지은 것이다.
장식을 거의 하지 않은 소박한 구조, 일체의 칠을 하지 않아 목재 그대로의 결이 살아있어 더욱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절집 간의 세력 다툼의 여파였는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화마를 피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고보면 새옹지마란 비단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닌 모양이다. 건물 같은 무생물조차도 그런 파란곡절을 겪으니.
아름다운 폐허를 꿈꿀 수는 없는가
▲ 전라북도기념물 제77호 실상사지 ⓒ 안병기
언제 보아도 폐사지는 아름답다. 폐사지에선 햇볕과 달빛·바람 소리조차 자신의 존재를 쉬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은인자중하면서 오롯이 空(공)의 세계를 구현해낸다. 그렇게 해서 바라보는 이 스스로 소멸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제행무상을 깨닫게 한다. 무설(無說)의 설법이라고나 할까.
그리하여 폐사지에서 완벽한 비어있음을 목격한 사람은 그 텅 빔을 자신의 내적인 충만으로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폐사지가 가진 거부할 수 없는 매혹일 것이다.
그러나 실상사지는 첫 대면에서 그런 내 기대를 여지없이 배반하고 만다. 폐사지의 전면에 근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전각들이 버티고 섰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것도 일종의 '복원'이라고 말하고 싶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불교식대로 말한다면 시절 인연이 다한 곳이 아니던가. 온전히 폐허에 바쳐지지 않은 폐사지가 나그네를 당혹게 한다.
시시비비는 그쯤에서 그만두기로 하고 우선 폐사지부터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미륵전이라는 현판을 단 전각의 뒤편으로 돌아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폐허의 흔적들이 하나 둘 고개를 내민다. 가장 먼저 나그네를 맞는 것은 허물어진 석축들이다. 무너져 내린 석축들은 제행무상을 설(說)한다. "이 세상 어디에 만고불변(萬古不變)하는 상(狀)이 있느냐. 덧없지 않은 것이 무엇이며, 흐르지 않고 끝끝내 머무르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폐허 여기저기엔 오래된 고목들이 묵언 수좌처럼 입을 꼭 봉한 채 서 있다. 저것들은 언제부터 이곳을 지키고 있었을까. 아, 알겠다. 허물어진 석축이야말로 이 고목들엔 깊고 오랜 상처라는 것을 …. 세상에 상처에서 유래한 침묵보다 더 무거운 것은 없다.
걸음을 멈추고 서서 물끄러미 폐허의 흔적을 바라보노라니 문득 어느 시인이 쓴 '쉼'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일 년을 비우니 목탁소리가 쉬고
이 년을 비우니 풍경소리가 쉬었다
발길이 텅텅 비더니
십 년이 지나고 백 년이 지나면서
대웅전이 먼저 눕고
지장전이 눕고 산신조각이 누웠다
경전 읽던 새 울음이 누웠다
나뭇잎도 내려와 쉬고
햇살도 내려와 쉬고
바람도 쉬고
시간조차 어슬렁이며 걷는
충남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
들판 한 채
보원사지는
텅 비어
다시 짓지 않아도
세상에서 가장 큰 절
흙 묻은 발자국들 걸어와
문 없는 문을 연다
- 고미경 시 '쉼' 전문
요즘엔 찾아가는 절집마다 이른바 '불사'가 한창이다. 새삼스럽게 "어떤 큰 절일까?"를 생각한다. 불상의 규모가 큰 절? 아니면 전각이 으리으리한 절집? 그러나 시인은 폐사지인 충남 서산 보원사지를 "세상에서 가장 큰 절"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시인의 말에 기꺼이 동의한다. 그렇다. 지친 중생들에게 광대무변의 '쉼'을 베풀어주는 절집이야말로 큰 절집이다. 그러므로 폐사지에 들어선 저 전각들은 '세상에서 가장 큰 절'을 없애고 들어선 것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한때 이 절집의 이름이었던 실상(實相)이의 뜻을 생각한다. 실상이란 언어나 마음으로 분별할 수 없는 진실 자체 혹은 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을 가리킨다. 우린 오늘날 물질이 승(勝)한 시대를 살고 있다. 물질이라는 허상에 사로잡혀 정작 중요한 실상을 놓치고마는 일이 무릇 기하이던가. 아아, 폐허다운 폐허를 갖고 싶다. 그 어떤 번거로운 상(像)보다 단순하고 아름다운 폐허를….
박중빈이 도통한 원불교 제법성지(制法聖地)
▲ 원불교 제법성지 ⓒ 안병기
▲ 일원대도비 ⓒ 안병기
비록 두 채의 전각이 들어서긴 했으나 실상사지가 보여주는 빈터는 여전히 광활하다. 좌측으로도 매우 넓은 터가 있다. 그곳에 자리잡은 두 채의 건물을 향해 간다. 이 건물은 원불교에서 지은 봉래정사이다. 이곳은 원불교의 '제법성지(制法聖地)'다. 일제 강점기라는 암흑기에 태동한 원불교는 법신불 일원상의 진리를 믿고 깨달아 실천하는 종교로 알려졌다.
원불교 교조 박중빈(1891~1943)은 전남 영광에서 테어났다. 어려서는 한학을 배웠다고 한다. 9세에 이르러 우주의 자연현상에 깊은 의심을 품고 수도에 들어가 20여 년간 구도 끝에 마침내 1916년에 진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 후 1919년에 이곳으로 들어와 수도정진했다. 불교식으로 말한다면 보림(補任)을 한 것이라고나 할까. 이듬해에는 제법(制法), 즉 원불교의 기본 교리를 만들어 선포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은 전남 영광··전북 익산과 더불어 원불교 3대 성지의 하나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봉래정사 오른쪽에 있는 돌계단을 딛고 올라간다. 계단 꼭대기에는 '일원대도(一圓大道)'라 쓰여진 비가 서 있다. 박중빈이 이곳 실상사에서 수련하여 도통한 것을 기념하는 비이다. 일원이란 우주 만물의 본원이며 모든 부처와 중생의 본성 자리이다. 그러니 얼마나 큰길인가. 뒷면에는 비 뒷면에는 제법성지의 내력을 밝히는 글이 적혀있다.
계단을 내려와서 다시 실상사터로 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곳이 얼마나 아늑하고 아름다운 곳인지 실감이 온다. 오래 머물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애써 지우며 낙조대 아래에 자리한 암자 월명암을 향하여 길을 서두른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월명암으로 가는 길은 가파르다. 산길을 오르다가 틈틈이 산마루에 멈춰 서서 실상사지가 있는 골짜기와 산봉우리들을 바라본다.
자꾸만 머릿속을 감도는 육당 최남선이 쓴 '심춘순례'라는 글 몇 구절. '심춘순례'는 최남선이 1925년 3월부터 50여 일간 지리산·내장산·변산 등지를 둘러보고 나서 쓴 기행문이다.
실상(實相) 골목 저쪽으로 변산의 대관이 칠분(七分)이나 한 눈에 바라보여 경승이 과연 가절하니 그 위치와 안계(眼界)가 금강산으로 말하면 망군대에 당할것이었다. 나즉나즉한 산이 둥글둥글하게 뭉치고 깔려서 앞엣 놈은 주춤주춤, 뒤엣 놈은 갸웃갸웃 하는 것이 아마도 변산 특유의 구경일 것이다
- 최남선 저 '심춘순례'에서
내변산의 봉우리들을 이보다 더 절묘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싶다. 참으로 재주가 도드라졌던 사람이다. 그러나 차라리 재주가 없었더라면 어찌어찌 변절이라는 낙인만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을….
덧붙이는 글
1월 9일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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